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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근쥬스 Jul 21. 2020

가운데서 등이 터진 착한 내 남편

21세기 남편의 역할

엄마는 처음 만난 예비 사위의 첫 인상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저 아이는 귀가 보드라워서 심성이 참 착하겠다'


귀가 보드랍다?무슨 뜻이냐고 엄마한테 물어봤더니 사람이 심성이 곱고 착하다는 뜻이라고 하시더군요. 사돈어른들이 아들 참 잘 키우셨다고.


뿔난 망아지처럼 날뛰는 우리집 애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었으니 생전 들어본 적이 없었겠지...




'나 결혼한다'고 밝히지인들의 조언 총공세가 펼쳐졌습니다. 저마다 결혼에 대해 각자 이야기들을 폭포처럼 쏟아내는데 다 맥락들이 비슷하더라고요. 시댁에 대한 불편한 이야기들.


에이 설마 나도 그러겠어? 라고 했지만, 저 역시 결혼해서 며느리가 되니까 지인들이 말한 것 처럼 불편한 경우들이 생겼습니다. 전엔 시댁이 이렇게 가부장적이신지 몰랐는데, 결혼을 하고 보니 절 깜짝깜짝 놀라게 하시더라고요.


저는 결혼하기 전에 남편에게 확인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1. 제사.

2. 명절 때는 번갈아서 양쪽 집을 먼저 가고싶음.


남편은 '아버지는 둘째라 제사 없음. 여태 없었음. 명절은 내가 엄빠한테 말해볼게.' 라고 했습니다.

결혼하고 어떻게 됐을까요?


없다던 제사는 생겨났고 몇년 째 명절때마다 늘 우리집이 아닌 시댁에 먼저 가서 전을 부칩니다. 여기에 시이모님으로부터 며느리의 도리를 잘하라는 말까지...


결국 신혼집에는 피바람이 불었습니다.


내 결혼의 중요 조건이 딱 두 개였는데 왜 둘 다 안돼???


남편은 난색을 표하며 말했습니다.

나도 이럴줄 몰랐어.




시댁과 며느리의 트러블 사이에서 다들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남편은 뭐하고 너 혼자서 그렇게 당했어? 너 그런 얘기 들을 때 남편 가만있었니? 그 상황에선 남편이 부모님 말렸어야 되는거 아냐?'


... 남편들은 항상 문제 상황에서 꿀먹은 벙어리마냥 가만히 있거나 자리를 비워서 탈, 어줍잖게 편 잘못 들어서 탈, 할 말과 안할 말을 못가려서 탈 등등등 들어보면 천덕꾸러기도 이런 천덕꾸러기들이 없습니다.


그런데 애초에 남편들은 상황이 그렇게 되길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결혼이 처음이거든요. 게다가 저희처럼 개혼이어서 며느리를 대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처음 봤다면 남편들이 더더욱 멘붕일겁니다. 서로가 다 각자 하는 방향대로 하려고 하니까요.


때문에 많은 남편들이 '나도 엄빠가 저럴지 몰랐다니까!' 를 외칩니다. 다못해 아들이 2~3명 있는 집의 둘째나 셋째면 그래도 부모님이 며느리를 대하는 방식을 곁눈질로나마 봤을텐데. 사실 어떻게 속속들이 부모님의 맘을 알겠나요. 그러니 열받은 와이프에게 '우리 엄만 안그래'를 시전합니다. 제 남편은 저희 엄마 말대로 귀가 보드라운 사람이 맞았습니다. 마음이 너무너무 약하고 착해서 시부모님이랑 저 사이에서 제대로 등이 터졌거든요.


남편도 나름대로 결혼생활을 잘 만들어 나가려고 이런저런 액션을 많이 취했지만 자신도 처음 보는 부모님의 모습에 충격, 멀쩡해 보이던 와이프의 이성을 잃은 모습에 충격. 남편은 점점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상태가 되어갔습니다.


부모님 편을 들었더니 와이프가 도끼눈을 뜨고 덤벼들고 와이프 편을 들었더니 부모님이 난리가 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와이프 편을 들면 덤으로 따라오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마누라 치마폭에 싸인 못난 놈이라고. 저도 종종 전해들었습니다. '가 그러라고 하든?'


태생이 비폭력 평화주의자인 간디 남편은 태어나서 그렇게 극렬하게 화를 내본게 아마 저랑 결혼하고 처음인 것 같았습니다.  

