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 속의 타임캡슐」 첫 번째
안녕? 꼭두가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 됐네.
그는 지금 주 3회의 글 올리기에 대해 생각이 많은가 봐.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거지. 게다가 아직은 머릿속이 맑지만 그게 언제까지일 거라는 보장도 없다나? 주 5회 정도는 쓰고 싶다는데 내가 말리고 있어. 욕심 앞서다 약속한 요일 놓치면 안 된다며?
홀로 쓸쓸맞기만 하던 독거노인이 요즘 무척 바쁘더라고. 60여 년의 생을 정리한다는 게 뭐 그리 일이 많은지. 물론 그는 해놓아야 할 일이 많긴 해. 가장 큰 숙제인 아들 살 곳 마련이 아직인 게 제일 초조한가 보더라고. 요 몇 주 정신이 없더라.
오늘은 시간여행을 할까 해. 그가 회고록의 처음에서 말하길, 자기는 시간여행은 하지 않겠다고 하던데, 아마도 그건 '그때를 아시나요?' 류의 고리타분한 이야기나, '라떼는 말이야~' 따위의 꼰대 소리는 안하겠단 거겠지?
시인 도종환은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며, 그 이유를 이렇게 단언하더군.
그가 중학생 무렵부터 '난 사업을 할 거야' 하던 기억이 나네.
훗날 청년이 된 그가 결국 젊은 사업가의 길을 걷게 된 게, 아버지가 채 못 이룬 성취를 대신하고 싶었던 건지, 그 고단함을 따라 해보고 싶었던 젊은 치기였는지, 그건 잘 모르겠어.
하지만 이 친구, 운명론자 비슷한 구석이 있다니까. 아버지의 길이 자신에게도 이어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건 맞아 보여.
그가 아버지한테 썼던 편지를 찾았어. 편지...라기보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으로 자신을 달래보려 했던 기록 정도? '그 양반도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1970년대 초반. 그는 국민학생이었고, 젊은 사업가 아빠는 타향살이 가장의 고단함에 힘겨워하던, 그때에 대한 그의 기록이야. 그 또한 나홀로 가장에 많이 지쳐있던 시기에 쓴 글이더군. 그가 제 나이 또래의 아버지를 떠 올리는 모습. 내게는 그리 낯설지 않아. 지쳐 보인다 싶으면 나오는 그의 버릇?
오늘 나는 그저 우편배달부만 할게. 어차피 이 편지에는 내가 끼어들 틈이 거의 없기도 해서.
왕대포
"아빠 모셔 와라."
아직 밤까지는 아니고 석양을 넘어 저녁이 한참 깊어 갈 즈음이면, 엄마는 어린 동생을 품에 안은 채 제게 자주 저렇게 말했었죠.
그러면 기다렸다는 듯 전 말 없이 집을 나섰고요.
고갯마루에 있던 우리 집. 한참을 걸어 내려가야 볼 수 있는 '왕대포'.
낡은 여닫이문 유리창에 진지한 궁서체로 그 글자가 빨갛게 쓰여있던 가게. 그 옆 창에는 큼직하게 '안주일절 실비제공'.
밖으로 마음껏 뿜어져 나오는 하얀 연기에 벌써부터 속이 아찔해지면서, 조심스레 그 문을 열고 들어섭니다.
사람을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온통 뽀얗게 들어찬 자욱한 연기와 고기 냄새 속 어딘가에서, 혼자 앉아 있는 아빠를 어렵지 않게 발견해요.
석쇠 한판
그저 조용히 그 앞에 제가 앉아요.
어쩌다 "아빠." 하고 부르면, 아주 느릿하게 한참을 있다가 "왔냐." 하며 짧은 답 한마디.
동그란 드럼통 속 연탄불 위엔, 드시던 고기 몇 점과 소주병이 한 개, 때로는 두 개.
잠시 후 아빠가 손을 들면, 대폿집 아줌마는 익숙하게 고기 한 접시와 뜨거운 보리차 한 잔을 제 앞에 가져다주십니다.
아빠는 두어 번 고기를 뒤집다가 제 쪽으로 밀어 놓으시고, 저는 별스럽지 않은 척하며 차곡차곡 그걸 집어 먹어요.
너무 맛있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 혹은 웃으면서 서두르는 걸 보이지 않으려 애써 노력하면서 조용조용... 고른 속도로 천천히.
제가 그 석쇠 한판을 다 비우고 나면 아빠가 일어섭니다. 전 또 말없이 그 뒤를 따르고요.
차가운 밤공기에 퍼지는, 아빠와 제 몸에 남은 고기 냄새를 맡으며, 마중인지 외식인지 모를 제 늦저녁 나들이가 그렇게 끝나곤 했죠.
고기 냄새
어린 '국민학생'의 아빠 저녁 마중 기억은, 대학생이 되고 직장인이 되어서도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죠.
점점 그 숫자가 줄어들긴 했지만, 허기진 배로 들어서는 귀갓길 저녁 골목에서, '왕대포'라고 쓰여진 곳의 하얀 연기와 내뿜는 향을 맡노라면, 어김없이 그때마다 그날 아빠가 구워 주시던 고기가 떠올랐으니까요.
