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동안 나에게 주어진 에너지의 총량은 얼마일까

by 꿈결


냉동된 밥을 전자레인지에 해동하고, 남겨뒀던 된장찌개를 인덕션 위에 올리고, 계란프라이를 2개 부친다. 그 사이 어제 설거지해 뒀던 그릇과 수저를 제자리로 가져다 놓는다. 찬장 위에 질서 없이 쌓아둔 플라스틱 반찬 용기가 떨어질까 무서워 약간 웅크린 채로 선반을 조심스레 열어, 그릇과 그릇 사이에 물기 마른 새 그릇을 넣고 계란프라이를 담을 또 다른 적당한 크기의 그릇을 꺼내 든다. 김도 먹어야지 하며 김을 꺼내 자른다.

이렇게 차린 밥을 다 먹고 나면 설거지해야 하는데… 분명 탄수화물로 열량을 채웠는데 오늘 하루치 에너지를 다 쓴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숨이 차는 기분. 침대에 등을 갖다 대야 하나. 침대는 나를 충전하는 맥세이프 충전기.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내가 어디에서 에너지를 얻고 어디에 쓰는지 궁금해진다. 굳이 자동차에 비유하자면 나는 연비 구린 인간이 아닐까.

HP가 깎이는 상황을 나열해 보자면

설거지 –1

4명 이상의 모임 –10

자기소개 –30

취준할 때 가게 되는 가족 모임 –100

일상 공간에 예기치 못하게 들어오는 자극 –500

예를 들면 퇴근길 전철, 말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게 웃는 얼굴 하나 발견하기 힘든 그 공간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사랑 고백을 한다던가… –1000

어렵게 겨우 잠들었는데 위층에서 해머로 내리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린다던가 –1000

여러 명이 쓰는 강의실에서 컴퓨터에 커피를 쏟아 집중되는 시선과 아아 특유의 간장 냄새

–100000000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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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HP가 채워지는 순간도 있다.

씻고 나와 잘 준비 다 하고 침대에 눕는 순간 +50

맛있는 음식 +60

안전하고 편한 친구들과의 모임 +77

살고 있는 오피스텔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꽃향기인지 과일향기인지 모를 생생하고 달큰한 향이 마스크를 뚫고 들어올 때. 영문 모를 냄새가 나에게 향기로 느껴지는 순간 +100

아침 출근길 피크타임이 지나 조금은 한적한 2호선 전철 안에서 당산역과 합정역 사이의 한강 풍경 (너무 귀찮고 힘겨운 출근길이라도 그 순간만큼은 나오길 잘했다 하는 마음이 든다) +200

마음에 와 닿는 다정한 말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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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써놓고 보니 다행이다. 사소한 것으로도 얼른 채워지는 내 안의 에너지 저장소.

나의 사회적 에너지는 언제 고갈되며 어떤 순간에 차오를까.

친구 M.

더 이상 연락할 수 없는 친구 M.

M은 자해하는 친구였다. 주변사람들의 모함에 힘들어했고, 가족을 힘겨워했고, 스스로를 다지다 못해 뾰족해 진 것만 같은...

나는 M에게 얼마만큼의 에너지를 사용할까.

한참 일하고 있는 지친 오후에,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퇴근길에 예고 없이 걸려오는 M의 전화. 이름이 뜬 휴대폰 화면을 보는 일에 에너지가 쓰인다. 걸려 오는 모든 연락이 그런 것은 아니었는데, 솔직히 M, 너의 연락에는 유독 에너지가 쓰였다.


M은 스스로를 버거워했다. 어쩌면 M을 품어 안은 세상은 M과 다른 모양이었거나 비좁았을지 모른다. 그 세상의 아주 작은 구석을 차지했을 나는 점처럼 작았다. 미안하지만 M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했다. M의 눈을 보면 무언가 큰 게 나를 덮치거나 내 속을 뚫고 저 밑으로 끌고 갈 것 같아서. 그러다 M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던 어느 날이 기억난다. 그날은 M의 이사한 집에 처음 가 봤고, M을본 마지막 날이었다. M은 너무 말라 있었다. 그동안 했던 M의 모든 말이 거짓말이었으면 하고 바랐는데, 1년 만에 그렇게나 말라버린 M의 눈을 나는 가만히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M의 눈빛을 보고, 말도 안 되지만 나에게 해명해 주길 바랐다. 변하지 않은 건 눈빛뿐일 거라 생각하면서.


M에겐 꿈이 있었다. 그 꿈은 이런저런 모양으로 변해 갔지만 그래도 항상 꿈이 있었고, 그 꿈을 준비하기 위한 과정에 있었다. 난 M의 그런 말들이 좋았다. M이 무엇을 배우고 어떤 과정 중에서 만들어 낸 무엇을 봐 달라고 한 것. 그중 하나가 작사였다. 소녀시대의 다시만난세계 멜로디에 창작 가사를 넣은 것이었는데, 원래 가사보다 좋다고 느껴졌다. 어떤 가사였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M은 그만뒀다. 더 이상 작사는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럼 뭐 하려고?” 물어봤을 때도 역시 M에겐 답이 있었다. 너무 자주 바뀌어 기억나지도 않게 되었지만 말이다.

나는 M을 좋아했다. 너의 남다름과 진중함이 좋았고, 평소 불안감에 절여져 있던 나는 M과 있으면 굉장히 안정적인 사람이 되었다. 가끔 만났던 M은 나에게 새로운 에너지를 주는 친구였다.

분명 M은 그런 친구였고, 그래서 나도 M에게 어떤 에너지를 전달하고 싶었고, 그 에너지가 너를 움직이게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M의 도움 요청엔, 그것이 한 번 두 번이 넘어가 내 일상의 선을 넘어왔을 때 나는 지쳤고, M에게서 받은 모든 에너지를 돌려주고 내 것까지 주게 되었다.


M, 너를 생각하면 내가 아주 나쁘게 느껴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든다.

이제 더 이상 M에게 연락할 수 없다.

M은 말 그대로 증발해 버렸다. M의 부재로 나의 에너지에 변동이 생겼을까.

M은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마음 어딘가에서 나의 HP를 먹으며 자란다.

자라서 한 편의 글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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