 



대한민국에는 공공연하게 며느리에게 강제로 요구되는 '며느리의 역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남편에게 요구되는 '중간역할'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중간역할을 한답시고 남편들이 실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중간역할을 이렇게 하면 이혼서류 받아 들 각오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1. 부모님 앞에서 와이프를 이상한 사람 만들고 집에 와서 싹싹 비는 것.

싹싹 빌면 통할 것 같죠? 절대 아닙니다. 잊지도 못할거에요.


2.  니가 알아서 하라며 본인은 발 빼는 것.

와이프가 시부모님한테 직접 본인의 마음을 말해서 잘 해결되는 경우는 한 번도 못봤습니다. 우리나라는 며느리가 시부모님한테 시시비비를 따지면 천하의 못된년이 됩니다. 시부모님 쪽의 과실비율이 크다고 해도 그렇습니다. 며느리가 불편하다고 말하면 '니가 감히' 가 나오거나 '우리가 뭘 어쨌다고 저런다니'라며 예민보스로 몰아가기 십상입니다. 와이프는 등 뒤로 숨기세요. 무조건 남편이 나서서 해결해야 합니다.


3. 부모님 앞에서 와이프 험담하고 와이프 앞에서 부모님 험담하는 것.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고 서로의 골만 더 깊어집니다.


4. 우리 부모님이 어른이니까 또는 원래 그러니까 그냥 니가 좀 맞춰.

어른이 어른다우면 저절로 존경심이 우러러 나옵니다. 그리고 원래 그런 사람은 없더라고요. 다 상황에, 사람에 맞춰서 그러는 거죠.


5. 부모님한테 괜히 핑계 대지 마세요

남편들중에도 본인 부모님을 잘 거절하지 못해서 괜히 와이프가 이래서, 와이프 일이 이래서, 애가 이래서 등등의 핑계를 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니 그냥 니가 집에 가기 귀찮은거잖아요... 왜 쓸데없는 핑계를 대는건가요?? 그리고 자꾸 핑계대다 보면 부모님 입장에서는 '그 회사 일은 걔 혼자 다한다니?' 같은 엉뚱한 핀잔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이런저런 와이프 핑계 쥐어짜지 마시고 명확하게 '주중에 너무 바빠서 주말에 쉴거야.' 라고 명확하게 입장 전달 하세요. 그래도 오라고 하시면 '진짜 피곤해.'라고 하시면 됩니다. '니 처는 왜 맨날 오라하면 안오니'가 나오면 사실대로 말하세요 '그 사람도 일하느라 피곤한데 주말에 쉬어야지. 좀 놔둬.'라고.




와이프들은 남편과 얘기할 때 절대 하지 말아야 될 말이 있습니다.

'니네 집'


사실 시댁에서 황당한 대우를 받았거나 어이없는 말을 들었다면 뭔 말인들 안나오겠냐만은 가족 건드려서 좋을 것 하나도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발생한 사건은 저 멀리로 사라지고 '니가 우리집 무시하냐' 이런식으로 상황이 흘러가게 됩니다.


화나는 것 꾹 참고 불편했던, 또는 상처받았던 나의 마음 상태만 차분히 설명해야 합니다. (어려운 것 알아요. 하지만 하셔야 해요)


내가 시댁에서 이러이러한 상황을 맞닥뜨렸는데 내 마음이 이렇게 불편했다. 또는 크게 상처받았다. 내가 당신 부모님께 이런 얘기를 들었는데 내가 마음이 많이 상했다. 또는 다쳤다.  


'니네 집 왜 그래?' 하는 순간 서로 지옥 끝까지 싸우자가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싸워봐야 둘 다 손해입니다. 때린 사람은 맘 편히 는데 맞은 애랑 그 옆에서 보고있던 애랑 이 둘이서 칼부림 해봐야 둘 사이만 나빠지지...


이성을 찾고 대화를 합시다. 남편은 앞에 말씀드렸죠? 가운데 껴서 새우등이 터질 대로 터졌어요. 근데 사실 저도 너무 화가나서 이성을 잃고 싸운 적 많습니다. 그랬던 것이 후회스러운 적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싸워봐야 좋은 결과 절대로 안나오더라고요.

 

와이프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며느리라고 불리는 순간 을이 됩니다. 아직도 깨지 못한 K-며느리라는 프레임이 불리하게 작용을 하거든요. 특히 사회적 지위가 있거나 본인 삶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온 여자들은 결혼 후 이 프레임과 맞닥뜨리면 그간 쌓아온 자존감이 박살납니다. 본인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에 더 좌절하게 되죠.


