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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끼적대는 끼서 Oct 14. 2021

드디어 만난 핑크호수

네덜란드 교환학생 D+6, 스페인 알리칸테 여행 둘째날 - 2

https://brunch.co.kr/@kkiseo/8

(이전 글에서 이어집니다)




"맞다, 우리 세인트 루이스 정류장에서 핑크호수 가는 법도 모르지."


블로그 포스팅에 있던 내용 중 지은이가 가까스로 떠올렸던 두 가지 단서는 다 써버렸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시간은 지금도 흐르고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그냥 기지를 발휘해야 했다. 우리는 구글맵을 켜서 지도상 핑크호수로 추정되는 웅덩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니 사실 거의 뛰었다. 왜 하필 내가 로퍼를 신고 여행을 나섰을까,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얼마나 뛰었을까. 어느 순간 우리 눈에 호수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세상에, 정말로, 핑크색이었다.


우리는 기쁨에 미쳐 날뛰면서 핑크 호수를 향해 달렸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 핑크호수로 가는 길은 온통 진흙밭이어서, 여기가 과연 사람이 다니는 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질퍽거렸다. 아무래도 우리는 잘못된 길로 온 것 같았지만... 시간이 없으니 지은이와 나는 신발 걱정은 버려둔 채 그나마 덜 절퍽거리는 풀들을 밟으며 조심스레 호수에 다가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마침 블로그에서 봤던 사진스팟, 벤치가 있었는데, 우리가 마구잡이로 온 방향이 놀랍게도 맞는 길이었던 모양이다.


물은 예쁜 핑크색이었지만 사진에는 잘 담기지 않아서 필터를 마구마구 끼얹으니 예쁜 분홍이 되었다. 

비록 풀이 자라난 진흙 지대가 듬성듬성 보이는, 별로 예쁘지는 않은 위치였지만, 우리는 지칠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도 혼신의 힘을 다해 사진을 찍었다. 우리가 어떤 고생을 해 가면서 도착한 핑크호순데, 나중에 아쉽지 않도록 조금이라도 기록을 더 남겨둬야 했다.


핑크호수의 실제 색감을 재현하기 위해 필터를 적용한 사진이다.




적당히 사진을 찍고 나서 이제 가볼까, 하고 일어서는데 시간은 이미 12시 40분이었다. 개를 산책시키면서 지나가던 아저씨를 붙잡고 택시 정류장을 여쭤봤는데, 워낙에 외진 곳이라 그런지 택시를 부르려면 근처 슈퍼마켓에 가서 택시를 불러달라고 요청을 해야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해당 가게에 도착해서 택시를 부르고 나니 시간은 1시가 넘어버렸다. 이대로 택시를 타고 역으로 가더라도, 알리칸테에 도착하는 시간은 3시 15분쯤. 짐을 가지러 숙소까지 왕복하는 것을 생각하면, 3시 반에 출발하는 그라나다행 ALSA 버스를 타는 것은 솔직히 좀 힘들지 않을까 싶었다. 거기서도 택시를 탈까? 고민하던 중, 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 버스가 3시 반이 아니라 2시 50분에 출발하는 차였다는 사실이다.

3시 반은 우리가 앞으로 이틀간 그라나다 여행을 다 마친 뒤 다시 알리칸테로 돌아오는 버스 시간이었던 것. 왕복 버스표를 끊은 바람에 우리 둘다 헷갈리고도 눈치 못 챈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면 눈치채기에는 다른 걸로 이미 너무 정신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갑자기 피로와 자책감이 한꺼번에 몰려왔고, 우리는 빠르게 침울해졌다. 그라나다로 가는 버스는 못 타는 게 확실해졌고, 4만원은 공중분해되었다.

우리는 4만원을 보람차게 쓸 수 있는 일들을 나열하면서 하염없이 택시를 기다렸다.




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한 뒤, 혹시나 하는 마음에 ALSA 창구에 가서 우리가 예매한 버스표 시간을 바꿀 수 있냐고 물어보았다. 그래도 아직 2시 50분이 지나지 않았으니 혹시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고서 말이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시간 변경은 2시간 전까지만 가능하다' 였다. 현재 시각은 1시가 훌쩍 넘은 시간. 버스표 변경도 불가능한 거였다. 결국 우리는 9시 45분 표라도 새로 예매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제발 다음 차에 자리가 남아있어야 할 텐데...


그때, 창구 직원분께서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으시더니, 갑자기 한번 try 해보겠다고 하셨다. 오잉?!

그분은 무언가를 착착착 진행하시더니 우리에게 9시 45분 표를 뽑아 주셨다. 세상에...!!!


눈치를 보니 원래는 바꿔주면 안 되는 건데 어떻게 하셨는지 몰래 표를 바꿔주신 것 같았다. 아마 우리가 무척 딱해 보였나보다. 어쨌든간에, 우리는 감동의 물결에 휩싸였고 이 낯선 땅에서 받은 친절에 감격해서 소리를 질렀다.


우리에게 친절을 베풀어주신 직원분이 계신 ALSA 창구의 모습. 정말 감사했습니다...흑흑


비록 9시 45분까지 7시간 가량을 기다려야 했지만, 우리는 '표를 새로 사지 않고 바꿀 수 있었던게 어디냐' 하며 즐겁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알리칸테로 돌아갔다.

숙소 직원분들도 무척 친절하셔서, 우리의 사정을 듣더니 그라나다 숙소에 전화해서 새벽 3시에 체크인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그분은 우리에게 '가기 전까지 기다리는 동안 숙소 로비에서 쉬면서 커피도 마시고, 컴퓨터나 프린터도 사용하고, 핸드폰도 충전하고, 화장실도 가고, 심지어 음식을 사다가 주방에서 요리를 해도 좋다'고 말씀하셨다. 스페인 사람들은 정말 친절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하루였다.

여러 사람들의 친절 덕분에 결국 우리는 밤 버스를 타고 그라나다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오늘은 정말 사건사고가 많았던 날이지만, 거의 모든 운을 여기에 다 쓴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운이 좋은 날이기도 했다. 그 와중에 핑크호수도 다 보고왔다. 어쩌면 네덜란드로 오기 전에 비자 문제 때문에 온갖 고생을 다 했던 게, 정말 액땜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제 남은 여행은 여유롭게 즐기는 일만 남았다.




오늘의 메뉴
▶아침: 호스텔 Bed&Breakfast 조식
▶점심: 해산물 빠에야, '오늘의 크로켓' 2종류, 수제 초코푸딩


점심은 알리칸테에서 아무데나 보이는 데로 들어가서 먹었는데, 트립 어드바이저에 등록된 음식점을 믿지 않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제대로 된 빠에야는 언제 먹을 수 있을까!



그치만 여기에서 먹은 핸드메이드 디저트 초코푸딩은 정말 정말 맛있었다. 여기는 그냥 디저트를 주력으로 하는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무척 많이 남아 알리칸테 항구 벤치에 앉아 햇볓을 즐길 때 찍은 사진. 여유를 갖고 낮 시간대에 둘러본 알리칸테는 아름다운 휴양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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