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처럼」

새봄 만들기 세 번째, 끝

by 꼭두

「민들레처럼」

새봄 만들기 세 번째, 끝


계면쩍은 이별 "아빠, 안녕"


비가 옵니다.


가랑비가 오겠다 하더니, 한적한 도시 가로등 아래 굵은 빗줄기가 하염없이 내리네요.


이곳은 어제 오후, 아들이 막 입주한 마을에서 아주 가까운 곳입니다. 이곳에서 이틀째 밤을 맞으며 아들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 일은 없어야 하지만, 만에 하나 아빠가 필요할 때를 위해 가깝게 있고 싶다는 허술한 구실을 말했죠. 아빠 마음이 그렇다면 편한 대로 하라는 마을 대표님 허락을 받았어요.


사실은, 불과 얼마 전 기습적으로 당했던 생이별이 너무 힘들었어요. 우리 부자 둘 다.


시설에 들어서자마자 선생님 한 분이 아들을 뒤에서 꽉 붙잡더니 저보고는 어서 나가라 하셨죠. 아빠가 있을수록 이별이 힘들다면서. 선생님들을 믿고, 어서 빨리 나가라면서.


27년간 둘이 함께했던 세월의 대단원을 불과 수 분 만에 마치다니, 허망하다는 말로 표현이 안 되더라고요.


아빠 없는 낯선 방에서의 첫 밤을 아들이 잘 잠들 수 있을지 너무 불안했기에, 근처 숙소에 있겠다 했더니 그것도 하지 말라더군요. 어차피, 부모라 할지라도 입소자 외에는 출입이 안 되는 게 시설의 규정이라면서요.


수개월 전 입소 때 이미 겪었던 일이라고 하니, 이번엔 다를 테니 안심하라고도 하셨죠.


제가 겪어본 경험 유산은 그것뿐이기에 이번에는 미리부터 솔직히 말씀드렸습니다.


"아무리 3세의 발달연령이라지만, 아들 머릿속에 새겨진 아빠와의 이별과, 홀로 견뎌야 했던 낯선 곳에서의 한 달. 그 트라우마가 불과 얼마 전인데 참 걱정입니다."


"이별부터가 시작일 텐데 어떻게 할까요? 이번에는 제가 조금이라도 머물다가 몰래 사라지면 어떨까요?"


"그러지 마세요. 그건 앞으로 아드님의 마을 생활을 위해서도 좋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보죠. 아드님과 함께 천천히 마을 구경부터 하시고, 저녁도 두 분이 오붓하게 나누어 먹은 후, 제가 운전하는 차를 다 함께 타고 마을 뒷산 마루로 드라이브갑시다."


"그곳에서 아버님이 아드님과 함께 산책도 하다가 인사를 하고 떠나시면 저는 아드님과 마을로 돌아오는 겁니다. 자연스럽게."


"저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을 텐데요. 아빠라는 말도 할 줄 모르기에 비명으로 저를 부르는 아들의 목소리를 두고 나오는 게 저 또한 너무 힘들었거든요. 어쩌죠?"


"만약 다 잘 안되면, 제가 아들과 마을에서 함께 잠든 후 아침이 되기 전에 저만 조용히 혼자 나오는 걸로 하겠습니다."


과연 어떻게 됐을까요? 지금부터는 실제상황입니다.


드라이브를 마치고 차를 세우더니 저보고 먼저 내려보라네요. 내렸죠. 어라? 아들이 따라 내리지 않아요. 붙잡지도, 부르지도 않고요. 운전석의 대표님과 아들 옆에 앉은 선생님이 제게 손을 흔들며 아들에게 말합니다.


"자, 아빠한테 손 흔들어줘야지."


이놈 봐라? 제게 손을 흔듭니다. 마치 월요일 아침이면 돌봄센터 가는 차를 태워 배웅할 때처럼. 자연스럽게.


자연스럽다 못해 영 싱거운 작별 인사가 됐습니다. 저는 혼자 유난 떤 '아들 바보 아빠'가 됐고요. 긴장 속에 차를 몰고 소리 죽여 저를 따라오던 제 친구도 손 흔드는 아들을 보며 헛웃음만 지었다죠.