이런 와이프가 당신의 가족들 때문에 힘들다고 말을 한다면 그건 고심 끝에 어렵게 나온 이야기이니 경청하고 적극적으로 상황을 해결해야 합니다. 모른척하고 시간이 해결하겠거니 하면서 묵히거나 대충 지나치려고 하면 골이 너무 깊어져서 나중엔 정말로 해결하기 힘들어집니다.


시부모님이 대단히 나쁜 사람이 아닌 이상 와이프들이 그분들의 이야기나 행동에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면 시부모님들이 살아오신 생활 속 오랜 관습에서 무심코 나온 말이나 행동 때문일 수 있습니다.


와이프들은 계속 뭔가 이상한데, 뭔가 불쾌한데, 뭔가 기분이 나쁜데 내가 이걸 불편하다고 하면 이상할까? 나에 대해서 나쁘게 생각할까? 등등 별별 생각을 다 합니다. 그러다가 어렵게 남편에게 본인의 마음을 터놓은 것이거든요.


와이프 입에서 이 이야기가 나온 이상 이제 와이프가 조용히 입 다물고 웃고 있기만 해서 지켜졌던 화목한 가족의 모습은 당분간 없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상황이 나아지려면 모두가 다 바뀌어야 하거든요.


사실 시부모님은 사회적 관계도에서 며느리보다 훨씬 상위에 있습니다. 때문에 남편은 와이프가 다친 것을 알면 적극적으로 방어해줘야 합니다. 이미 갑을이 정해진 관계에서 을이 다친 경우는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치료가 어렵습니다.


다들 각자 살아온 터라 서로에 대해서 몰랐기 때문에 상대방이 불편해 하는지 모르고 그랬을 수도 있으니, 새로 만들어진 관계들은 가운데에서 연결핀 역할을 하는 남편의 적극적인 조정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부모님 세대가 갖고 있는 낡은 고정관념은 고쳐나가는 것이 좋잖아요. 다같이 더불어 행복하게 잘살려고 한 결혼인데 기존의 관념 때문에 서로에게 상처가 된다는 것은 참 슬픈 일입니다.




고부갈등이 생겼을 땐 남편은 부모님 보다는 와이프 편을 드는 것이 좋습니다. 고부갈등이 인지됐다면 양쪽 편을 공평하게 들면서 가는 해결책은 없습니다. 이미 싸움이 시작 됐거든요.


부모님은 혈연관계이기 때문에 쉽게 끊어지지 않지만 와이프는 서류에 도장 찍으면 끝입니다. 무촌이잖아요.

앞으로 남편과 삶을 같이 살아가는 사람은 와이프고, 가족은 이제 부부와 그 자식들입니다. 엄마는 이렇게 표현하시더라고요 '솥단지를 따로 걸었다'라고. 새 가정을 꾸려 독립했다는 말이죠.


한가지 잊지 말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당신의 와이프는 당신만 보고 결혼을 결심한 사람입니다. 많은 여성분들이 말합니다. '남편을 너무 사랑해서 결혼했더니 딸려오는 부수적인 것들 때문에 너무 힘들어서 이제는 남편도 싫어졌다.' 라고.


와이프를 희생시켜서 가정을 지키려고 하진 마세요. 끝없이 한쪽이 희생만 하는 관계는 부부사이에 없습니다. 그러다 정말로 와이프가 지쳐서 남편을 더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면 어쩌나요.




문제가 생겼는데 어떻게 해야될 지 방법을 모르겠다고요? 일단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생각나는 또는 좋아보이는 해결 방법은 다 동원해 봅니다. 그럤는데 역효과가 났다? 그럼 그것도 또 해결해봐야죠.


사실 모두가 다 모릅니다. 다들 결혼이 처음이거든요. 게다가 가족의 형태와 성격은 집집마다 다릅니다. 정답이 없으니 부딪혀보면서, 수정해나가면서 각 상황에 맞는 방법을 찾아나갈 수 밖에요.  


다만, 지치더라도 최선을 다하세요. 그리고 남편과 결혼생활을 시작한 와이프를 고부갈등 속에 갈아넣지 마세요. 요즘 그 누구도 시댁과 치대며 살자고 결혼하는 여자는 없습니다. 핵가족도 아닌 나노가족, 1인 가구에 익숙한 세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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