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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깡아지 Feb 25. 2017

이상세계를 이성적으로 말하다

플라톤,『국가』


플라톤의『국가』는 ‘대화편’ 중 하나로,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들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소크라테스는 ‘산파술’을 통해 상대방이 스스로 깨달음을 얻도록 이끄는 선생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가 직접 남긴 글은 없고, 제자 플라톤의 책을 통해 그의 가르침이 후세에 전해졌다. 화이트헤드가 ‘플라톤은 서양철학의 주석이다.’라고 했을 만큼, 플라톤의『국가』가 서양철학에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고대에서 현대까지 이어지는 ‘정의’    


소크라테스는 ‘무엇이 정의(올바름)인가?’에 대하여 끊임없이 사유했다. 그리고 개인의 정의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국가의 정의를 알아야 한다며 ‘어떤 국가를 만들어야 하는가?’, 즉 이상국가에 대하여 고찰했다. 이처럼 고대부터 정의(올바름)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어왔다. 


현대에도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시작으로 ‘정의’가 화두가 되고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정의’라는 키워드가 다시금 급부상한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하게 생각하면 사람들이 현대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결과와 성과에 밀려 절차적 정의가 등한시되는 사회, 물질적 욕구는 충족했지만 사람들은 더욱 공허함을 느끼는 사회에서 우리가 잊어버린 ‘정의’가 과연 무엇인지 찾으려는 것이다. 특히 힘 있는 사람들의 권력 남용으로 하여금 ‘정의’, ‘공정’, ‘형평’ 등과 같은 단어들에 회의감을 가지게 되는 요즘 같은 시국에는 더욱이 그렇다.


소크라테스의 시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혼란했던 사회에서 국가를 탄생시키고자 했던 사람들은 이상국가를 갈망하였고, 정의에 대한 갈망 또한 자연스럽게 파생되었다. 어쩌면 평생의 숙제일지도 모를 정의에 대한 논의는, 이렇게 같은 듯 다른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인간의 필요에 의해 이루어져왔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엘리트주의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소위 말해 ‘엘리트주의’이다. 소수의 의견에 의해 의사결정이 이루어지고 정치권력의 정당성이 통치자 자신으로부터 부여되는 엘리트주의는, 다수의 의견을 존중하고 정치권력의 정당성이 시민으로부터 부여되는 민주주의와 비교했을 때 윤리적으로 부당하게 비춰질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상황은 전후의 혼란기였고, 이를 바로잡을 카리스마 넘치는 통치자가 필요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 틈바구니 속에서 플라톤이 주장한 철인정치는 지금의 독재와는 사뭇 달랐다. 그는 동굴의 비유를 통해 대중들을 동굴 안에서 그림자(표상)만을 보며 그것이 진짜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로 비유하고, 철학자를 동굴 밖에서 이데아를 볼 수 있는 사람으로 비유했다. 플라톤에 따르면 국가는 철학자들이 동굴 밖에 나가서 배우고 오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하며, 이로 하여금 진실을 볼 수 있게 된 철학자들은 배워 온 것을 동굴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해줄 의무가 있다. 통치자들이 지식과 정보를 자신들만의 전유물로 여기고 무지한 대중을 통치하는 독재주의와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jmjung21/223116362256)



중우정치의 위험성    


이성과 절대진리를 추구했던 소크라테스에게, 대중에 의해 좌우되는 민주주의는 지양해야 할 대상이었다. 정치체제를 논하기 전에 철학의 전제부터가 달랐던 것이다. 또한 민주주의 역시 취지는 좋으나, 실현되는 과정에서 중우정치로 변모된다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통치자가 사욕을 범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치권력을 확보한 개인들이 사욕을 발휘한다면 국가의 이익이 아닌 사익, 또는 그들 집단의 이익을 위해 의사결정권을 행사할 것이다. 또한 모든 대중이 합리적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동굴 밖을 볼 줄 아는 철학자는 한 사람뿐이고 이견을 가진 여러 사람들이 있다면 올바르지 못한 의사결정으로 이끌 수 있다. 


