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털사이트에 올라오는 기사들 중 결혼과 관련하여(특히 시댁과 관련하여, 특히 명절 전후) 남녀 분쟁이 벌어질 만한 글들에 보면 댓글에 꼭 이런 댓글들이 달려있습니다.
'그럼 니들도 결혼할 때 반반 하든가'
반반은 치킨집에서나 외치는 말인 줄 알았는데 결혼에도 적용이 되네요.
예전에 결혼을 할 때는 '여자는 혼수, 남자는 집' 이라는 프레임이 있었습니다.
저희 부모님 말씀으론 경상도에선 여자가 결혼할 때 장롱만 하나 해가면 되던 시절도 있었다고 해요. 이 공식이 꽤나 오랫동안 존재했고, 집 가격에 대비해서 혼수 비용이 적게 들었으니 여자들이 굽히고 사는게 당연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유교사상도 꽤나 오랜시간 지속되었고요.
그리고 저희집은 딸 둘, 아들 하나인 집인데 부모님께선 자식들 결혼 시 지원 범위에 대해서 다르게 책정하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딸은 적게, 아들은 많이. 아마 저희집 뿐 아니라 딸과 아들이 다 있는 집에서는 성별별로 지원부분이 다르다는경우가많습니다.
아들 둘 낳은 제 동생에게 친구들이 나중에 집 두 채 해주려면 등골 빠지겠다는 걱정을 전한다고 합니다. 딸 낳은 집은 그런 걱정을 안한다고 하더군요. 아, 지금이 몇년도인데 젊은 엄마들 사이에서도 사라지지 않은 이 결혼 프레임이라니...
많은 여성분들이 시댁 관련 하소연 글을 작성할 때 꼭 첨부하는 멘트가 있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전 반반 결혼했어요.' 댓글 공격에 대비한 일종의 방패와 같은 단어입니다.
반반 결혼.
말 그대로 결혼 준비할 때 둘 다 동등한 자금으로, 동등한 위치에서 결혼을 했다라는 의미에요. 이 단어는 부부끼리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 시댁과의 문제가 발생했을 때 나오는 단어입니다.
저도 이 멘트 참 많이 썼었습니다. 저도 억울했었거든요. 나도 반반 결혼 했는데 내가 며느리라는 것 때문에 뭔가 불합리한 현실이.
저는 저와 비슷한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굳이 그런 사람을 찾은것은 아니었는데 좋은 사람을 만나서 결혼하려고 보니 저와 비슷한 사람이었어요. 남편과 저는 비슷한 직장, 비슷한 학벌, 비슷한 가정, 비슷한 연봉, 그냥 다 비슷했어요. 그래서 전 결혼해서도 저와 남편이 동등하게 살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아니었습니다.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서 며느리는 을이었습니다. 많은 것이 시댁 위주였고, 친정은 약간 뒷전인듯한 뭔가 불공평한 결혼생활이었습니다.
호칭도 그렇고, 시부모님 말씀은 거역하면 큰일나는 일이고, 시댁은 자꾸 우리 부부에게 연락이나 방문을 요구 하고 우리집은 그런게 하나도 없고... 그냥 뭔가 계속 이상했어요. 불편했습니다. 그렇다고 왜 이러냐고 따지면 다들 별말 없이 사는데 나만 예민보스 취급당하고.
특히 명절 때 번갈아서 각자 집에 먼저 가자는데 왜 안되는걸까요? 저는 매번 시댁 먼저 방문해야 하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결국 신혼 초 남편과 싸웠고 결국 명절 전날 시댁가서 전부침 - 저녁에 우리집 가서 우리 친척들 만남(우리집이 큰집이라 친척들이 올라오심) - 다음날 아침에 시댁 가서 밥먹음 - 오후에 우리집 가서 밥먹음 이라는 우리 부부만 죽어나는 힘든 스케줄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엄마는 사돈어른이 배려를 해주셨다고 말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엄마랑도 한바탕 했습니다. 이게 왜 시부모님이 날 배려해준거야? 여자는 결혼하면 명절 전날에 먼저 오면 안돼?