어이없는 허망함 대신 이런 유쾌한 허탈감이라니. 허허.


겸연쩍은 게 대수랍니까? 아들 얼굴 밝으면 그만이지. 배신감 따위 좀 느끼면 어떻습니까? 아들이 행복하면 됐지.


그래도 영 계면쩍긴 하네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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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락되지 않는 '도전행동'


실화탐사대 촬영 중에도 '특별히' 면담 기회를 주겠다는 시설이 두 곳이나 나타났었습니다.


써니가 까치 되어 놓아준 오작교 덕분이었죠. 제가 나홀로 갑의 길을 작정하고 새 길을 나서기 시작할 때부터, 우연처럼 몰아 터지기 시작한 신기한 기적의 연속이긴 했어요.


지난 일 년, 면담을 받아 준 곳이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는데.


써니조차 뜻밖이라고 했답니다. 한 달간 그리 찾아 헤맬 때는 아무 응답이 없다가 한꺼번에 소식이 찾아오고 있다면서요. 일찌감치 시작된 기적의 연속이 맞다니까요.


이전과 달라진 게 있긴 합니다.


이전에는 시설 이용을 상담할 때 제 기막힌 사연을 미리 밝히진 않았어요. 면담 때는 절박한 호소를 하게 되더라도요. 품속에서 제 진단서를 꺼내 들면서까지.


아무튼 사정이 그렇다 보니, 촬영이 다 뭡니까? 무조건 다 접고 다녀와야죠. 그때마다 촬영팀도 따라오더군요. 나중에 방송을 보니 두 곳의 그림이 합쳐져서 하나의 실패 '씬'으로 나오더라고요.


촬영 중 두 번째 면담했던 곳이 참 묘했어요.


지난 일 년간 만났던 거주시설의 요약본 내지 완결판이랄까요? 첫 통화 때부터 그랬답니다. 원장님 목소리부터가 남다르더군요. 위풍당당하다 못해 망설임 없는 단어 선택. 엄청난 데시벨은 덤.


"사연을 들어보니 딱하더군요. 아들 아버지가 곧 죽는다면서요?"


"아... 네. 제가 그 아빠입니다."


대답하고 나서야 뭔가 당황스러웠죠. 하마터면 '제가 바로 곧 죽을 그놈입니다.' 할 뻔했다니까요.


"원래 면담 대기자가 있는데, 그래서 내가 '특별히' 면담 기회를 주는 겁니다. 하지만 거기까지만이고 심사는 원칙대로, 하던 대로 할 겁니다."


"그러셔야죠. 아무튼 기회 주신 거 감사드리고 잘 봐달라는 부탁도 함께 드립니다."


그 기세 앞에 그만, 당당한 갑이 되겠다던 독한 다짐도 잊고, 어느새 유순한 을로 돌아가고 말았다죠.


아들과 함께 만나서도 마찬가지더군요. 참 거침없습니다. 아들이 들을세라 신경 쓰일 정도예요.


"오직 선교 목적으로 봉사를 시작한 지 벌써 30년인데, 요즘은 우리 시설 대표들이 아예 죽일 놈이 돼 있다니까요. '색동원' 사건요? 그게 그리 호들갑 떨 일입니까? 그저 개인의 일탈뿐인 것을."


오랜 세월, 장애인 시설 원장을 하고 계신 분들. 지역 복지사업계의 원로 내지 유지로 대접받는 분들입니다.


딱한 처지의 제가 뭐라 말을 보태겠습니까? '받아주면 감지덕지'인 기구한 운명의 아빠는 그저 쓴웃음만 나올 뿐. 속으로만 생각했죠.


'잘하면 내 평생 가까이하기엔 너무 멀었던 교회 다니게 생겼네. 팔자에 없던 십일조 헌금이라도 필요하다면 기꺼이 바쳐야지, 뭐.'


하지만 그럴 일은 없었어요. 바로 다음 날 아침, 기숙사라면 사감쯤 돼 보이는 선생님이 일찌감치 전화를 걸어와 그러시더군요.


