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 아들이 같이 있는 집들은 딸이 어떤 존재인지 알기 때문에 딸 같은 며느리는 재앙이라는 것을 엄마들이 아주 잘 압니다. 하지만 아들만 있는 집은 딸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기 때문에 막연히 어떤 환상 같은 것을 갖고 있는 듯 합니다. 저는 아들 둘인 집의 큰 아들과 결혼했는데 어김없이 이 난제에 부딪혔습니다.
남편은 시부모님께 '얘가 왜 딸이야? 장모님 딸인데? 얘는 며느리지' 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괘씸죄가 적용되어 욕을 먹었고 저는 남편을 조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머님, 그건 제 취향이랑 좀 달라요....
결혼 전에 남편이 '엄마가 너에 대해 엄청 기대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남자만 셋인 집에 어머님도 여성의 존재가 있었으면 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편한테 선을 보라고 그렇게 들들 볶으셨대요. '며느리' 라는 명칭의 여성과 '딸'처럼 잘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셨던듯. 사실 지켜지기 힘든 일이죠. 처음엔 옷도 사주시고, 가방도 사주시고, 악세사리도 사주시고, 신발도 사주시고.... 그동안 딸이 없어서 못하셨던 쇼핑을 맘껏 하셔서 즐거우신 것 같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원피스를 사두셨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사주시는 마음은 정말 감사하지만 저는 저만의 코디법이 있고, 좋아하는 컬러나 모양이나 뭐 그런 개취(개인 취향)가 있잖아요. 다른걸 다 떠나서 옷은 '사이즈'라는 것이 있는데.....
어머님 눈에 예쁜 물건들이 저랑 맞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다면 문제였을까. 그리고 뼈마디조차 얇은 남편 식구들과는 달리 우리집은 북방 민족의 후손인지 우람한 통뼈를 자랑하는 터라 저는 옷 선물이 스트레스였습니다. 지난번에 주셨던 가디건은 팔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이번엔 원피스라니.
그 연락을 받은 뒤로 일주일 동안 풀만 먹고 헬스장에서 런닝머신을 두 시간씩 타고 그랬습니다. 시댁 방문하는 날엔 급히 구매한 비싼 보정 속옷도 입었어요. 분명 또 입어보라 하실 것이 뻔하니까요. 그냥 선물로 주시고 가져가서 알아서 입어라 하면 될텐데 입고 나와봐라 하시니 그게 저에게는 엄청난 스트레스였습니다. 안들어가면 어떡해요?
비싼 보정 속옷 덕분인지, 지난 일주일간 하늘이 노래지도록 안먹고 급 다이어트를 한 덕분인지. 원피스의 지퍼는 잘 올라갔습니다. 다만 일주일 내내 배고픔에 쩔어서 야수처럼 변한 저를 감당하느라 지옥 문 앞에 다녀온 남편은 '얘 맘에 드는거로 알아서 사게 그냥 돈으로 줘' 라고 했다가 또 욕을 먹었습니다.
제 의사와 달리 상황은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편안해 졌습니다. 사주신 물건은 꼭 인증을 해야하는 부담감도 적지 않았거든요. 다음 시댁 방문 때 입고, 들고, 신고 가야 된다거나, 착용중인 인증샷을 보내야 한다거나. 받아놓고 아무 반응 없는건 선물해주신 분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거든요.
너 같은 며느리 볼까봐 무서워서 막내 장가 못 보내겠다
우리 엄마가 늘 하는 레파토리 중,
1. 너 같은 딸 꼭 낳아라.
2. 너 같은 며느리 볼까봐 막내 장가 못 보내겠다.
그럼 매번 전 이렇게 말했죠.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런데 가끔은 진짜 저같은 딸을 낳을까봐 두려운 적이 있었던 적도 있습니다.
저희집은 딸 둘에 막내 아들 하나의 80년대 출생자들의 가장 기본적인 남매 구조의 집입니다. 저희 막내동생은 늘 저희에게 말했습니다.