그냥 명절이 두 번이니깐 한번씩 각 집을 먼저 가면 깔끔할 문제 아닌가요. 근데 이게 안된다데요.
명절에 올라오시는 작은아버지께선 저를 결혼하면 못보는줄 아셨다가 나타나니깐 윤서방 손을 꼭 붙잡고 고맙다고 인사를 하시더라고요. 아니 왜 이게 윤서방에게 고마워야 될 일일까요.
혹자들은 평등한 결혼생활 생각 갖고 있으면 결혼을 아예 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시댁에 납작 엎드려서 맞춰 살 여자들만 결혼하라는건지.
반반 결혼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여성들이 좋은 직업과 경제력을 갖게 되면서 부터 결혼이라는 제도 속 관습의 불공평함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고, 내 입장을 당당하게 만들려면 투자금(?) 이 동등하다 라는 부분을 강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지금은 집값이 미쳐 날뛰는 시대이기 때문에 집을 같이 마련해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집값이 가파르게 오르면서 여자는 혼수, 남자는 집의 공식이 깨졌습니다.
이제는 둘이 함께 영혼까지 끌어당겨서 대출을 일으켜야 둘이 누울 집 한구석을 만들 수 있을까 말까 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결혼 시점에 둘이 모은 돈을 다 쏟아붓고 추가로 대출을 만들어서 같이 갚아나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현실이 되었고요.
그런데 이렇게 공동으로 투자금을 넣고 갚아나간다 해도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한들 며느리는 을이 됩니다. 참 미스테리에요. 반반 해왔다고 인정받는 것도 아니고(물론 인정받으려고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드세다고 욕먹을 일이 산재해 있는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똑같은 비용을 내서 같이 결혼을 했는데 시댁과의 관계에서 평등하지 않고, 왜 평등할 수 없냐고 물으면 유난떤다고 하고, 혹시라도 여자가 더 해오면 내 아들 기죽일까봐 기싸움하는것도 종종 발생하는 일. 남자가 더 해오면 보통은 잘해주지 않나요?
오죽하면 몇몇 여자들에게서 '돈은친정에 주고 결혼할 때 조금만 들고 왔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라는 말까지 나오겠습니까.
반반 결혼이라는 단어의 단점이 있습니다. 반반 결혼을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당연하게 요구되는 불평등한 대우 때문입니다. 이 단어 속에는 반반을 하지 못한 쪽은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니까요.
적은돈 가지고 시집갔으면 시댁에 군소리 말고 맞춰 살으라든가, 처가가 돈이 많으면 처갓집 문턱이 닳을 정도로 드나들라는 등.
모든 사람들의 경제력이 동일하지 않고, 환경이나 가정형편, 각자의 커리어 들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결혼 순간에 반반을 명확히 따질 수 없는 경우도 굉장히 많습니다. 결혼이라는 것이 금전적 계약 관계가 아니기도 하고요.
이처럼 이 반반 결혼이라는 단어는 이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폭력적인 단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당당하자고 쓴 단어가 다른 사람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점,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하지만 안 쓸수도 없는 이 방패. 어쩌면 좋을까요...
제가 반반 결혼이라는 것을 어필하니 저보다 잘난 며느리들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남의 집 며느리들은 왜그렇게들 뭘 많이 해오고 돈도 많이 벌어오고 애도 잘키우는지. 그런데 혹시 그 며느리들도 어디에선가 반반 결혼했다고 외치고 있지 않을까요?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쓸 수 밖에 없었던 슬픈 단어, 반반 결혼. 시댁과 며느리의 관계가 평등해져서 더 이상 이 반반 결혼을 며느리들이 목놓아 외치지 않는 문화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