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깡아지 Nov 25. 2017

가장 목마르고 가장 찬란한

백수린,「여름의 정오」


유배당한 나를 돌봐준


‘나’는 그 여름처럼 시내의 한 독립영화관에서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다가 문득, 화면 속 여자가 가장 기뻤던 순간에 대한 질문에 답하고 있는 파리의 그 카페와 조우한다. 한참 한창때의 나이를 지나고 있는 듯 보이는 여자. ‘나’도 한창때 그 카페에서, 차마 대답하지 못한 가장 기뻤던 순간에 대한 질문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 여름 ‘나’는 ‘유배’당하고 있었지만, 타카히로의 ‘돌봄’은 ‘유배’기간을 가장 눈부셨던 순간으로 바꾸어 놓았다. 


타카히로는 따스한 햇살 같으면서도 잿빛 안개 같은 사람이었다. 한국에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나’를 바라보며 지그시 웃었고, 모르는 사람의 무덤에서 뜬금없이 울어버린 ‘나’를 가만가만 다독여주었다. 여느 유학생들처럼 경쟁에 뛰어들지도 않았고, 낯선 도시에 덩그러니 남겨진 ‘나’를 예술영화관에 데려가 함께 시간을 보내주었다. 우리는 사이가 좋아, 라고 말해 주었지만 늘 반대쪽엔 그림자가 드리운 것 같았던 타카히로에게서 ‘나’는 무엇을 보았던 걸까.



그 사람도 그랬는데


훗날의 ‘나’는 남편의 런던 출장을 빌미로 다시 파리 땅을 밟는다. 이거다! 라고 쉽게 단정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어 줄 어떤 것이라도 필요했다. 그간의 숱한 나날들에도 타카히로를 떠올린 적은 두 번이 있었다. 한 번은 타카히로가 말한 적이 있었던 사린 테러의 마지막 수배자를 체포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른 한 번은 뉴욕의 9.11 테러가 발생했을 때. ‘나’도 인정하듯이 타카히로와 아무 연관 없었던 두 번째 섬광에서조차 그가 생각난 것이 ‘왜인지 모르나’ 익숙했던 이유는, 이미 ‘나’는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타인의 고통을 보면서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음에 안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공감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걱정’하는 사람으로 성장한 것이다. 


다시 찾은 파리의 그 카페에서 섬유노동자들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서 오래 전에 우리나라 섬유노동자들도 죽었어, 라고 ‘나도 모르게’ 말해 버린 것 또한 그 때문이리라. ‘나’는 타인의 고통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무의식 깊숙이 품는다. 그리고 슬픈 소식을 들을 때면 품었던 것들을 꺼내 공감의 촉매로 삼는다. 도쿄는 너무 시끄러워, 서울도 그래. 남반구의 한 나라에서 섬유노동자들이 죽었어요, 우리나라에서도 섬유노동자들이 죽었는데. 타카히로가 자살을 시도했어, J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었는데. 그리고 타카히로가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것이 단지 멋있어 보인다고 생각했던 ‘나’는, 오랜 후 다시 그곳에서 에스프레소 한 잔을 시킨다. 



sympathy가 아닌 empathy


‘나’에게 J의 죽음은 트라우마로 남아 있었다. 지우개가 포물선을 그리며 낙하하듯 쉽게 추락해버린 J. 어쩌면 파리에 ‘유배’오기 전 ‘나’의 방황은 J의 죽음 때문이었을지 모른다고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나’는 의지하던 타카히로에게 내면의 상처를 털어놓고 위로받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는 대신, 힘겨워하는 타카히로에게 그래도 죽지는 마, 라는 걱정의 말을 건넨다. ‘그래도 죽지는 마’는 사실 ‘J도 죽었어. 그러니 너도 죽지는 마’의 다른 말이었을 것이다. ‘나’는 타카히로가 스스로를 포기할 만큼 아렸던 사랑에 공감하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그를 미워하기보다 오히려 걱정하고 있었다. 타카히로를 만나, 시끄러운 세상에 이질감을 느끼던 어린아이에서 ‘공감’하는 어른이 된 ‘나’. 비로소 ‘sympathy(동정·연민)’가 아닌 ‘empathy(공감)’를 배우게 된 ‘나’.


타카히로는 살아 있었지만 그리고 ‘나’는 타카히로가 있다는 장소에 있었지만, ‘나’는 그를 찾아가지 않는다. 고이 접어 간직해 둔 것을 굳이 다시 펼쳐, 바람에 구겨지게 하고 싶지 않았던 걸까. 지난 기억은 돌아갈 수 없기에 아련한 것이다. 언제든 돌아갈 수 있다면 그 시절이 그리울까. 언제든 만날 수 있다면 이토록 애틋할 수 있을까. 앓았던 기억도 세월의 이불을 덮고 나면 추억이라 부른다. 



가장 싱그러운 계절, 가장 뜨거운 시간


인생을 한 해에 비유한다면 가장 싱그러운 계절은 언제일까. 인생을 하루에 비유한다면 가장 뜨거운 시간은 언제일까. 태양이 가장 뜨겁게 작열하는 여름의 정오 같았던 ‘나’의 스무 살은, 타는 듯한 목마름과 동시에 가장 반짝였던 시절이었다. 여름의 정오는 타카히로와의 작별의 시간이기도 했다. 그 때 그림자는 우스꽝스러울 만큼 짧았다고 ‘나’는 회상한다. 정오였던 것이다. 그 계절 그 시간을 보내고 맞이한 ‘나’의 가을은 새빨갛게 물들고, 열매 맺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누도 잇신 감독의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 떠올랐다. 어두컴컴한 심해를 유영하던 외로운 물고기 같았던, 걷지 못하는 소녀 조제는 츠네오를 만나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던 호랑이를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츠네오가 떠나간 후에도 장애인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분명히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조제도 ‘나’도, 사랑을 통해 성장하고 변화했다.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했을지라도 잔 바닥에 남아 있는 커피 찌꺼기의 쓴맛만큼 남겨진 것들의 존재감은 크다. 가라앉은 것들이 축적된 땅에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하는 일들이 일어나, 지금의 우리가 있게 된 것이다.


두고 온 것은 사랑이 아니라 청춘의 한 시절이다. 그들은 각각 그 시간을 통과해 전과는 다른 존재가 되었다.
- 정이현,「풍선」



매거진의 이전글 소외된 우리 세 사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