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희,『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우리는 그것의 목격자이다
조세희는 <작가의 말>에서 “우리는 그것의 목격자이다”라고 말한다. 목격자는 본 사실을 그대로, 거짓 없이 진술해야 하는 의무를 가진다. 그 ‘사실’은 역사의 눈을 거쳐 ‘진실’이 된다. 모든 ‘사실’이 ‘진실’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나, 모든 ‘진실’은 ‘사실’이다. ‘사실’이 ‘진실’을 왜곡할 수도 있으며, 때로는 ‘진실’이 ‘사실’보다 중요할 수 있다. 이러한 복잡 미묘한 관계 속에서 무엇을 똑바로 보아야 하는지 조세희는『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통해 말하고 있다.
「뫼비우스의 띠」에서 수학 교사는 학생들에게 안과 겉의 구분이 없는 도형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보통 안 아니면 겉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하기 마련이지만, 그 이면의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비슷한 우화로 굴뚝 청소를 하는 두 아이에 대한 질문에서 사람들은 보통 얘 아니면 쟤라는 대답을 고민한다. 그러나 그 질문 자체를 뒤집을 수 있는 의문이 존재할 수 있다. 「클라인씨의 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안과 밖의 구분이 없는데 닫힌 병이 존재할 수 있다. ‘진실’은 그렇게 이면을 보아야 내 그물로 온다.
사랑이냐 법률이냐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제목을 읽고 들었던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힘없는 난장이가 힘센 거인에 대항하는 일이 보잘것없는 일일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시도하다 보면 언젠간 세상은 바뀐다. 쇠공을 아무리 하늘 높이 쏘아올려봤자 이내 곧 땅으로 떨어지고 말 테지만, 절망의 반복이 언젠간 실낱 같은 희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조세희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단순히 이런 ‘언젠간’이라는 막연한 미래의 환상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에서 난장이는 ‘사랑 있는 사회’를 꿈꿨다. “사랑으로 일하고 사랑으로 자식을 키운다. 사랑으로 비를 내리게 하고, 사랑으로 평형을 이루고, 사랑으로 바람을 불러 작은 미나리아재비꽃줄기에까지 머물게 한다.”는 것이 그가 생각한 이상세계였다. 이는 지극히 비현실적으로 들릴지 모르나, 이렇게만 된다면 누구도 울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영수는 아버지가 꿈꾸는 세계에서는 사랑이 ‘강요’된다고 말한다. 사랑을 갖지 않은 사람을 벌하기 위해 법을 제정해야 한다면, 이 세계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그것 역시도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모순적인 세계일 뿐이다. 그러나 훗날 영수는 결국 “아버지가 옳았다. 법률이 필요하다.”라며 생각을 고친다.
너는 처음부터 장님이 아니었다
이러한 두 인물의 상충되는 사고는 「클라인씨의 병」을 보면 좀더 이해할 수 있다. 은강에는 장님이 많았다. 영수는 장님이 세상을 보는 방법이 눈을 갖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세상을 보는 눈은 따로 있다고 생각한 것과 대조해보면, 어머니는 세상은 우리 같은 사람들이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반면 영수는 눈을 갖기 위해 노력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런데 난장이가 살아생전에 가장 가까이 지내며 같은 꿈을 꾸던 지섭은 영수에게 일침을 가한다. 너는 처음부터 장님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너는 처음부터 장님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안과 겉은 없었고, 처음부터 한 아이만 더러운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안팎이 없기 때문에 사실은 갇힐 일도 없었다. 이것이 지섭이, 작가 조세희가 하고자 했던 말이었다. 「클라인씨의 병」에서 영수는 발벗고 노동운동을 하여 얼마간의 임금을 인상시키는 성과를 이룬다. 매번 지기만 하는 싸움에서 피땀 흘려 얻어낸 전리품이기에, 가치가 없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지섭은 그 미약한 성과에 만족하며 말하는 영수를 힐난한다. 패배의 전리품을 얻고서 좋아할 것이 아니라, 승리해야 한다.
