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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깡아지 Dec 03. 2017

아픈 세계를 아름답게 만들어 준 사람(美人)에게

박준,『당신의 이름을 지어다 며칠은 먹었다』


나는 당신으로부터 온 편지를 부적처럼 지니고 다니면서 당이 떨어질 때마다 꺼내 곱씹었다. 문장을 줄줄 외울 정도로 읽고 나면 내 이름을 부르는 당신 목소리의 음정이 선명하게 들리곤 했다. 당신에게 편지가 온 후부터는 힘에 겨울 때면 다른 행동을 하지 않고 자세를 고쳐앉아 편지를 꺼내보았다.


몸이 아프면 편도가 가장 먼저 부었다는 시인은 이번 생이 투병의 기록이라 여겼다. 아픈 일들이 너무나도 많은 세상에서 시인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 먹는다. 아프면 약을 지어다 먹어야 하는데, 시인에게 병을 낫게 하는 것은 약보다도 당신의 이름이다. 손가락으로 당신의 이름을 적어보는 일, 입술을 움직여 당신의 이름을 나지막히 부르는 일이다. 얼마나 부르고 싶었으면, 꿈결에 “오래된 잠버릇이 당신의 궁금한 이름을 엎지”(「여름에 부르는 이름」)르기까지 한다.    



아픈 내가


‘나’는 아프다. 혼자 열을 앓기도 하고(「인천 반달」) “맥박이 잘 이어지지 않는다고 답장을 쓰”(「당신의 연음(延音)」)려 하기도 한다. “매일 병(病)을 얻었”(「용산 가는 길―청파동 1」)다고 고백하기도 하고, “열흘에 이틀은 아프고 팔 일은 앓”(「2:8―청파동 2」)기도 하고, “눈을 감고 앓”(「눈을 감고」)기도 한다. 이처럼 자꾸만 아픈 것은 시집『당신의 이름을 지어다 며칠은 먹었다』에서 ‘나’가 세계를 대하는 방식이다.         


세계는 아프다. 4대강 사업으로 남한강은 헤집어지고 태백의 광부들은 폐병을 앓으며 청파동에서는 사람들이 집을 잃는다. 소중한 사람을 화장(火葬)하고 돌아서는 이는 슬픔을 견디고, 홀로 수학여행에 가지 못한 소년은 외로움을 견딘다. 가난한 연인들은 서로에게 끝물의 과일들을 사 먹이고, 군대에 간 장병들은 떠나온 사람들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의 아픔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람은 아프다.    


드라마 <멜로가 체질>에서 전여빈의 "나 힘들어. 안아줘." 한 마디에 부둥켜안고 우는 친구들 (이미지 출처 : JTBC)



울고 싶은, 쓰는 존재


세계의 아픔들에서 눈을 뗄 수 없는 “나의 사랑은 죄”(「관음(觀音)―청파동3」)다. 아픔을 곁에서 지켜보아야 하는 사람은 당사자만큼이나 아프다. 말로는 어떤 말을 해도 달라지는 것이 없기에 섣부른 위로도 건네지 못한다. 아무 것도 해줄 수가 없는 자신의 무력함을 마주하고 좌절하기도 한다. 그렇게 그 사람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마음의 무게는 죄책감이 되어 돌아온다.


다만 시인은 시를 쓴다. 시인은 “쓰기라는 것이 꼭 울음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울고 싶다고 해서 억지로 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만 울고 싶다고 해서 그칠 수도 없는 울음.”이라고 말한다. ‘나’는 오래도록 고민한 글귀를 미인의 “무릎에 밀어넣어두고”(「광장」) 나면 비로소 잠이 들 수 있었다. 세계의 아픔을 견딜 수 없어 울고 싶은 마음을 담아 시인은 시를 쓴다. 체코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말처럼 “시는 내가 헤매고 다니던 길거리에서, 밤의 한자락에서, 뜻하지 않은 타인에게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고독한 귀로에서” 시인에게 찾아와 마음을 움직인다. 그러나 마음 한켠에는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어서 미안한 마음이 자리잡고 있다. 그 마음은 “아무리 시라고 하지만 ‘이 세상과 타인들의 삶을 내가 판단하고 규정지어도 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남긴다. 고민하던 시인은 마치 취재라도 하듯 대상을 따라다닌다.        