대중의 위험한 특성을 증명하는 심리학 실험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사람들은 다수에 쉽게 동조한다는 것이다. 한 피험자에게 두 선분을 보여주고 무엇이 더 긴지 말하라고 한다. 누가 봐도 확연히 왼쪽 선분이 짧고 오른쪽 선분이 길다. 그는 다른 피험자들도 함께 실험에 참가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나머지 피험자들은 실험도우미들이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피험자들이 당연히 왼쪽 선분이 길다고 말하면 그 피험자는 자신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둘째는 다수는 서로에게 책임을 n분의 1로 분산시킨다는 것이다. 예컨대 집단 따돌림 등의 범죄를 저지른 청소년들은 친구들과 다같이 했기 때문에 죄책감을 덜 느낀다. 대중의 의사결정 또한, 자신의 의사결정이 올바르지 못함을 인지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다같이 행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책임감을 덜 느낀다.


당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었던 소크라테스는 결국 중우정치에 의해 독배를 마셨고, 제자인 플라톤은 더욱 민주주의에 환멸을 느끼기에 이른다.      


고대 시민들은 아고라 광장에서 토론을 펼쳤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너무도 이상적인, 이상국가    


국가의 탄생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생계를 위한 일이 능률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분업이 필요하고, 따라서 계급이 형성될 수밖에 없다. 각 계급에는 고유의 역할과 덕이 있다. 통치자 역시 그러한 분업화된 계급의 일부인데, 특성상 욕망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를 경계하고 각 계급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플라톤은 말한다. 또한 그는 개인의 초점을 맞췄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용기와 지혜와 절제라는 덕목들이 조화를 이루어야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한다. 즉 ‘너는 천한 노비로 태어났으니 평생 일만 하며 살아.’ 라든지 ‘너는 고귀한 통치자로 태어났으니 평생 우리를 다스려줘.’가 아니라, 어릴 때부터 그 사람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눈여겨보아 각자의 능력에 맞는 계급을 부여하면 그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야 하며, 나아가 이 개인들이 사회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통치자가 사욕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지나치게 이상적이다. 인간에게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소유에 대한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피험자들을 죄수와 교도관으로 나눈 후 역할놀이를 하게 했을 때 교도관 역할을 맡은 사람들의 성격이 난폭해지더라는 심리학 실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간은 자신의 위치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소크라테스의 말대로만 된다면 바람직하나, 통치자의 사욕으로 인해 실현 과정에서 변모된다면 엘리트주의는 상당히 위험한 체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의 이상국가에 대한 논의가 허무맹랑한 백일몽이었던 것은 아니다. 이상국가는 단번에 뚝딱 찾아지는 것이 아니므로, 그런 의미에서 국가론은 이상국가를 찾아가는 끝없는 여정인 것이다. 소크라테스도 자신의 주장이 지극히 이상적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상국가에 대해 논의해보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라며 뜻을 굽히지 않는다.   


(이미지 출처 : 영화 <천공의 성 라퓨타>)


   

재산 및 처자의 공유경제?


소크라테스는 통치자들의 재산 및 처자공유를 주장하였다. 통치자의 사욕추구를 막기 위해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고, 처자도 거느리지 못하게 하여 부를 세습하고자 하는 욕망을 차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통치자와 통치자의 기질을 가진 여성을 교배(?)하여 우수한 형질의 자손을 낳게 하고, 아이들은 부모를 모르게 공동 양육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울러 공을 세운 젊은이들에게 여자와 동침할 수 있는 기회를 상으로 줌으로써 동기를 부여하고, 가임기의 무분별한 성관계는 국가적 차원에서 통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념갈등의 잔해로 인해 공산주의가 혐오되는 현대에 재산공유는 꺼림칙하고, 윤리적 관점에서 처자공유는 파격적이면서 부도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재산공유에 대하여 ‘덕과 부는 같이 갈 수 없기 때문에 부를 공유함으로써 덕을 중요시한 것’이었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좋다. 그러나 처자공유는 이를 실현하기 일환으로 생각해낸 것이라지만, 지나치게 생산성과 효율성만을 중시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생명은 ‘생산’하는 것이 아니며 인간이기에 지니는 존엄성과 존중해야 할 가치가 있다. 이상국가 추구라는 고매한 명분이 모든 수단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시인은 물러가라


