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깡아지 Mar 14. 2017

중용의 우애와 인간관계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


새 계절을 맞이하였다. 3월의 캠퍼스에는 아침과 한낮의 날씨처럼, 쌀쌀한 긴장감과 볕 아래 설렘이 번갈아 가며 온다. 새롭다는 것은 낯설다는 것이다. 우리는 익숙함을 편안해하고 낯선 것을 두려워한다. 새로 꽃이 피는 봄에 낯선 환경을 마주한 우리는 인간관계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그럴 때면 아리스토텔레스의『니코마코스 윤리학』을 펼쳐보자.     



중용 중에서, 우애


모자람과 지나침 사이의 중용만이 미덕이다. 대학생활 인간관계에서 필요한 중용은 ‘우애’이다. 모자람은 사사건건 반대하며 남의 감정을 해치는 심술쟁이이고, 지나침은 남의 감정을 해치지 않기 위해 칭찬만 하고 반대는 결코 하지 않는 사람이다. 둘 사이의 중용만이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것을 받아들이고, 당연히 거부해야 할 것을 거부할 수 있게 해준다. 싫어하는 친구가 하는 말이라면 일단 반감부터 가지거나 좋아하는 친구와 관계가 틀어질까 봐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한다면, 한쪽 눈을 가리고 세상을 반쪽만 바라보는 것과 다름이 없다.     


라파엘로의 그림 <아테네 학당>은 고대 그리스의 학자들이 모여 진리를 추구하는 모습을 담았다.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을 만난다


친구와의 관계는 자신과의 관계와도 같다. 훌륭한 사람은 자신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친구에게도 확장한다. 그러나 친구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사람은 자신에게도 우호적이지 못하다. <데미안>에서 데미안은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면, 우리는 그의 모습 속에, 바로 우리들 자신 속에 들어앉아 있는 그 무엇인가를 보고 미워하는 것이지.”라고 말한다. 누군가의 단점이 보인다는 것은 나 역시 그것을 겪어 보아 안다는 것이다.    


만약 친구 자신이 아니라 그 친구의 자질을 좋아하는 것이라면, 자질이 소멸되었을 때 우애 역시 소멸된다. 그 자질이 친구가 주는 유용성이나 쾌락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진정한 친구는 상대방이 잘되기를 바란다. 이는 상대방이 잘되어야 자기에게도 유익해서가 아니라, 오롯이 상대방 자신을 위한 것이다.     


주는 사람은 받는 사람보다 더 많이 사랑한다. 주는 행위는 능동적이고 고상한 반면, 받는 사람은 약간의 이득을 수동적으로 받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남이 주기를 바라기 전에 내가 먼저 건네보자. 당장은 손해 보는 것 같더라도, 나의 행위가 그 자체로서 옳기에 사실은 나에게 이로운 것이다. 한편 친구가 적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사람이 많으면 한사람에게 집중하지 못하여 깊이 친해지기 어렵다. 그러니 소수의 마음 맞는 친구들이면 충분하다.    


(이미지 출처 : 영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나홀로족에게, 아리스토텔레스가


‘나홀로족’이라는 단어까지 등장하면서 혼자서 하는 일들의 열풍이 불고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고 본성적으로 남들과 함께 살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이미 행복한 사람에게도 친구는 필요하다고 말한다. 친구는 자족하는 사람들이 자력으로 마련할 수 없는 것들을 준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친구 역시 사랑할 수 있다. 그러니 다가오는 새 계절에는 고전이 주는 가르침의 향기를 맡으며, 어디라도 좋으니 소중한 친구와 함께 봄바람을 맞아보는 것은 어떨까.


매거진의 이전글 이상세계를 이성적으로 말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