시인은 폐지 줍는 할머니를 “보조바퀴처럼” 따라다닌다. 할머니가 폐지를 줍는 일은 “절망이 아닌 것들을 골라 내는 일”이다. 길가에 버려진 폐지를 발견하면 팔 수 있는 것인지 가늠해야 한다. 팔 수 있는 것들은 절망이 아니고, 팔지 못하는 것들은 절망이다. 그러나 세계에는 절망이 아닌 것들보다 절망이 훨씬 많다. 시인은 할머니를 보며 “날지 못하는 새는 있어도 울지 못하는 새는 없다”라는 문장을 생각해내고 노트에 적어둔다. 절망과 슬픔이 많은 세계에서 시인이 바라본 사람들은 누구나 울 수 있는, 울고 싶은 존재이다. 이러한 시선은 시집『당신의 이름을 지어다 며칠은 먹었다』에서 빈번하게 드러난다.


밤하늘을 바라보는 군인은 “우리 어머니 잘하는 짠지 무 같은 별들이, 울먹울먹 오열종대로 콱 쏟아져내”(「별의 평야」)린다고 말한다. 고시원에 화재가 난 사건의 목격자는 “그건 단지 그동안 울먹울먹했던 것들이 캄캄하게 울어버린 것이라 생각”(「유성고시원 화재기」)된다고 진술한다. “너른 마당이 있던 집”은 “여럿이 같이 앉아 울 수도 있을”(「유월의 독서」) 집으로 묘사되고, “오월의 밤하늘”은 “새로 울고 싶은”(「별들의 이주(移住)―화포천」) 것이라 묘사된다. 그리고 시인은 “당신을 생각하면 낮고 좁은 책꽂이에 꽂혀 있는 울음이 먼저 걸어나”(「해남으로 보내는 편지」)온다고 고백한다.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시인이 이토록 사람을 ‘우는 존재’로 바라보는 까닭은 “사람의 울음이나 사람의 서러움이나 사람의 분노나 사람의 슬픔 같은 것들을 계속 사람의 가슴에 묻어두기가 무안”하기 때문이다. 우는 것은 사람의 본능이다. 슬프면 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우리의 세계에서는 소리 내어 우는 것이 금기시되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시인이 사람들을 ‘사실은 울고 싶은 존재’로 바라본 시선의 시작이다. 시인이 “아리고 맵고 순하고 여린 것들을 불평 하나 없이 안아주는” 땅 해남을 그리워하는 까닭은, 슬퍼서 우는 여린 존재들을 끌어안아줄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것과 같다.             


세계는 아프고, 그래서 눈물이 난다. 그런데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세상이 “좋지 않”아서 ‘당신’이 슬프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 ‘슬픔’은 ‘자랑’이 된다. ‘좋지 않은 세상’이기에 우리는 슬픔을 느껴야 한다. 이것은 세상을 올바르게 바라본 것이다. 


유년에는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이 자랑이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폐가 아픈 일”로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다 커버린 지금은 아니다. 아픈 세계를 살아가는 어른들은 아픔을 책임져야 한다. 그리고 ‘당신’도 그 틈바구니 안에 있다. ‘나’는 그런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당신’만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함께 슬퍼하고 있다. 이 세계는 당신과 나의 세계이기 때문이고, ‘당신’이 ‘나’이고 ‘내’가 ‘당신’이기 때문이다.     


드라마 <멜로가 체질>에서 손석구는 전여빈의 슬픔을 모두 듣고 울고 있는 눈동자에 건배한다. (이미지 출처 : JTBC)



너와 나의 장례   


소중한 사람을 “화구에 밀어넣고”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하”기에 양평해장국을 “밀어넣”어야 한다. “사람의 울음을 슬프게 하는 것은 통곡이 아니라 곡과 곡 사이 급하게 들어마시며 내는 숨의 소리”이다. 울음을 모두 내뱉고 나면 숨을 들이마셔야 다시 울 수도 있는 것이다.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내고도, 세계의 아픔을 목격하고도 우리는 숨을 쉬며 “산 사람”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 너무나 슬퍼서 삶의 의욕을 잃은 사람에게는 식욕도 사라진다. 하지만 다시금 살아가려면 먹기 싫어도 먹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이 우리를 더 아프게 한다. 밥이라는 것은 이토록 슬픈 숙명을 가진다. 그래서 시인은 밥보다도 더 귀한 ‘당신의 이름’을 먹기로 한다. 앞에서 시인은 아프면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 먹었다고 했다.        


