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끼적대는 끼서 Dec 07. 2021

드랍 LUX MEA

네덜란드 교환학생 D+21

2017년 2월 8일 수요일


이건 과제가 너무너무 하기 싫어서 쓰는 일기이다.


어제는 대망의 첫 정규수업날이었다. 이 글(https://brunch.co.kr/@kkiseo/17)에서 설명했듯이, UM에서 한 period동안 듣는 수업은 고작 두개이기 때문에 사실 시간표는 한국에 비하면 굉장히 널럴한 편이다. 내 시간표는 아래와 같다.

지금 이걸 보는 당신의 머릿속에는 '이자식 아주 그냥 놀다 왔구만?'이라는 생각이 떠오르겠지만, 어제 수업을 듣고 나서 나는 이 시간표가 결코 여유롭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이건 내가 한 과목을 빼버린 시간표이다. 어제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처음부터 되짚어 보겠다.




어제는 Course 수업의 첫 Lecture와 Tutorial 시간이었다.

위에 링크를 올려둔 글에서 설명했듯이, UM에서 한 period에 듣는 수업은 두 종류다.


(1) Course (정규 수업)
(2) Skill (Course 수강에 필요한 능력을 길러주는 수업. Skill 중에서는 특정한 Course와 함께 들어야만 하는 것들도 있다.)


그리고 각 수업들은 종류와 관계없이 모두 LectureTutorial 시간으로 구성된다.

쉽게 말해 Lecture는 강의식 수업을, Tutorial은 토론식 수업을 뜻하는데, Lecture의 횟수는 강의별로 상이하나 Tutorial은 대부분 주 2회로 편성된다. UM의 특징인 PBL(문제중심학습) 방식의 수업은 바로 이 Tutorial 시간에 이루어진다. (이곳에서의 Lecture는 깊이 있는 지식을 획득하는 시간이라기보다는, 수업에 앞서 숙지해야 하는 내용들을 강의식으로 듣는 시간에 가깝다.)


내가 이번 period에 듣는 course 제목은 'Observing & Representing: The History of Senses'인데, 첫 Lecture에서는 앞으로 수업에서 다룰 개념들을 간단히 짚어준 뒤 과제에 대해 안내했다. 이번 Period에 제출해야 하는 Final Paper에 대한 설명을 들었는데, 생각보다 까다로워서 놀랐다. 아래는 내가 제출해야 하는 기말 페이퍼와 관련된 가이드라인들이다.


3500자 분량

Topic은 수업 내용과 관련된 것이어야 하며, 동시에 ethnographic research(문화기술지/민속지학적 연구)에 적합한 것이어야 함

강의의 주제와 관련된 특정한 사례를 다루되, 수업에서 다루지 않은 것을 골라야 함

자신이 직접 진행한 ethnographic research를 바탕으로 해야 함

그러나 연구가 오직 인터뷰만으로 이루어져서는 안됨

연구를 제출 마감 직전 주에 몰아서 해서는 안됨.


확실히 한국 대학에서 1, 2학년 수업에 과제로 내줄 법한 수준은 아니었다. 한 학기당 수업의 갯수가 적은 만큼, 학생들이 깊이 있게 공부하기를 바라는 듯했다. 문화기술지는 고등학생 때 사회문화 수업을 들으면서 질적 연구의 방법 중 하나로 들은 적이 있긴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지는 몰랐기에 내가 직접 연구를 수행해야 한다는게 다소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또, 강의와 관련되나 강의에서 다루지 않은 사례를 다뤄야 한다는 점도 좀 막막했다. 


그러나 심란함에 젖어 있을 새도 없이, 30분의 쉬는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고 바로 Tutorial 수업이 시작되었다.




강의실에 들어갔을때 1차로 놀란 건, 교수님이랑 학생들의 자리 구분이 없고 그냥 다같이 동그란 테이블에 둘러앉는다는 점이었다. 2차로 놀란 건, 나를 제외한 모두가 영어권 국가(또는 대부분의 국민들이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국가)에서 온 학생들이었다는 점이다. 이거 반 편성 왜이래...!!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하는데 학생들의 출신지는 미국, 영국, 캐나다, 독일, 네덜란드였다. 나 외에 동양인 학생이 딱 한명 더 있었지만, 어림도 없지. 영어가 공용어인 홍콩에서 온 학생이었다^^ 자신의 고향이 터키라고 소개한 학생도 있었으나 현재 거주지는 유럽이라고 했다. 평생 한국에서만 나고자란 내가 과연 이들의 토론 흐름을 제대로 따라갈 수 있을까, 벌써 걱정이 태산이었다.