모르는 게 죄다
지섭은 영수에게 너는 ‘훌륭한 이론가’가 될 수 있을 거라며 비꼰다. 무지가 죄라고 비판한다. 배울 기회가 없어서 목사와 과학자와 은강대학 부설 기관에서 교육을 받았다는 영수의 말에, “네가 오히려 이야기해줘야 알 사람들” 앞에 가서 배웠다며 비판한다. 영수는 눈을 떴다고 하지만 지섭이 보기에 사실은 스스로 눈을 감고 장님이 되었다는 것이다. 스스로 정한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이것은 목사와 과학자 같은 다른 배를 탄 위선자가 아닌, 진짜 노동자였던 지섭이라는 인물만이 전할 수 있는 작가의 메시지이다. 지섭은 영수에게 현장을 지키라고 말한다. 네가 하는 일은 굳이 네가 아니어도 남들도 할 수 있으니 너만이 할 수 있는 일, 즉 노동자로서 사용자와 부딪치는 그 지점에 있으라는 것이다.
「클라인씨의 병」에서 지섭은 영수에게 무지가 도움을 준 적은 없다고 말한다. 「궤도 회전」에서 윤호는 경애에게 몰랐던 게 죄라고 말한다. “난 전혀 몰랐어.”라는 말은 핑계가 될 수 없다. 모르고서 살았다면 생활 전체가 죄다. <썰전>에서 이재명 시장이 한 말처럼 알고도 그랬으면 당연히 죄고, 모르고 그랬으면 몰랐던 게 죄다.
후대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같은 소설들은 신문의 어느 기사보다도, 어떤 통계보다도 그 시대의 진실을 후대에 잘 전한다. 우리는 이 소설을 읽고서 알고 나서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알면 기억하고 실천해야 한다. 진실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장님이다.
운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영수는 결국 은강 그룹 경영주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경영주의 동생을 경영주로 착각하여 잘못 찌른다. 어쨌든 사람을 죽였으니 재판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는다. 영수가 경영주의 동생을 죽인 이후에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노동자들은 여전히 열악한 환경 속에서 착취당했고 생존비에도 못 미치는 낮은 임금을 받았다. 이것이 그들의 투쟁의 한계였다. 그들이 그토록 휘두른 것은 어쩌면 빗나간 칼이었을지 모른다. 큰 그림을 보고 근본적인 문제를 뿌리뽑지 않으면 해결책은 없다.
「칼날」에서 사람들은 물이 나오는 시간을 기다렸다가 한밤중에 물을 받는다. 그런데 그럴 수나마 있었던 수도관마저 고장이 난다. 난장이는 물 나오는 시간을 앞당기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난장이만이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앞집과 뒷집 여자는 물이 나오게 하는 일에만 눈이 멀어 우물 파는 사나이에게 수도를 맡긴다. 사실 난장이의 생김새와 낡은 공구들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했던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신애는 우리는 모두 난장이임을 자각하고 난장이를 믿는다. 그를 보호하기 위해 칼을 휘두르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이번에는 정확히 맞았다.
이면의 진실을 하늘 위로
「에필로그」에서 입주권을 사들여 이익을 취한 자본가를 죽인 꼽추와 앉은뱅이는 약장수를 따라간다. 그러나 그들은 철저히 이용당하고 버림받았다. 이제부터는 사정이 좋아질 수 있다는 기대를 품었지만 추운 도로 한복판에 남겨졌다. 그것들이 잘못된 방식이었다는 것을 조세희는 같은 편에서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앉은뱅이는 꼽추에게 자네의 마음이 무섭다고 말한다. 꼽추가 품은 분노에 의한 폭력성도 결국에는 정당화될 수 없었다.
그렇게 이면을 보고 전체를 보고 진실을 보고 나면, 난장이가 꿈꾼 세상이 도래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에필로그」에서 앉은뱅이는 헛것이라고 믿었지만 정말로 날아들었던 개똥벌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