일찌감치 출근해서 어제 받아둔 김밥을 냉장고에서 꺼내 먹다가 남편의 전화를 받았다. 뭘 먹으면서 전화를 받냐는 질문에 어제 행사 끝나고 김밥이 남아서 냉장고에 넣어뒀던 것을 먹고 있다고 했더니 남편 왈 '상위 12프로가 남은 김밥을 왜 먹고 있어?'란다.
요즘 우리 부부에게는 신종 유행어가 생겼다.
'상위 12프로가 이 정도는 사야지.'
'상위 12프로가..........'
물론 이 말은 매우 비꼬는 이야기다.
왜냐,
재난지원금 이야기가 회자되면서 서민이었던 우리 부부는 갑자기 상위 12프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앞의 상황은 사실 이 뜨거운 여름에 남은 김밥을 먹었다가 병원갈 일 만들거냐는 남편의 우려였다. 실제로 여름에 김밥 잘못 먹고 탈나는 경우가 부지기수니. 여름엔 김밥과 샌드위치는 만들면서 쉰다고 하지 않나? 어제 상온에 비치되었다가 냉장고에 넣은걸 오늘 먹고 있다고 하니 기겁을 했을테다.
그런데 왜 우리는 갑자기 상위 12프로가 된 것일까.
건물주도 아니고 사장도 아니고 집안에 자산이 많아서 놀고먹는 애들도 아니고 둘 다 전문직도, 대기업 직원도 아닌 그냥 일반 직장인인데. (하물며 나는 기간제다 ㅠ)
우린 그저 8년 전 결혼 당시 빚과 함께 변두리 빌라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한 그냥 평범한 대한민국 3,40대인걸.
판춘문예라고 불리는 네이트판에 올라온 글에 낚이고 싶지 않았지만(항상 낚이면서...) 이 글은 그냥 제목으로 호다닥 낚이고 말았다.
'소득이 많아서 재난지원금 못 받으면 서운한가요?' 라는 글.
얼마전부터 뉴스에서 계속 추석 전에 재난지원금을 지급하겠다는 이야기가 올라왔다.
세금이 화수분 처럼 나오는지 퍼주고, 퍼주고, 또 퍼줘도 돈이 남아도나 싶은 생각이 든 것은 비단 나뿐일까. 이렇게 퍼주면서 또 슬금슬금 세금 올릴거면서... 유리지갑은 또 얄짤없이 탈탈 털릴건데.
그래도 작년 전국민 대상 재난지원금을 한 번 받아서 요긴하게 썼던 바, 올해도 그렇겠지 했던 생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우리가 상위 12프로라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와 함께.
국민의 약 88프로가 받는다는 재난지원금이 우리 가구는 제외였다.
우리가 언제부터 상위 12프로였지?
대한민국에 나보다 잘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나는 강남 3구에 살지도 않고, 브랜드 아파트에 살지 않는다. 외제차도 없고 살면서 명품 한 번 제대로 사보지도 못했으며 옷은 아울렛이나 인터넷으로 사서 입고 물건 가격을 비교해서 가급적이면 싼 것을 산다. 편의점 4캔에 만원 맥주도 비싸서 마트에서 6캔에 9,900원짜리를 꾸역꾸역 들고온다. 그런데 우리 가구가 대한민국 상위 12프로라니. 대한민국 상위 12프로는 기업 오너나 건물주들 아니었나? 나는 여태 대한민국 상위 12프로쯤 되면 백화점에서 '여기부터 저기까지 다 주세요.' 하는 사람들인 줄 알았다.
하물며 정부는 맞벌이 부부에게 욕을 먹지 않기 위해 신박한 방법을 제시했다. 가족에 +1 해서 건보기준을 산정하라니. 내가 난임시술을 때려치우고 다시 일을 시작했기에 부부합산 소득이 아주아주 간당간당 넘어서서 대상자에서 제외되었다. 본의 아니게 아이도 안생기는 바람에 가구원도 늘리지 못해서 다른 집들처럼 가구인원 산정에 애들이 +a 가 될 수 없었고.
맞벌이 부부 +1. 없는 사람을 하나 추가하는건 대체 무슨 방식이람.
여론이 악화되자 정부는 지원 제외 대상을 추가했다. 가구 구성원의 2020년 재산세 과세표준 합계액이 9억을 초과하거나 금융소득 합계액이 2천만원 초과인 경우 제외. 이것만 보면 그냥 좀 돈많은 사람들을 제외했나 싶지만 자세히보면 그게 아니다.
재산세 과세표준이 저정도 나오려면 공시지가 약 15억, 실제 거래가는 20억이 훌쩍 넘는 집의 소유자여야 하고, 금융소득 합계액이 2천을 넘으려면 예금 금리가 12개월 거치에 약 1.5%대임을 감안할 때 현찰로 15억 이상을 금융기관에 예치한 사람이다.
이들과 비교하면 우리는 완전 가난뱅이다. 공시지가 15억짜리 집은 개뿔... 쳐다도 못볼 곳인데다 현찰이 은행에 있기는 커녕 마이너스 통장으로 살고 있으니까.
이쯤되면 저 재난지원금 지급 기준이 굉장히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저런 찐 부자들이랑 일반 월급쟁이들을 둘둘 뭉쳐서 상위 12프로로 묶어버렸으니까. 저런 자산가들이랑 월급쟁이들이 어떻게 동급일 수가 있는가? 이번 기준으로 인해 아마 아이가 없거나 하나 있는 맞벌이 부부 또는 소득이 좀 높은 외벌이 가정들은 모조리 대상에서 제외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저 네이트판 글의 쓰니같은 사람들은 이들을 비난하기 시작한다.