그게 왜 그렇게 맛있었나 모릅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따로 밑간을 하거나 양념도 하지 않은, 부위도 가리지 않고 그저 숭덩숭덩 썰어낸 연탄불 위 돼지고기였을 뿐인데.
언제부터인가 귀가 길목의 그 고기 냄새가 이제는 치킨 냄새로 바뀌어 가는구나 싶었는데, 요즈음엔 그마저도 사라지는 것 같더군요. 귀갓길의 일탈을 유혹하는 그 익숙한 향이 말이죠.
가끔씩 보이는 클래식한 연탄구이집은 보일 때마다 들어가 봐도 그 맛은 아니더라고요.
타향살이
깡시골 아주 작은 마을의 청춘남녀였던 아빠와 엄마.
좁은 신작로에 마주한 앞집으로 시집가던 날. 먼 곳 떠나보낸다며 그렇게 울었다던 외할머니.
팍팍한 종갓집의 시집살이 삼 년 후, 자신의 글솜씨로 사업을 하겠노라며 고향 떠나는 아빠의 손 꼭 붙잡고 생전 처음 서울에 올라온 엄마.
젊은 사업가 아빠는 타향살이 가장의 무게감과 고단함을 귀갓길 대폿집의 그 연기 속에서 혼자 달래셨을 거라 헤아립니다.
아빠의 기억 속 고향마을, 해 질 무렵이면 집집마다 피어오르던 밥 짓는 연기와 냄새 대신이었을 지도 모르고요.
아빠 냄새
아는 이 하나 없는 서울에서, 아이 셋 키우며 종일 아빠만 기다리며 지내다가, 그 저녁 저를 아빠 마중 보내던 엄마의 마음.
어서 아빠가 보고 싶어 그러셨던 건지, 자식에게도 맛있는 고기를 먹이고 싶으셨던 건지, 그건 아직도 모릅니다.
그때 그 고기 정말 맛있었다는 말, 지금껏 누구에게도 한 적이 없으니까요.
너무 많은 세월이 흘러서일까요.
제 어린 기억 속, 아련하게 남아 있는 희뿌연 연기가, 온전히 고기의 냄새였는지 낯익은 아빠의 냄새였는지 그것도 이제는 잘 모르겠습니다.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깊어 가는 저녁을 쳐다보다가, 아주 가끔씩... 마중 나갈 그곳이 문득 그리울 따름이지요.
아주 훗날의 회상
아버지의 글솜씨는 '서체'였습니다.
공주 깡촌 고향마을에서 아버지의 직업이 바로 그 '전설의 면서기'셨다지요. 온 마을 사람들의 호적부를 모두 손으로 써 주시던.
그 청년이 '인물이 먼저냐, 글씨가 먼저냐?' 하며 마을 사람들이 말씨름까지 벌일 정도였대요. 그 좋은 글씨를 이 촌구석에서만 보기에는 너무 아깝다고들 하셨답니다.
어느 날 아버지에게 누군가 그랬답니다. 지금 서울에 가서 인쇄업을 하면 떼돈을 벌 거라고.
당시에는 당연히 요즘 같은 컴퓨터 출판은커녕 활판 인쇄도 흔치 않았어요.
기억하는 분들 있으실까요? '가리방'이라고 불리던 철판 위에, '원지'라 부르는 기름종이를 놓고, '철필'로 긁어서 글을 쓴 후, '등사기'에 붙여 걸고, '갱지'에 인쇄를 했었죠.
석박사 논문도, 웬만한 중견 기업들의 결산서도, 심지어 어지간한 일반 출판물도 모두 그렇게 인쇄, 출판되던 시절.
그때가 1960년대 중반. 그런데 제가 80년대 초반 대학에 들어갔는데, 이른바 젊은 운동권 전사들이 딱 그렇게 지하유인물이라는 걸 만들고 있더라고요? 아는 척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물론 반갑기도 했고.
촌마을에서 촉망 받던 젊은 면서기는 공무원이라는 그 훌륭한 관직을 훌훌 던지고 서울이라는 인쇄 엘도라도를 찾아 아내 손 하나 쥐고 상경하셨던 거예요.
사업 자금 한 푼 없이 용감하게.
어릴 때 자다가 눈을 떠 보면, 앉은뱅이 상에 마주 앉아 가리방 위에 원지를 잔뜩 쌓아놓고 일하시는 새벽녘 아버지의 뒷모습이 너무 익숙했어요. 사각사각 철필 긁는 소리와 함께.
너무너무 후회되는 일이 있어요
아버지가 소풍 마치고 가시던 날, 아버지의 손글씨를 모두 태워드렸어요. 그때는 왠지 그렇게 해드려야 할 것 같아서.
사실 어머니 지분이 크죠. 그놈의 '글씨'가 결국 내 남편 고생만 시키다 그예 잡아먹었다고 끔찍해하셨거든요. 저는 다른 이유였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두고두고 후회합니다. 왜 아버지의 글을 한 개도 남겨두지 않았는지.
한 번이라도 다시 아버지를 보고 싶을 때, 단 한 번이라도 그 멋있는 아버지의 글씨라도 볼 수 있다면 이 그리움이 훨씬 덜해질 텐데... 하면서 말이죠.
그때 누구든 저 좀 말려줬으면 얼마나 좋았을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