"아시다시피 아드님의 '도전행동'이 우려돼서 함께 하기는 힘들겠네요."


그놈의 '도전행동'. 이 단어 말이죠. 자폐 치료교육 현장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복지지원 분야에서는 늘 단골멘트죠. 주로 시설 관계자나 운영자들이 애용하는.


'도전행동 때문에 단체생활 곤란'. 그러니 '입소 불가', 혹은 '퇴소 처분'.


누구를 위한 단어랍니까?


누구를 배려하는 거죠?


누구의 시선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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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선 안으로'의 초대장


저는 그 단어를 들을 때마다 선명하게 겹쳐 들리는 목소리가 있어요.


우리나라에 처음 지하철이 달리기 시작한 1974년 그해 여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무려 30여 년간, 승객들을 상대로 지하철 플랫폼에 울려 퍼진, 단호하고 낭랑했던 경고방송.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안전선 '밖으로' 한 걸음 '물러나' 주시기 바랍니다."


자그마치 30년을 방송하고 나서야 이게 잘못된 말이란 걸 깨달았다죠?


승객을 위해 만든 말이 아닙니다.


'안전선 안'은 달려오는 열차를 피해 승객이 머무는 안전한 곳을 말합니다. '안전선 밖'은 열차가 지나다니기 때문에 승객에게 매우 위험한 곳입니다.


'밖으로 물러나라'고 모순된 경고를 외치는 건 열차를 배려한 말입니다.


내가 달리는 시선 밖으로 기관사가 사람들을 쫓아내는 거죠. 사람이 아니라 열차의 안전을 위해서.


안전선 밖으로 나가라는 건 결국 사람을 벼랑 끝 선로로 밀어내는 말이었는데, 그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은 그게 안전인 줄 알고 살아왔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무심결에 그렇게 말하는 경우가 많아요.


애초부터 그랬어요.


저마다의 사람이 안전하게 딛고 서 있는 곳이 삶의 구역이 맞는지에 대해선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삶에 내가 필요해져서 내 품속을 원한다면 '밖으로 물러나서' 내 열차의 안전을 먼저 지켜보라는 명령이죠.


그건 이미 안전선 안에 있는 시민들에게 요구하거나 경고할 일이 아닙니다. 멀쩡한 시민이라면 누구도 열차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지 않거든요. 유능한 기관사라면 스스로 안전한 열차를 지켜내야죠.


참 유순한 시민들이죠?


무려 30년간 불만 섞인 항변 한마디 없이 그 명령을 당연한 듯 듣고 살아왔으니까요. 열차가 안전해야 내게도 자리가 올 거라는 기대감 속에서.


자매품으로 시위진압차량 확성기에서 울려 퍼지는 거친 경고방송도 있죠.


"여러분은 불법집회 중입니다. 즉시 해산하세요. 응하지 않으면 강제해산을 경고합니다."


누구를 위한 법과 질서인지에 대해선 굳이 말하지 않겠습니다. 곳곳마다 때에 따라 다르겠죠.


하지만 아들의 행복과 안전을 지켜달라는 아빠의 호소를 가로막아 선 게 지금 내 눈앞에서 당장 사라지라는 공권력의 해산 명령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가족의 비명이 현 시스템의 질서에 대한 도전행동이라며 밀어낸다면 저는 불법적인 아들 사랑을 계속할 수밖에요.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습니다.


시설의 무탈한 운영을 위해 부모라 할지라도 안전선 밖으로 물러나라는 그곳 원장님과 열차 기관사가 말이죠. 시설의 질서 유지를 위해 감히 도전행동을 한다면 사라지라고 명령하는 그곳 선생님과 경고방송의 목소리가 말이죠.


안전한 삶의 품을 찾아갔지만, 그곳을 배려하는 게 먼저였습니다. 그들의 눈으로 보면 자폐스펙트럼 장애인이 보이는 행동은 도전입니다. 그들의 시선으로는 시설의 안전을 위협하는 짓입니다.


시설은 비장애인의 숙박업소가 아닙니다. 이곳을 찾아온 사람들은 특별한 돌봄이 있어야 하는 장애인입니다.


