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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끼적대는 끼서 Dec 03. 2021

첫 프리드링크(feat.유럽식 술게임)

네덜란드 교환학생 D+18 : Kick-off Party

2017년 2월 5일 일요일


오늘 아침에 나를 반긴 건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끔찍한 숙취였다.

나는 오늘 웰컴 데이 행사 참석을 포기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버디(Buddy) 그룹 애들을 처음 보는 날이지만, 이 상태로는 침대에서 벗어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모든 일의 원흉은 바로 어제(2월 4일 토요일) 있었던 킥오프파티(Kick-off Party)다.


킥오프(kick off)란, 축구에서 공을 발로 차면서 경기를 시작하듯, 무언가를 시작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말 그대로 킥오프파티는 마스트리히트 대학의 새 학기 시작을 기념하는 파티인 모양인데, 그런 만큼 이제까지 했던 그 어떤 행사들보다 많은 학생들이 참여하는 듯했다. (나중에 듣기로는 오늘 있었던 웰컴 데이 행사에 우리 버디 그룹이 절반도 채 오지 않았다고 한다. 킥오프파티의 여파로 뻗은게 나뿐만이 아니었단 소리다 흐흐)


대체 지금이 몇신지 확인하기 위해 휴대폰 화면을 켜자 혼란스러운 광경이 펼쳐졌다. 누군지도 모르겠는 수많은 인간들과 내가 어젯밤 친구가 되었다는 페이스북 알람들이 가득했다. 혼란스러워하며 지은이에게 묻자 지은이 역시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 어제 새 친구 엄청 많이 만들고 다닌거 기억 안나냐?"

롸. 나도 몰랐던 내 주사를 알게 된 순간이었다.


내가 나도 모르는 친구(?)들을 만들게 된 건 전부 프리드링크(pre-drink)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은 바로 이곳 파티문화의 일부인 프리드링크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맨 처음 모임은 소소한 규모였다.

나와 지은이는 우리 빌딩 5층에 사는 동갑내기 한국인 친구 윤진이를 비롯해 우리가 아는 한국인 친구들을 모아서 한식을 만들어먹기로 했고, 그 친구들은 또 자신의 지인들을 불러서 다같이 우리층 리빙룸에서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사실 저녁식사 겸 프리드링크였는데, 지난번 펍크럴 때 프리드링크의 중요성을 깨달은 나와 지은이는 이번에는 절대 맨정신으로 파티에 가지 않을 것을 다짐했기 때문이다. (펍크럴 이야기는 여기 : https://brunch.co.kr/@kkiseo/16)


오순도순 저녁식사 풍경. 그러나 자세히 보면 진과 보드카 병이 보일것이다...


그런데 프리드링크에 올 때에는 각자 마실 술을 가지고 오는게 암묵적인 룰인지(어디까지나 내 추측이다) 우리층이 아닌 친구들은 다들 술병을 하나씩 들고 왔다. 맥주를 가져온 친구도 있었지만, 보드카와 진같이 도수가 높은 증류주를 병째로 들고온 친구들도 있어서 살짝 놀랐다. 그리고 그 술병들은 점차 늘어나게 되는데...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우리 여기서 프리드링크 할건데 너도 올래?'라는 식으로 자기 지인을 또 부르고, 어슬렁거리며 리빙룸으로 들어온 우리층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합류해서 자기 친구를 데려오고, 뭐 그런 식으로 사람을 계속 부르다 보니 리빙룸이 어느새 사람들로 가득해지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대부분 서로 모르는 사이였는데, 원래 그런 건지 다들 개의치 않아 했다. 리빙룸 가운데에 있던 소파도 끌어오고, 복도에 있던 의자도 끌어오고 해서 모두가 어떻게든 테이블 근처에 자기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바로 그 상태에서 광란의 술게임이 시작되었다.


프리드링크 도중에 찍은 사진. 와 근데 단체사진 얼굴 가리기 진짜 힘들다...


한국식 술게임만 해본 나로서는 대체 어떤 게임을 하며 술을 마시려나 무척 궁금했는데, 여기 사람들은 트럼프카드로 하는 게임을 주로 하는 모양이었다. 그것도 여러가지 종류가 있는 듯한데 우리가 한 건 카드를 피라미드 모양으로 배열한 뒤 하는 게임이었다.



게임의 룰은 이렇다.

1) 카드 덱에서 조커를 제거한 뒤, 랜덤하게 뽑아 피라미드 모양으로 뒤집힌 카드를 배열한다.

2) 사람들은 남은 카드를 일정 개수씩 나누어 갖는다.

3) 한명씩 돌아가며 피라미드의 가장 아랫단부터 카드를 오픈한다.

4) 만약 내가 오픈된 카드와 숫자가 일치하는 카드를 갖고 있다면, 그걸 해당 카드 위에 내고서 다른 사람을 지목해 술을 먹일 수 있다. 이 때, 피라미드의 층수에 따라 먹일 수 있는 술의 양이 달라진다. 아래 그림처럼, 만약 방금 오픈된 카드가 제일 아랫단에 있다면 나는 지목한 상대에게 한 모금을 마시게 할 수 있지만, 오픈된 카드가 두 번째단에 있었다면 나는 네 모금을 마시게 할 수 있는 것이다. 피라미드의 단별로 할당된 술의 양은 게임 참가자들끼리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다.