'누나들같은 여자 만날까봐 무서워서 연애를 못해'
'누나들 때문에 여자에 대한 환상은 없어진지 오래야'
'난 저 큰 코끼리랑 작은 코끼리땜에 장가 못 갈것 같아'
거짓말하고 있네.
그리고 누나들이 단련시켜 놔서 눈만 봐도 여자 마음 알게끔 셋팅 해줬는데 고마워서 절 하진 못할망정. 어릴적부터 맞을까봐 생존 본능으로 장착한 여자에 대한 눈치 백만단 덕분인지 남동생 옆에는 대학교 때부터 여자 동기들이 몰려 있었습니다.
엄마는 막내 장가갈 땐 니네 둘은 이민가서 사니깐 시누이 없다고 하겠다 하셨습니다. 시누가 둘이면 아들 장가 못간다면서 니들은 결혼식만 참석하라며... 그래서 저는 미국, 둘째는 영국에서 왔다고 하기로 했어요.
이렇게 까지 다 셋팅해 뒀는데 왜 때문인지 얜 아직 미혼이네요?
딸은 엄마가 밥 차리는 동안 소파에 누워 있을 수 있다
시부모님이 딸 같은 며느리를 원하셔서 며느리는 친정에서 하던대로 시댁에 들어가자마자 쇼파에 드러누워서 '엄마 밥 줘' 를 시전합니다. 그러자 시어머니는 '어머, 왜 내가 니 밥을 차리니' 라고 한 뒤 딸 타령이 쑥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보면서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런 글을 볼 때마다 '딸' 이라는 포지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딸과 며느리의 차이는 극명합니다.
* 엄마가 밥차리는 동안 소파에 딩굴러 있다가 '수저 놓아라' 라는 소리에 부스스 일어나서 수저통 들고 식탁에 가는 적이 많다.(딸) vs '가서 앉아있어라' 라는 말을 들어도 주방에서 눈치보며 발 동동 구르면서 얼쩡얼쩡 서있다가 상을 차린다.(며느리)
-> 물론 엄마 도와서 딸들도 상차리지만, 식사시간에 뭘 급히 하고있거나 해서 밥 차리는 것을 못 도와드려도 딸은 딱히 엄마의 눈치가 보인다 뭐 그렇진 않죠. 엄마도 그냥 쟤가 바쁜가보다 라고 생각하시고 상 다 차려지면 '나와서 밥 먹어라!' 소리칩니다.
* 방 안에 있다가 엄마가 '밥 먹어라' 하면 나와서 밥 먹고 그릇 싱크볼에 던져두고 다시 방에 들어간다. 어쩌다 가끔 설거지한다.(딸) vs 시부모님 눈치를 보며 가시방석에 있다가 재빠르게 상도 차리고 밥도 미소 띄우면서 먹고나면 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고 과일도 깎는다(며느리)
-> 딸은 자다가 부스스 나와서 눈곱 떼면서 밥 먹으면, '세수는 하고 밥상에 앉으라'고 구박은 받을지언정, 미소를 띄며 리액션을 하며 밥 먹을 일은 없죠. 미소를 띄며 리액션을 하면서 밥을 먹으면 우리 엄빠는 '저게 미쳤나' 라고 생각하실 듯 하네요.
저는 시댁에서 설거지를 한 적이 없습니다. 어머님이 저한테 매번 과일 깎으라고 하시고는 어머님께서 설거지 하셨거든요. 설거지봇이 되는 며느리들도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감사하네요.
엄마는 저와 제 여동생에게 설거지를 잘 안시키셨습니다. '어차피 결혼하면 계속 해야 될 거 시집가면 해라, 여자 손망가지면 보기 싫다.' 라고 하셨죠.
그래서 전 미혼이었을 때도, 결혼한 후에도 설거지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 되었습니다.
