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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끼적대는 끼서 Oct 19. 2021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아니 추위!

 네덜란드 교환학생 D+7, 스페인 그라나다 여행 첫째날

2017년 1월 25일 수요일



새벽 3시가 넘은 시각에 체크인을 하고 들어온 숙소는 그야말로 냉골이었다.

히터를 내내 틀었는데도 방이 싸늘했던 걸 보면 아무래도 히터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장난이 아니라 진짜 웅크린 모양 그대로 얼어 죽을 듯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우리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카운터로 달려가서 맹렬히 항의를 했다. (이럴 때만 영어가 술술 나온다.) 


직원은 우리 방에 와서 히터를 틀어보더니 난데없이 '5분 후에 다시 오겠다'고 말하고는 문 밖으로 사라졌다. 갑자기 왜...?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잠시 시간이 흐른 후 돌아온 직원은 히터에 손을 대는 모션을 취하면서 '지금 바람에 손을 대면 따뜻하지 않냐, 몇 분만 기다리면 저절로 따뜻해진다'라며 도리어 우리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밤새 틀어놨다구...? 밤새 차갑던 바람이 지금 갑자기 따뜻해진 게 당신이 나가서 한 무언가와 연관이 있는 건 아닌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영어로 소통이 잘 되지 않아서 그냥 포기했다. 모든 사람들이 영어를 유창하게 하던 네덜란드가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덜덜 떨고 있는 우리가 좀 딱했는지 그는 옷장 맨 윗칸을 열고는 '정 춥거든 이걸 덮으라'며 담요를 꺼내주고 가버렸다. 마지막으로 사용된게 언제였을지 도저히 가늠이 안 되는, 베드버그가 살 것 같은 퀴퀴한 담요였지만, 그걸 마다했다간 추위에 손이 곱아버릴 것 같았다. 결국 우리는 그걸로 몸을 싸매고 다시 잠에 들었다. 




아무튼, 오늘은 그라나다에서 보내는 본격적인 첫날!

우리는 예매해 둔 대로 알람브라 궁전에 가서 티켓을 출력했다. 다행히도 오늘은 날씨가 좋아서 많은 사진들을 건졌는데, 문제는 내 바람막이였다. 스페인이 이렇게 추울줄 모르고 얇은 옷들만 들고온 바람에 예비로 챙겨온 바람막이를 내내 입어야 했고, 스페인 여행의 사진 속 나는 전부 새까만 바람막이를 입고 있다. 그래도 우리에겐 비장의 무기, 필터가 있다. 필터도 씌우고 또 배경이 워낙 예쁘게 받쳐주니 나름 괜찮은 프사를 건질 수 있었다는 이야기.


끼서와 지은 투샷


다만 하나 큰 문제는, 이 바람막이가 다름아닌 우리과 이름이 적힌 바람막이라는 점이다...^^

아니 애초에 한국에서 짐을 쌀 때는 여행다니면서 옷을 버릴 일(깔고 앉을 게 필요해진다거나, 예쁜 옷이 상하는게 걱정되는 곳에 가게 된다거나)이 생기면 입으려고 일부러 막 입을 수 있는 과 바람막이를 챙겨온 거지, 절대 계속 입고다닐 걸 생각하고 가져온 게 아니었다. 난 잠깐 잠깐씩만 쓸 줄 알았지...!

뒷부분 맨 아래에 우리과 이름이 영어로 적혀 있어서 돌아다니는 내내 수치스러웠지만, 그렇다고 이걸 벗기엔 얼어 죽을 것만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뒷면 하단 글씨를 제외하고서는 별다른 눈에 띄는 큰 마크나 문구가 없는 디자인이였다는 점이랄까... 하지만 부끄러운건 부끄러운거였다, 흑흑.


국제협력본부에서 우리학교를 세계에 알리고 오랬는데, 이런 방식으로 수행하게 될줄은 몰랐지...


알람브라 궁전은 원래 요새의 용도를 겸해서 만들었다고 하더니, 위에 가서 올려다보니 정말 산 꼭대기에 지어져 있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지은이와 나는 이걸 짓기 위해 희생되었을 수많은 노예들에 감정이입을 해서 혀를 찼다.)


알람브라 궁전으로 가는 길! 그리고 꼭대기로 올라와서 보였던 풍경. 요새라는 말이 바로 납득되는 모습이다.
신기하게도 궁전 안에는 고양이들이 정말 많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고양이를 사랑하지만 키우지는 못하는 랜선집사로서 정말 행복했다...




제일 기억에 남는 건 나자리 궁이었는데, 알람브라 궁전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한다.

나자리 궁은 시간마다 들어갈 수 있는 입장객 수를 제한한다. 기다림 끝에 들어가서 본 나자리 궁의 모습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아직 많이 복원중이기는 했지만, 나중에 햇빛이 잘 드는 따뜻한 계절에 오게 된다면 정말 낭만적일 것 같았다. 이국적인 기둥이 늘어선 복도를 느긋하게 거닐고 있자니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의 한 장면속에 들어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자리궁의 기둥과 벽 장식들은 무척 섬세할 뿐만 아니라 규모도 엄청났다. 이곳 역시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서 만들어졌겠구나 싶었다.
수면에 비친 모습을 찍으려고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있던 정원. 내가 만약 이 궁전의 주인이라면, 그래서 한적하게 혼자 이곳을 둘러볼 수 있다면, 절로 감상에 잠겼을 법한 풍경이다.
여러 마리의 사자들이 받치고 있는 분수대. 무언가 중요한 의미가 있는지, 나중에 보니 저 분수대 사진을 넣은 기념 엽서도 팔고 있었다.
자유를 갈망하는 아즈카반의 끼서! 요즘 해리포터 정주행중이라 우리는 여행중에 자꾸 해리포터 드립을 쳤다.


