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계가 좋아 골목에 서서 비를 맞고 있는 당신에게
소울메이트
이근화
우리는 이 세계가 좋아서
골목에 서서 비를 맞는다
젖을 줄 알면서
옷을 다 챙겨 입고
지상으로 떨어지면서 잃어버렸던
비의 기억을 되돌려주기 위해
흠뻑 젖을 때까지
흰 장르가 될 때까지
비의 감정을 배운다
단지 이 세계가 좋아
비의 기억으로 골목이 넘치고
비의 나쁜 기억으로
발이 퉁퉁 붇는다
외투를 입고 구두끈을 고쳐맨다
우리는 우리가 좋을 세계에서
흠뻑 젖을 수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골목에 서서 비의 냄새를 훔친다
이근화,『우리들의 진화』, 문학과 지성사(2009)
나는 이 시가 좋다.
참 마음에 든다.
이유는 모른다.
아니 사실 안다.
때로는 말로 표현하는 것보다 가슴으로 느껴지는게 더 클 때가 있다.
학창시절 국어교과서에서 수많은 시를 배우고 분석하면서 마음에 들었던 시는 무수히 많았어도
평생 기억하고 싶었던 시는 처음이다.
이게 바로 그 시다.
이 시를 읽었을 때 가슴이 뛴다면
당신도 이 세계가 좋아 골목에서 비를 맞으며 무엇인가 느끼고 있다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