플라톤은 시의 모방은 진리와 무관하며, 시인은 시민을 현혹시켜 이성적 판단력을 흐리게 하기 때문에 시인들을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세 종류의 침대
이데아의 침대 (신이 창조)
 ↓
개별적인 침대 (제작공이 이데아의 침대를 모방)
 ↓
시인의 침대 (시인이 제작공의 침대를 모방)


즉, 시는 이데아를 모방한 것을 모방한 것이다. 이데아로부터 3단계나 떨어져 있으므로 진리는 그만큼 멀어진다. 모방은 열등한 것으로서 열등한 것과 결합하여 열등한 것을 낳는다. 따라서 시인은 인간을 훌륭하게 교육하고 선량하게 만들 수 없다고 말한다.


플라톤은 이상적인 국가에서 이러한 시인은 추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인은 진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작품을 만들어 낼 뿐만 아니라 그가 모방하는 것 외에는 알지 못하면서도 아름답게 보이는 것만을 모방하기 때문이며, 건전하지도 진지하지도 않은 일을 위하여 청중들의 분별력을 손상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감정은 이성을 통해 통제되어야 하는데 시는 오히려 감상적 쾌락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가 제공하는 애욕, 분노, 슬픔, 쾌락 등이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되어온 법률과 원칙을 대신하게 한다는 점을 들어 훌륭한 제도와 법률을 가져야 할 국가에서 시인들을 추방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시인에 대한 변호 


그러면 소크라테스의 시인추방론에 의해 재판장에 서게 된 시인을 위해 두 가지 변론을 해볼까 한다. 


첫째, 때로는 사실보다 진실이 더 중요하다                

<사실과 진실의 차이>
사실(事實) : 실제로 있었던 일이나 현재에 있는
진실(眞實) : 거짓이 없는 사실
→ 즉, 거짓이 있는 사실도 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예술작품에는 시인(작가)의 상상력과 결부된 문제의식이 녹아들어 있다. 비록 작품 속 이야기는 상상에 의한 것이지만 이로 하여금 우리는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이것을 ‘문학적 진실’이라고 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것이 현실세계에 대한 모방에 불과하므로  추방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문학은 모방을 통해 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데 말이다.    


둘째, 때로는 감정이 이성적 근거보다 더 설득력 있다  


구걸하는 맹인의 팻말을 “I am blind”에서 “Spring is coming soon. But I can't see it.”로 바꿔 주자 돈이 모이기 시작했다는 프랑스 시인 앙드레 브루통의 일화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성적 사고와 판단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이 이성의 힘은 문학과 예술이 만들어내는 ‘감성적 지지’가 뒷받침되었을 때 효과적으로 발휘된다. 


영화 <도가니> 개봉 이후 인화학교 성폭력 사건이 재수사되고 기존의 솜방망이 처벌이 강화되었던 것처럼, 문학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세상을 좋게 바꾸는 계기를 만들기도 한다. ‘6.25로 인해 이산가족 70만 명이 발생했다’는 통계보다 박완서 작가의 소설 한 편 읽는 것이 더 동족상잔의 비극을 느껴지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때로는 감정이 이성적 근거보다 더 설득력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다만, 문화는 삶의 여유가 우선 충족되어야 향유할 수 있다. 시인추방론은 이성을 중시한 소크라테스의 철학과 당시의 혼란스러웠던 시대상이 결합하여 탄생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아무리 시대상을 반영한다 한들, 시인추방론이 너무나 파격적인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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