부모에게 모든 걸 책임지우지 않으려고, 그 짐을 나누어지려고 만든 곳이라고요. 우리는 힘들어서 못하겠으니 나가달라고 하는 업무 매뉴얼이라니요.


사회복지사라는 전문 직함을 지니고 있지만 왜 자폐인이 소통을 꺼려하고 강압적 통제에는 저항하는지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힘겨운 근무환경 속에서 청춘의 배움은 다 잊었나 봅니다.


오랜 세월 겪으며 판단했습니다.


중증 장애인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전문 거주시설이, 젊은 자폐스펙트럼 장애인을 거부하고, 무기력한 시니어 지적장애인의 요양시설이 되고 말 수밖에 없었던 사연입니다.


지하철은 여전히 거만합니다.


지하철공사와 국립국어원이 이 말의 모순을 지적받고는 대대적으로 수정했다는 표현이 고작 '밖으로'를 '안쪽으로'라고 표준 방송문안을 바꾼 겁니다.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안전선 '안쪽으로' 한 걸음 '물러나' 주시기 바랍니다."


'물러나라'는 명령은 여전히 멀쩡하게 살아 있습니다.


교통공사 임원분들과 국립국어원 박사님들께 명령합니다. 당장 또 바꾸세요. 이렇게 말해야 마땅합니다.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안전선 '안에서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한마디 덧붙여 주신다면 금상첨화죠.


"우리 열차는 늘 안전합니다. 안심하고 오르세요."


이 나라는 우리에게 늘 '밖으로 물러나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우리는 안전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배제의 위협에 너무 길들여져 왔습니다.


벗어나야 합니다. 지하철도의 경고방송에서도, 거주시설의 거절규정에서도.


열차도 시설도 사람의 안전한 삶을 위해 만들었습니다.


사람을 배제하는 시설의 안전이란 건 존재할 수 없는 단어입니다. 시설을 향해 살려달라고 비명을 질렀을 뿐, 시설의 안녕을 위협하려고 도전한 적 없습니다.


그곳은 권력이 아닙니다. 강압적 경고를 할 자격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시설에 위험이 있다면 걷어내시고, 안전이 위협된다면 먼저 고치세요. 우리는 잘 준비된 시설의 '안전선 안으로' 초대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배제가 아니라 배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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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씨앗 「민들레처럼」


제가 '단무지'로 불리던 때가 있었죠.


단순무식한 놈이란 말이 참 마음에 들더군요.


60년대 만화책으로 한글을 깨친 소년, 길냥이 본능으로 거리를 헤매던 날라리 학생, 캠퍼스의 신종 딴따라로 노천극장 흙먼지 속을 뒹굴던 청춘.


아무리 똘똘한 범생이로 위장하고 샤프한 IT 사업가로 포장해 본들, 단순무식만큼 저를 잘 말해주는 단어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일찌감치 구어체와 대화체에 젖어버려 온통 비문(非文) 투성이인 제 글을 저 혼자 다시 보노라면 왜 작가의 품격과는 거리가 먼 놈인지 단번에 알겠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논문도 수필처럼'이 원래의 제 모토인데 오늘은 영 이상합니다. 마치 '수필을 논문처럼' 적고 있어요.


아들을 새로운 마을에 입주시키면서, 문득 지난 세월 시설에서 겪어야 했던 서러움이 몰아쳤나 봅니다. 30년간 본능적으로 저항했던 지하철 경고방송까지 겹쳐지면서 갑자기 한글학자 흉내까지 내버리고 말았네요. 하하.


그래도 마무리는 지어야겠죠? 두 줄로 마치겠습니다.


변함없는 시설의 안전선은 여전히 장애인과 부모를 '밖으로' 밀어냈고, 결국 '탈시설'이라는 정책현실을 낳았습니다.


이제 아시겠어요? 왜 죽일 놈이 됐는지? 무려 30년에 걸쳐 완성하신 자업자득입니다.