장례는 죽은 뒤에 지내는 것인데, 시인은 역설적이게도 죽기도 전에 장례를 지낸다고 말하고 있다. 죽는 일보다 두려운 것은 죽은 후에 남겨질 사람들을 생각하는 일이다. 나의 장례식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리고 만일 육체를 빠져나와 영(靈)이 된 내가 그 모습을 본다면 마음이 아플 것이다. 그런데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고 나면, 정말로 죽게 된 후에도 남겨진 사람들이 울지 않을 수 있다. 이미 장례를 지내고 그 사람을 보낼 마음의 준비를 끝냈기 때문이다. 


장례는 죽은 사람을 고이 보내기 위한 의식(儀式)이다. 장례를 지내는 3일 동안은 세상이 무너진 듯 고통스럽지만, 차라리 그렇게 한꺼번에 아프고 나야 다시금 살아갈 수 있다. 어쩌면 시인이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는” 이유는 ‘당신’의 슬픔으로 하여금 ‘내’가 슬퍼하는 것은 괜찮지만, ‘나’로 하여금 ‘당신’이 슬퍼하지는 않기를 바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아파서 당신이 아프지 않았”(「용산 가는 길―청파동1」)던 것처럼.    



지금의 사미인곡(思美人曲)


‘나’는 아프다. ‘나’는 “살 만했던 광장의 한때”와 거리가 멀어 “번듯한 날들을 모르는”(「나의 사인(死因)은 너와 같았으면 한다」) 사람이고, “살 만해지는 삶을 견디지 못하는”(「환절기」) 사람이다. 그러나 ‘나’의 곁에는 아름다운 사람(美人)이 있었다. 미인은 “손으로 내 이마와 자신의 이마를 번갈아 짚”(「꾀병」)어주기도 했고, 외출에서 돌아와 피곤한 몸으로 ‘나’를 곁에서 지켜주다가 잠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시집을 읽다 보면 미인은 지금 ‘나’의 곁에 없는 듯하다. 그래서 미인은 그리운 사람이다. 


미인이 없어서 ‘나’의 세계는 아프다. 그런데 시인은 오히려 슬픈 감정을 오래오래 기억하기 위해서 그리운 사람을 시에 적어 넣는다. 그 사람이 그리워 울고 싶어지는 감정을 ‘울음처럼 쓰는 일’로 간직하기로 한다. 그러면 그 감정을 단 한 번의 울음으로 휘발(揮發)하지 않을 수 있다. 사실은 그 사람이 떠올라서 슬퍼지는 일보다 시간이 흘러 더 이상 그 사람이 떠오르지 않게 되는 일이 더 아프다. 그래서 시인은 슬프면 울어야 하듯 그리우면 그리워하기로 한다. 박준의 시는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름다운 사람을 그리워하는 노래, 사미인곡(思美人曲)이다. 


(이미지 출처 : JTBC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아픈 세계를 아름답게 만들어준 사람(美人)


시집『당신의 이름을 지어다 며칠은 먹었다』의 시들의 장면들은 미인과 “같이 보낸 절기들”처럼 온통 시인이 간직한 과거들이다. 그러나 뱃사람들이 “바닷길을 외울 때 앞이 아니라 배가 지나온 뒤의 광경을 기억”하는 것처럼, 어쩌면 우리는 아로새겨진 과거로 하여금 현재를 살아가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볕이 지나간 자리를 만지는 우리의 날들에는 “언제나 햇빛이 먼저 와”(「꾀병」) 든다.


시인에게 미인은 아픈 세계를 아름다울 수 있게 만들어 준 사람이다. 세계를 아프게 하는 수많은 이유들을 모두 이겨내는, 아름다운 단 한 가지 이유이다. 시집의 군데군데 긴 머리카락을 떨어뜨려 놓은(「동지(冬至)」) 미인은 시인이 바라본 세계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아프지만 아름답고, 아파서 아름다운 세계에서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별안간 슬퍼지더라도 다시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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