* 엄마에게 서운한 점이 있으면 엄마한테 바로 얘기하고 울며 불며 싸운다.(딸) vs 서운하고 힘든 점이 있으면 속 끓이다가 남편을 잡는다.(며느리)
-> 시부모님께 엄마,아빠한테 하는 것 처럼 할 수 있을까요? 전 엄빠한테 한 거 1/10도 안했는데... 드세단 소리를 들었거든요.
* 반말 vs 존댓말
-> 각 집안 분위기 차이별로 있겠지만 저는 부모님랑 반말로 대화합니다. 우리집 애들 모두. 제 친구들이나 지인들도 대부분 엄마, 아빠라고 부르고 부모님이랑 반말로 대화하고요. 그런데 시부모님이랑 반말로 대화하는 집 있나요? 그리고 호칭은 엄마,아빠가 아니고 어머님, 아버님 같은 극존칭을 씁니다.
제가 저희 부모님께 갑자기 어머니, 아버지 라고 부르면 '쟤가 어디 아픈가' 또는 '저게 어디가서 사고쳤나' 라고 생각하실 듯 하네요.
딸은 엄마와 반말하는 존재입니다!
딜레마 최고조 지역, 찜질방과 목욕탕
딸 같은 며느리 사태의 끝판왕은 목욕탕 & 찜질방입니다. 대부분 사춘기를 거치면서 여자분들은 엄마랑도 목욕탕 같이 안가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저도 그시점 즈음에 목욕탕을 안가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목욕탕에 가보면 여성들의 연령대에 중, 고등학생은 별로 없잖아요?
그리고 젊은 여성들은 탕 목욕 안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저도 모두가 다 벗고 몸 담그는 탕은 안들어갑니다. 결벽증은 아닌데 그냥 탕에 들어가는 것은 좀 꺼려지더라고요.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이런 상황에 시어머니랑 목욕탕을 가야한다 생각하면... 저는 못합니다. 차라리 안씻겠습니다.
엄마랑도 목욕탕 안가는 여성들이 많으니 제발 며느리랑 목욕탕 가는 로망 갖고 계신 분들은 그 로망 없애셨으면 합니다. 세신사분한테 만오천원 주면 등 밀 수 있어요. 어느집 며느리는 시어머니랑 같이 목욕탕 다닌다더라 하는 것은 정말 특별 케이스니깐 일반화 안하셨으면 합니다.
남편이 장인 어른이랑 목욕탕을 같이 간다. 이거 이상하잖아요. (남자들은 안 이상한가요? 남편은 못가겠다고 하던데) 혹시 제 글 보시는 분들중에 이런 남자분들 있으시면 의견 주시면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근 30년 가까이 다른 집에서 살아 온 사람들이 갑자기 엄마와 딸이 될 수는 없습니다. 며느리는 아들과 사는 것도, 시부모님을 만난 것도 너무 새로운 상황이라 적응하는데 허우적 거리고 있거든요.
말 안듣고 지지고 볶고 엄마한테 등짝맞고 울며불며 쌓아온 오랜 세월 없이, 전혀 모르고 살다가 아들이 매개가 되어 만난 사이에서 며느리가 갑자기 딸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딸 같은 며느리를 바라는 시부모님들의 마음은 대부분 진짜 딸처럼 굴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살살거리고 애교부리는 것을 바랄 때 딸 같은 며느리를 이야기 하시더군요. 진짜 딸 있는 집은 딸 같은 며느리 절대 안바랍니다. 정작 우리 엄마부터 너 같은 며느리 볼까봐 겁난다 하시는걸요? 딸같은 며느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냐 했더니 니들만으로도 질리게 충분한데 무슨 또 며느리까지 딸이냐며 시끄럽다 하셨습니다. 괜히 개딸이라는 말이 있겠나요.
오랫동안 착실하게 이런 저런 시간이 많이 쌓이고 나면 그 이후엔 딸 같은 며느리... 가능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