원래 제가 기록하기로 한 새봄 만들기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또다시 좌절을 반복할까 두려워, 혹여 부정이라도 탈세라 최소 한 달 만이라도 입 닫고 있으려 했는데 아무래도 제 피터 팬 새로 입주한 곳이 네버랜드 맞는 것 같아요.


반도의 품속 '이슬푸른마을'에, 아주 일찍부터 왕들의 네버랜드 건설 교시를 따르기 시작한 지혜로운 건축주가 계셨습니다.


이 나라에 '탈시설'이라는 단어가 생기기 훨씬 전인 30년 전부터 자폐인을 위한 탈시설 자립마을을 건설하기 시작하셨다죠.


네, 명망가들께서 끝없이 자폐인을 밀어내던 30년 동안, 이 건축주는 이미 오늘을 다 알고 있었다는 듯 일찌감치 네버랜드 건설을 마치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마지막 입주자로 제 피터 팬 아들의 손을 잡아 '마을 안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어떤 공동체든 그들이 쓰는 단어가 정체성을 드러내는 법이죠. 그곳은 시설이 아닙니다. 마을입니다. 자폐인과 그 가족을 반기는 산과 물과 바람이 넘치는 자연 속 체험공동체입니다.


입소가 아닙니다. 입주입니다. 시설에 갇혀 살며 관리당하는 곳이 아닙니다. 자연을 뛰어다니며 자립을 체험하는 곳입니다.


제가 이 글을 기록하고 있는 곳은 그 마을로부터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조용한 도시의 방입니다. 혼자입니다. 곧 해가 뜨려나요? 아직은 신새벽이고 빗줄기도 여전히 거세지만 곧 멈출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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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은 새봄을 향한 하얀 기다림이 무색하게도 닷새 정도면 모든 꽃망울을 뚝뚝 떨구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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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과 도시마다에도 목련이 흐드러졌더군요.


지하철이 경고방송을 시작하던 1974년보다 한 해 이른 1973년, 뉴욕에서 갓 출소한 '빙고'라는 사내가 플로리다의 고향마을로 돌아갑니다.


마을의 이정표이자 상징인 거대한 참나무마다 수백 개의 노란 손수건이 그를 반기고 있었죠. '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e Oak Tree'라는 노래가 이 실화를 온 세계에 기록했죠.


앞집 마당 백목련이 어제 내려친 천둥과 비바람에 마지막 꽃을 다 덜어내며 봄날의 안녕을 고했습니다. 그 자리마다 벌써부터 푸른 새잎이 힘차게 올라오고 있네요.


단무지의 널뛰기로 이 글과 새봄 만들기의 기록을 모두 마칩니다. 다음 글부터는 「'나는 꿈을 꿉니다' 첫 번째」입니다.


어제 아침, 귀곡산장의 낡은 콘크리트 계단을 뚫고 피어난 작고 노란 민들레를 만났습니다. 지나가는 곳 가지마다 매달려 새봄을 반겨줬던 백목련의 기적을, 민들레 샛노란 꽃이 이어받아 완성해 주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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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이 나라 열차는 '물러나라'고 경고했지만, 지구 반대편에서는 참나무마다 노란 리본을 '매어달라'고 노래했죠.


세상은 내 아들에게 도전행동이라며 안전선 밖으로 물러나라고 하지만, 나는 오늘 내 아들을 위한 민들레 노란 씨앗을 세상에 뿌립니다.


그 홀씨가 내려앉은 곳마다 노란 리본이 매어져 우리가 걸어온 길의 마지막을 반겨주기 바랍니다.


우리 피터 팬들이 안심하고 돌아올 수 있는, 노란 손수건 가득한 참나무가 감싸고 있는 곳. 피터 팬마다의 행복과 존엄을 약속하는 안전한 마을을 꿈꿉니다.


왕들이 명하신 기적의 완성을 꿈꾸면서 제가 회고록에서 한 번도 안 해본 짓 하겠습니다. 시간이 허락하시면 노래 하나 클릭해 보시죠.


박노해의 시에 조민하가 곡을 붙였고, 꽃다지의 곽경희가 30년 만에 다시 부르는 노래입니다.


「민들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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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