이후에 간 카를로스 궁은 생각보다는 그저 그랬다. 그냥 콜로세움같이 생긴 건물이네? 하면서 슥 둘러보고 나왔는데, 나중에서야 알고 보니 그곳이 바로 아무리 작게 말해도 무슨 얘기를 하는지 다 들리도록 설계되었다는 바로 그 건축물이었다. 왜 우리는 항상 나중에 이런 것을 알게 되는 걸까!


카를로스 궁에 간 피글렛 인형




알람브라 궁전을 열심히 구경하다 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많이 걸은 탓인지 발이 아파왔지만, 우리는 기운차게 밥을 먹으러 갔다. 로스 디아멘테스(Los Diamantes)라고, 나름 유명하다는 곳을 찾아간 거였는데 정작 음식은 그냥 그랬다. 오히려 밥 먹고 나서 후식으로 사먹은 츄러스가 더 맛있었다. 여기 츄러스는 우리나라 츄러스와 달리 그냥 소금만 살짝 뿌린 고소한 빵이다. 이걸 아주 진한 소스같은 핫초코에 찍어먹는다. 냠~

이날은 볕이 아주 좋아서, 이대로 낮잠을 자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유럽에서 즐기는 한가로운 오후가 바로 이런 건가!

  


grilled shrimp를 시켰더니 진짜 저렇게 나왔다..! 우리는 잠시 벙찌고 말았다. 저 밥은 타파스(Tapas, 스페인에서는 음식점에서 메뉴를 시키면 전채요리 느낌으로 타파스를 내어준다. 외국인들이 한국에 오면 밑반찬을 푸짐하게 줘서 놀란다는데 약간 그 비슷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우와 음식을 그냥 준다고?!')로 나온 거였는데 역시나 그저 그랬다. 우리 뒷 테이블에 앉아 계시던 한국인 아주머니는 우리 테이블에 나온 메뉴를 보시고 약간 당황하신 것 같았다.


핫초코에 찍어먹는 츄러스! 아주 바삭바삭하다.
쏟아지는 햇볕을 피해 잠시 엎드린 나와 피글렛 인형. 우리는 야외 테이블에 한가롭게 앉아서 간만의 여유를 즐겼다. 




이후 숙소에 가서 잠시 씨에스타를 즐긴 후, 저녁을 먹으러 또다른 맛집인 El Quinteto로 향했다.

그리고 이곳은... 진짜배기 맛집이었다!!


처음에는 뭘 먹어야 할지 너무 고민이 돼서 요리사님께 무얼 제일 추천해주고 싶으신지 여쭤봤다. 그러자 호탕한 웃음과 함께 "Everything in here is special!"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본인의 요리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는데, 맛 역시 정말 감동적이었다. 지은이는 그라나다를 떠나기 전 여기서 한 끼를 더 먹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

게다가 밥을 다 먹고 나갈 때는 다른 주방장님께서 우리가 한국인인 것은 어떻게 아셨는지 '안녕히 가세요'라고 인사를 하셔서 깜짝 놀랐다. 유럽에 온 이후 길거리에서 낄낄대며 지나가는 인간들이 '니하오', '곤니찌와', 이렇게 장난처럼 툭툭 던지는 인삿말만 듣다가 간만에 제대로 된 인사를 들으니 더욱 감동이었던 것 같다.

왼쪽은 겉을 캐러멜라이즈해서 바삭하게 만든 푸아그라에 망고소스를 뿌린 요리다. 뭔가 안 어울릴 것 같았던 망고와 푸아그라가 예상외로 무척 잘 어울려서 놀랐다. 플레이팅도 너무 예뻤는데, 이 메뉴가 한화로 7000원 정도밖에 안 한다는게 믿겨지는가! 스페인의 물가는 정말 놀랍다. 오른쪽 사진은 타코 해물 리조또인데, 아주 신선한 해물들이 듬뿍듬뿍 들어가 있다. 어제 먹었던 해물 볶음밥의 양 쪽 뺨을 전부 후려칠만한 퀄리티다. 이 메뉴 역시 만원도 안 한다.


음료로는 지은이는 샹그리아를, 나는 맥주를 시켰다. 지은이의 샹그리아를 한 입 먹어보니 오렌지 향과 함께 계피맛이 은은하게 올라왔다. 타파스로 나온 것은 삶은 콩과 돼지고기 볶음인데, 저 바삭부들한 바게트와 같이 먹으면 지이이인짜 맛있다. 우리가 빵을 빨리 먹어치워서 그런지 이후에는 빵을 엄청 많이 담아서 가져다주셨다 하하하


맛있는 것들을 먹고 한껏 만족스러워진 우리는 숙소 아래층 가게에서 신선한 자두와 귤을 사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이곳에서도 과일 킬러 본능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렇게 신선하고 맛있는 과일들이 이렇게 저렴한 가격이라니... 벌써부터 내가 스페인을 정말 사랑하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오늘의 메뉴
▶아침 : 까르푸에서 산 크루아상, 아이스티
▶점심 : 생선모둠튀김, 구운새우, 카레향 리조또(타파스)
▶저녁 : 엘 낀떼또 해산물리조또, 푸아그라, 맥주 한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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