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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깡아지 Jan 26. 2017

크레타 섬에서 추는 자유의 춤

니코스 카잔차키스,『그리스인 조르바』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        



나는 조르바를 만났다


소설은 젊은 지식인 ‘나’가 크레타 섬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다가, 60대 노인이지만 거침이 없는 자유인 조르바를 만나는 것에서 시작된다. 친구에게 ‘책벌레’라는 조롱을 받은 후 새로운 생활을 해보기로 결심하여 크레타 섬의 폐광을 빌린 ‘나’에게 조르바는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한다. 조르바는 자본가인 ‘나’를 두목이라고 부르며 탄광에서 일을 하고, 둘은 좋은 동반자가 된다. 이 책은 ‘나’와 조르바가 크레타 섬에서 함께한 생활을 담은 소설이다.        


조르바라는 남자를 한 단어로 말한다면 그 낱말은 ‘자유’일 것이다. 자유의 사전적 의미는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이다. 고대부터 합리주의 철학이 융성했던 그리스의 사람이 이처럼 본능, 욕구, 감정에 충실한 것은 아이러니하다.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제목에서 하필이면 ‘그리스인’이라는 말을 붙인 것도 이를 부각시키기 위함이었던 듯싶다. 


한편으로는 조르바가 쾌락과 욕구를 추구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자유라는 명분으로 그것에 지나치게 충실하여 심지어는 야만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슈퍼에고의 지배 없이 이드만 가득한 사람 같기도 하다. 


(이미지 출처 : 영화 <희랍인 조르바>)



자유와 방종


그렇다면 자유와 방종의 차이는 무엇일까? 자유는 마음대로 할 권리를 행사하면서 의무를 다하는 것이고, 방종은 의무는 다하지 않고 마음대로 할 권리만 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권리만을 추구하다 보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게 된다.         


‘자유’란 다수의 횡포와 압제를 배척하는 것인데, 이를 초래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선하다 혹은 악하다고 생각되는 사회통념과 관습과 암묵적 동의이다. 우월한 계급의 이익과 우월성이라는 감정이 ‘사회의 호오’를 주도하였고 이것은 ‘법’이 되었다. 이는 오롯이 개인적 선호와 이해관계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절대적인지는 끊임없는 회의가 필요하다.
타인의 자유에 개입할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자기보호’를 위한 경우이다. 즉 ‘자신의 이익’은 충분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 그의 행동이 제지되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에게 해를 낳을 것임이 예측될 때, 타인들의 안전을 위해서만 강제는 정당화된다. 
                                                                                                        -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밀은 사회통념과 관습과 암묵적 동의라는 다수의 횡포와 압제를 배척하는 것이 자유라고 말한다. 그리고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자유를 추구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니 조르바가 행한 것은 자유였다고 본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그는 자유로웠다  


조르바는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점잔 떠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자본가인 ‘나’와 친하게 지냈지만, ‘나’에게 빌붙어 호의호식했던 것이 아니라 탄광 광부로서 정당한 노동을 했다. 허나 그 노동마저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 자유로울 수 있는 하나의 방법으로 여기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쾌락을 추구하되, 남에게 피해를 입히지는 않았다.      

  

진정한 행복이란 이런 것인가. 야망이 없으면서도 세상의 야망은 다 품은 듯이 말처럼 뼈가 휘도록 일하는 것. 사람들에게서 멀리 떠나,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되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것. 성탄절 잔치에 들러 진탕 먹고 마신 다음, 잠든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별은 머리에 이고 뭍을 왼쪽, 바다를 오른쪽에 끼고 해변을 걷는 것. 그러다 문득, 기적이 일어나 이 모든 것이 하나로 동화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p.175 


파리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자유의 반대는 구속이 아니라 타성(惰性)이라는 사실입니다. 타성은 우리가 그것이 억압이나 구속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 그것은 견고한 무쇠 방입니다. 새로운 사고와 새로운 감성이 갇혀 있는 상태입니다. 
                                                                                                - 신영복 <더불어 숲> p.300      


앞서 언급했던 자유의 정의에서는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라며 자유와 구속을 반대개념으로 보았다. 그러나 <더불어 숲>에서 신영복 선생님은 다르게 말씀하신다. 자유의 반대는 구속이 아니라 타성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타성에 젖어 자유로운 사고를 하지 못하고, 밀이 말했던 사회통념과 관습과 암묵적 동의라는 다수의 횡포와 압제의 견고한 무쇠 방 안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조르바는 이러한 관습의 구속에도, 타성에도 얽매이지 않고,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새로운 사고와 감성이 돋아나는 대로 살았던 인물이다.    


(이미지 출처 :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은 “카르페 디엠!” 이라며 “현재를 즐겨라”라고 말한다. 이 말은 “지금 해야 할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냐, 즐겁게 놀아라”라고 오독되기 쉽지만, 사실은 “현재 해야 할 것들을 즐겨라”라는 말이다. 즉 현재 해야 할 것들을 그대로 하되, 마인드를 바꾸라는 뜻이다. 조르바가 탄광 노동을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으로 여긴 것처럼.    


언젠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올 거라고, 기약 없이 예정되었다고 믿는 행복을 위해, 하기 싫은데 해야만 하는 일들을 하며 현재를 저당잡히는 삶이 아니라, 현재 내가 해야 할 일을 행복해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         


(이미지 출처 : 영화 <희랍인 조르바>)


“조르바! 이리 와보세요! 춤 좀 가르쳐 주세요!”
조르바가 펄쩍 뛰며 일어났다. 그의 얼굴이 황홀하게 빛나고 있었다.
“춤이라고요, 보스? 정말 춤이라고 했소? 야호! 이리 오쇼!”
“조르바, 갑시다! 내 인생은 바뀌었어요. 자, 놉시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나’는 조르바와 이별하기 직전, 조르바에게 춤을 가르쳐달라고 한다. 크레타 섬에서 조르바와 생활하면서 그에게 반해 그를 닮아버린 것이다.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든 <희랍인 조르바>에서 둘이 함께 춤을 추는 엔딩장면은 가히 명장면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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