교수님은 Tutorial 시간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해 주셨다. PBL은 크게 Pre-Discussion과 Post Discussion의 두 가지 단계로 이루어지는데, 자율학습에서 해야 하는 일까지 포함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Pre-Discussion : Problem Statement와 Learning Goal을 정한다.

2. 자율학습 : 집에 가서 각자 주어진 리딩과제를 읽고 자료조사를 해서 Learning Goal의 답을 찾는다.

3. Post Discussion : 다른 학생들과 토의, 토론을 통해 자신이 찾아온 답을 공유하고 의견을 나눈다.


이번시간은 첫 시간이기때문에 Pre-Discussion만 진행했고, 다음시간부터는 Post Discussion 이후에 새 Pre-Discussion을 하는 식으로 진행한다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지난번에 미리 내줬던 리딩 내용을 바탕으로 일단 브레인스토밍을 했다. 학생 한명이 서기로 자원해서 칠판 구석에 키워드를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다음, 이를 바탕으로 Problem Statement를 정했다. 마지막으로 그 Problem Statement와 관련한 Learning Goal 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수업시간이 끝났다.


일단 나로서는 수업에서 배울 내용을 우리가 직접 정하고, 답을 직접 찾아간다는게 참 생소했다. 이렇게 해서 뭔가를 제대로 배워갈 수 있을지 좀 걱정도 되었고 말이다. 수업시간에 교수님은 주로 우리가 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계셨고, 우리가 도움을 요청하면 조언을 해 주거나, 대화가 너무 딴데로 새면 방향을 잡아주는 역할정도만 하셨다. PBL이 효과가 있으려면 지도교사가 정말 숙련된 사람이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시간에 정한 Problem Statement와 Learning Goals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와서 교수님이 준 리딩 과제 파일들을 열어보았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다. 다음시간(그래봤자 금요일이다)까지 읽어야 하는 리딩이 200페이지짜리였다. 

진짜 미친 거 아니야...??????


리딩 한 쪽의 분량은 대충 이정도이다.


그럼 글자가 큼지막하느냐? 그럴 리가^^

글자 크기와 한 페이지당 분량은 좌측 사진과 같다. 하하... 지난주에 OT하면서 냅다 80쪽짜리 리딩 읽어오라고 할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앞으로 매 수업마다 이런걸 읽고 과제를 하고, 그와중에 짬짬이 연구를 해서 기말페이퍼까지 써야 한다?

이번 period 종강일이 3/31이니까, 지금 두 달도 채 안 남았단 얘기다. 하... 마스트리히트 대학을 선택한건 어쩌면 끔찍한 실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또 하나 끔찍한 일이 더 남아있었다. 바로바로 skill 수업이다.

skill 수업 역시 lecture와 tutorial로 이루어지므로, 오늘 알게 된 것과 비슷한 로드가 한세트 더 생길거란 뜻이다. 아무래도 course 하나만으로도 이번 period가 벅차겠다는 생각이 들어 절망하던 찰나, 어제 수업이 끝나고 지은이가 급하게 나를 불러서 더 끔찍한 소식을 전했다.


바로, skill 수업은 우리 학교에서 학점 인정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 학교에서는 교환학생으로 가서 들은 수업 시간에 대해 '15시간=1학점'으로 계산해준다.

그런데 skill 수업은 course 수업에 비해 시수가 적다 보니, 총 수업시간이 15시간 미만이라서 우리 학교기준으로는 1학점으로조차 인정이 되지 않는 것. 결국 들어도 남는 게 없는 수업이란 얘기다. 물론! 내 경험에 무형의 무언가가 남기는 하겠지. 그러나 이미 course 따라가기도 벅차다는걸 깨달은 이후였으므로, 우리는 skill을 쿨하게 드랍하기로 했다. 그래도 어떤 수업인지 확인이나 하려고 skill 첫 tutorial 수업까지는 들어 봤는데, 딱히 엄청난 도움이 되는 그런 수업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끝나고 바로 학교측에 드랍 절차를 문의했다. 승인되는데에 시간이 조금 걸리긴 하겠지만, 드랍이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아서 마음이 조금은 홀가분해졌다. 역시, 드랍은 나의 빛이였다. 대신 주어진 나의 원앤온리 course 수업에 더욱 집중하는 걸로!^^

매거진의 이전글 첫 프리드링크(feat.유럽식 술게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