실제로 기사에 달린 댓글에도 이런 말들이 종종 보였다.
'나도 그 정도 돈 벌어서 재난지원금 안 받았음 좋겠네.'
'그 정도 돈 버는 사람들한테는 재난지원금 안 필요하지 않나?'
그리고 급발진까지 한다.
'재난지원금 받고 싶으면 연봉 낮은 직장으로 이직해서 받으면 될 거 아니냐'며.
대체 어떻게 사고를 하기에 저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재난지원금 안 받아도 상관없다.
하지만 이런 기준으로 못받는 것은 납득이 안가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버는 돈은 이 불볕더위에도 손선풍기 하나 들고 대중교통에 흔들리며 출퇴근하고 업무로 파김치가 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와서 '오늘하루 힘들었다' 하며 소파에 풀썩 주저앉는 삶을 살면서 버는 돈이다.
다행인건 댓글에 대부분 이런 이야기들이 달려있어서 왠지 모를 위로를 받았다.
원글이 어그로가 의심될 정도로 마구 써진 글이라 댓글도 폭발했다
실제로 우리 둘의 급여명세서에 엄청나게 빠져나가는 공제금액들을 보면서 거의 1년에 몇 달치 월급은 세금으로 나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렇게 낸 세금으로 혜택은 거의 못받았다. 중위소득 이상이기에 늘 제외. 제외. 제외. 그래서 늘 원래 맞벌이는 대상자가 아니겠거니 하면서 살았고.
코시국에 재난지원금을 주는 것을 뭐라 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 필요한 사람들에게 제대로 선별해서 준다면 그것에 대해서 뭐라 할 이유도 전혀 없다.
이 끔찍한 폭염에 거리두기 때문에 시설을 닫아버려 어려운 사람들이 에어컨 바람 한자락 못쐬고 있는 현실 아닌가. 나도 점심값이 없어서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워본 적도 있고 집이 갑자기 어려워져서 저소득층 대상 장학금을 받아 학비에 보태본 적이 있다. 때문에 어려운 시기에 그 돈이 얼마나 소중한지 안다. 그런 사람들의 삶이 내가 낸 세금으로 조금이나마 덜 어려울 수 있다면 그건 정말 상관없다.
그런데 선정 기준이 납득이 안되는 88프로의 사람들에게 인당 25만원씩 주는 것은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선별적 지원을 할 거라면 제대로 골라서 적절한 곳에 지원을 해야 하는데 말많은 건보료 기준으로 지급 기준을 잡은 것 부터가 문제다. 건보는 자산이 큰 사람도 작은 월급의 직장을 다니고 있으면 직장가입자 기준을 따라가게 된다. 그리고 진짜 말 많고 탈 많은 지역가입자...... 기준을 명확히 따져보진 않았지만 소소한 재산 있으면 아마 프리패스로 지원대상자 제외인 것으로 알고있다. (직장가입자에 비해 워낙 큰 금액을 징수하니까)
게다가 유리지갑 직장인들은 급여에 준해서 얄짤없이 탈탈 털어가면서 혜택은 하나도 주지 않는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자산이 없다면 말 그대로 월급벌어 세금내며 허덕이며 사는걸.
그리고 나에게도 25만원은 정말 큰 돈이다. 나의 한달 용돈이 50만원인데 그 절반 금액이 어찌 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난번처럼 재난지원금은 전체 지급하고 안받을 사람들에게는 기부로 돌려받는 형태로 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 기부금 처리 해준다고 홍보만 잘 했으면 많은 직장인들은 기부를 선택할테니. 그리고 기부 안하더라도 어차피 소비진작이 일어나고 세금도 내게 된다.
아니면 저소득층에게 좀 더 큰 금액으로 지원을 했어도 좋을 것 같다. 말 그대로 '재난지원금'이니 재난으로 인해 곤란해진 사람들에게 더 도움이 되어야 되는 것 아닐까. 나는 당장 25만원이 없으면 좀 부족한 정도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25만원이 절박한 돈일 수도 있으니 그들에게 더 지급되어야 된다고 본다. 정부가 선정한 저 88프로가 모두 이 재난 사태로 인해 곤란해진 것은 아닐것이다. 더욱 더 꼼꼼히 대상자를 선정해서 꼭 필요한 곳에 돈이 흘러가야 할 것인데 이제보니 나라가 그걸 선별할 능력이 없는 것 같다. (그럼 그냥 전국민한테 10만원씩 줘......)
이 외에도 좋은 방법들이 많았을텐데 왜 엄한 사람들을 상위 12프로에 머리끄덩이 잡아 강제로 집어넣어서 황당하게 만드는 것일까. 진짜 부자들과 맞벌이로 꾸역꾸역 살고있는 사람들을 구별하는 것이 그렇게나 어려운 일이라니. 그리고 상위 12프로와 13프로는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인가. 12프로 이내는 부자인데 13프로부터는 재난지원금이 필요한 대상이라는 기준도 정말 이상하다. 이건 희한한 역차별이다.
난데없이 대한민국 상위 12프로 카테고리에 던져진 사람들은 황당한 쓴웃음을 짓고 있을것 같다.내가 상위 12프로라니!!! 라면서. 아마 다들 우리처럼 상위 12프로가 왜 이러고 사냐며 자조적인 멘트를 농담처럼 날리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