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는 건 당연한 일처럼 여겨지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복잡하기 그지없다. 사랑이란 이름 아래 서로를 의지하면서도 서로를 짓누르는 관계가 바로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이 아닐까.
부모는 최선을 다해 자식을 키웠다고 믿는다. 자식 또한 부모에게 최선을 다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그 ‘최선’이란 것이 제각기 기준이 다르다. 부모의 사랑은 정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아가페적 사랑일까? 아니면 자식을 통해 자신의 공허를 채우려는 욕망, 에로스적 사랑에 가까운 걸까?
준 만큼 받고 싶은 사랑
한 어머니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자녀가 시험 성적이 좋지 않자 이렇게 말하더란다.
“엄마가 너를 위해 이렇게까지 했는데, 넌 왜 이렇게밖에 못하니?”
사랑을 주었으니 뭔가를 받아야 한다는 마음. 어쩌면 부모라면 누구나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말에 자식은 대답한다.
“엄마는 날 사랑하니까 그렇게 한 거라면서요. 그런데 왜 이제 와서 나한테 책임을 물어요?”
그 순간,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거래처럼 변한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준 것들이 어느새 계산이 되어버린 것이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이런 일이 한두 번이겠는가. 부모는 자식이 자신의 희생을 이해하고 보답해 주길 기대하고, 자식은 그런 기대가 짐처럼 느껴진다. 결국,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사랑이 불편해지는 아이러니에 빠진다.
사랑에도 욕심이 있다
부모의 사랑은 정말 무조건적일까? 아가페처럼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는 희생일까? 아니면 에로스처럼 자신의 욕망을 담은 사랑일까? 사실 부모의 사랑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품고 있다. 자식의 행복을 바라는 진심과, 그 행복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고 싶어 하는 욕망이 뒤섞여 있는 것이다.
사람이란 원래 모순된 존재다. 주는 기쁨을 이야기하면서도 받는 즐거움을 포기하지 못한다. 부모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자식을 키우는 동안엔 그저 사랑을 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믿지만, 시간이 흐르면 문득 자신이 바란 것이 많았음을 깨닫는다.
비워내야 완전한 사랑
하지만 부모의 사랑이 완전해질 수 있을까? 그 답은 부모 자신에게 있다. 키르케고르가 말했듯, "진리는 주관적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품은 사랑도 결국 자신의 진실일 뿐이다. 그러니 그 사랑을 온전히 비워내지 않으면, 결국엔 자식을 소유하려는 욕심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비워낸다는 건 무엇일까. 그건 자식을 나와 분리된 하나의 독립적 존재로 인정하는 것이다. 자식이 부모의 희생을 보답하지 않아도, 자식이 내 기대를 충족시키지 않아도 괜찮다고 믿는 것이다. 예수가 말한 것처럼,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되다"라고 여기는 마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
사랑이란 이런 것
사실 부모의 사랑은 완벽하지 않다. 그것은 아가페와 에로스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모순 덩어리다. 하지만 그 모순 속에 인간적인 사랑의 아름다움이 있다. 부모는 때로 사랑을 주면서도 대가를 바라고, 자식은 그 사랑이 부담스러워 도망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계속 사랑하고, 자식은 결국 그 사랑을 기억한다.
사랑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완벽하지 않아서 더 인간적이고, 부족해서 더 기억에 남는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도 그렇게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고, 조금씩 멀어지고, 조금씩 다시 가까워지는 관계다. 그 관계 속에서 우리는 사랑의 참모습을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