5) 만약 오픈된 카드와 숫자가 일치하는 카드를 든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카드를 오픈한 사람이 술을 마셔야 한다.

6) 벌주 마시기가 완료되면, 다음 사람이 다음번 카드를 오픈한다. 이렇게 계속한다.

6) 피라미드 맨 꼭대기층의 카드가 오픈되고 지목된 사람이 벌주를 마시면 게임이 끝난다.


한국에서 대학생들이 하는 술게임들은 주로 리듬 게임이거나, 아니면 순발력 또는 기억력이 필요한 게임들이다. 한마디로 게임을 잘하면, 술을  먹으면서도 얼마든지 재미있게   있다는 의미! 그러나 이 카드게임은 그런거 없고 그냥  나쁘면 먹는 (아주 미개한) 술게임이었다. 거기다가 여기 녀석들이 가져온 술은 죄다 양주! 술을 썩 잘 마시진 않지만 게임을 잘해서 술자리에서 오래 살아남는 스타일인 나같은 인간은 잘못 걸리면 그냥 벌주 한번으로도 만취할 수 있단 얘기다.

그리고...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야 말았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 게임은 지목해서 먹이는 게임이고, 또 리빙룸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서로 초면인 상태였다. 그럴 때 지목을 한다면 보통 서로 부담없게 아는 사람을 고르기 마련이다. 불행히도(?) 그 자리에는 방금전까지 저녁식사를 같이하면서 친해진 사람들이 여럿 있었고, 나나 지은이나 열심히 술을 먹고 먹이고 하게 되었다.


그러다 피라미드의 꼭대기 바로 아래층에서 지은이가 지목권을 얻게 되었다. 이미 취한 지은이는 "My lovely roomate!"라고 외치며 나에 대한 사랑을 유감없이 표현해 주었고, 마찬가지로 취할대로 취해서 신난 나머지 인간들은 하이볼잔인지 콜린스잔인지, 아무튼 길쭉하게 생긴 큰 유리잔에다가 진을 콸콸콸 따르기 시작했다. 샷잔으로 5잔 정도의 용량이었다. 그렇다, 그들은 내게 아무것도 섞지 않은 진을 그대로 따라서 주었다. 피라미드 최상층 즈음으로 오니 벌주의 강도도 무지막지하게 올라간 것이다.


이게 참, 남이 먹을땐 마냥 신났는데 내가 먹으려니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이미 좀 취해서 신났고, 술자리에서는 절대 빼지 않는게 신조―정말 쓸데없는 신조다―인 나는 그걸 그대로 벌컥벌컥 다 마셨다. 그리고 글자 그대로 만취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 이후부터의 기억은 굉장히 드문드문 남아있다. (이날 이후로 나는 진을 싫어하게 된다^^) 다같이 계속 마시고 놀다가 파티 갈 준비를 하기 위해 방으로 돌아왔고, 화장도 하고 렌즈도 끼고 옷도 갈아입은 다음에, 윤진이가 가져온 페이스페인팅 크레용으로 얼굴에 그림까지 그린 뒤, 킥오프 파티에 가서 정신없이 놀았다. 그리고 눈 떠보니 오늘 아침 내 침대였던 것.


각자 얼굴에 그린 그림들이 슬쩍 보인다


웃긴 건 그와중에 새벽에 집에 돌아와서 렌즈 빼고 클렌징도 하고 샤워도 하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잔 모양이다. 숙취는 끔찍했어도 몰골은 아주 멀끔했기 때문이다. 근데 이건 원래 내 습관이라 그러려니 했지만, 문제는 내 기억이었다. 지난 밤의 일들이 몇몇 순간들만 찰나를 포착한 흐릿한 사진처럼 기억에 남아 있었다. 지금껏 살면서 술을 이렇게까지 먹어본 적도 없고, 필름이 끊겨본 적도 없는 나이기에 사실 적잖이 충격이었다. 거기다가 내가 기억도 못하는 새 친구들이 늘어나있다는 건... 파워 내향인으로서 더욱 큰 충격이었다! 난 너희들 얼굴도 기억 안 난다고! (그런데 어쩌면 그들도 내 얼굴을 기억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나마 다행인 건, 교환학생들이 대부분 가까운 빌딩들에 함께 살기 때문에 갈 때나 올 때나 다같이 우루루루 움직였기 때문에 위험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술을 덜 마신 친구들이 많이 챙겨주기도 했고 말이다. 그 와중에 우리 셋―마냥 신난 나와 지은이, 그리고 우리를 캐리하면서 수척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윤진이―이 함께 나온 사진들이 있는데 나중에 같이 보고 빵 터졌다. 여기에 온전히 올리지 못하는게 아쉬울 따름!

지쳐서 멍해진 표정의 윤진이와 그녀에게 매달려있는 지은 그리고 나...우리는 나중에 이비자에서 이날의 사진들을 다시 재현하게 된다.




하여간 개강 파티를 아주 거하게 치른 덕에 개강 전날인 오늘은 얌전히 요양이나 하면서 집콕을 하게 되었다. 찬밥으로 죽을 끓이고 계란국을 해 먹으니 속이 좀 풀렸다. 내일부터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된다. UM이 자랑하는 PBL 수업은 과연 어떨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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