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나홀로 하루」 일곱 번째
좌절된 생이별
"재판을 속개... 아니 인터뷰를 계속합니다. 야, 마무리 짓자."
이번 이야기는 이전 글에서 바로 이어지는 것이기에, 아직 인터뷰 시작 글을 보지 않으신 분은 그거 먼저 보고 이 이야기를 이어서 보시는 게 낫지 싶어요.
「인터뷰 혹은 자술서」 바로가기
검사님 오셨네. 그래, 어서 마치자.
"네가 살아서 돌아왔는데, 아들이 집에 없었단 게 뭔 소리야? 아들 밥 해 먹이려고 교수 졸라서 퇴원했다더니?"
진단 후, 내 두 번째 결심이 아들 엄마에게 '아들이 아빠 없이 혼자 살 곳 찾아내서 잘 지켜달라.' 부탁이었던 거 기억하지? 그런데 예상과 달리 도통 진도가 나가지 않고 있었어.
부탁하던 때가 4월이었는데 만 4개월이 지나도록 찾지 못하고 있었지.
그러다가 극적으로 응답을 받았다고 해야 하나? 응급 입원하고 있는 중에 연락이 왔는데 마침내 찾았대. 강원도 영월이라네. 멀다 싶었지만, 차라리 그게 낫다 싶기도 하더라.
아빠는 병원에서 북망산 근처를 헤매고 있는데, 아들이 그곳으로 간다는 연락을 받았어. 퇴원하는 날 새벽 5시였어. 지금 출발한대. 아들 옷이며 전동칫솔, 전기면도기까지 새로 산 캐리어 가득, 짐 다 꾸렸대.
보고 싶으면 마지막으로 병원 들러서 얼굴 보여주겠다는데, 망설이다가 그냥 가라고 했어. 그러다 아빠 얼굴 보고서 안 간다고 하면 어떡해. 그냥 출발하고 잘 가고 있는지 전화나 또 해달라 했지.
전화가 왔어. 저절로 눈물이 터지더라. 이대로 생이별이라고?
"네 세 번째 결정이 오판이었단 건 뭐고? 게다가 그래서 첫 번째 결정이 뒤집혔다고?"
난 허망한 마음을 달래며 병원에서 미적거리다가 집으로 돌아왔어. 이미 아들이 집에 없다는 걸 알기에.
난 내가 집에 돌아오면 살아 돌아왔다는 안도감에 그대로 쓰러져 잠들 줄 알았어. 그런데, 벌써부터 아들 보고 싶어서 잠이 안 오더라. 그러다 새벽에 전화를 받았지. 2시쯤이었는데 영월의 장애인 거주 시설에서 긴급 연락이 왔대. 당장 데려가라고.
"돌려보내? 그럴 수도 있는 거야?"
아들이 잠을 안 자고 말썽을 피운대. 갑자기 옷도 도로 입고 신발도 도로 신더니 집에 가겠다고 떼를 쓴대. 옷을 벗기려는 교사를 공격해서 팔이 뜯겼대. 그래서 부지런히 출발해서 영월로 가고 있대.
"뭐? 스스로 너무 힘들 때 유일하게 아빠에게 하던 공격 행위를 다른 사람에게 했다고?"
웃기는 건, 초조하게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데 자꾸 웃음이 나와.
생이별인 줄 알았는데 다시 볼 수 있다는 게 좋아서.
갈 곳 없는 아들
몇 시간 후 아들이 돌아왔어. 아이 엄마는 낭패스러운 표정이 역력한데 난 다 떠나서 아들 얼굴 다시 보니 너무 좋아.
아들은 집에 오면서 아무것도 안 먹었대. 아마 피곤할 테니 그대로 잠들 것 같다 하고는 갔어.
잘 거라고? 천만에. 내가 집에 있는 걸 보더니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좋아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빠 없는 며칠 동안의 집이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러다 어디 산속에 데려다 놓고는 이제 여기서 살라는데 얼마나 무서웠을까 생각하니 또 눈물이 나.
어디로 도망갔는지 자기 혼자 내버려둔 채 보이지도 않는 아빠를 얼마나 원망했겠어.
그 새벽에 그놈 좋아하는 스팸과 우리 집 김치 잔뜩 넣어 부대찌개 만들고 라면도 끓여주니 단숨에 두 끼 이상을 먹더라. 그리곤 내 옆에 찰싹 붙어서 잠들었지.
다음 날 아침부터 곰곰이 현실을 정리했어. 강원도 산속 여행의 피곤에 지쳐 잠든 아들을 보면서.
아들은 이제 아빠 없이 혼자 살아가야 할 곳을 찾아야만 해. 내가 좋든 싫든 생이별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야. 그런데 아무 곳에서도 아들을 안 받아주려 해. 정확한 통계는 들쑥날쑥하지만, 전국에 있는 장애인 거주 시설은 천 개 이상이야.
그런데 아들이 갈 곳이 없어. 없어. 없다고. 단 한 곳도 없다고.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생모가 지금까지 전국 대부분의 거주 시설과 연락을 했지만 지난 4개월간 찾지 못했어. 정말 극적인 순간에 딱 한 곳 겨우 찾았는데 몇 시간도 못 견디고 쫓겨났어.
내 시계는 교수가 '아무것도 안 하면 6개월'이라고 했던 시간이 지금도 똑딱똑딱 지나가고 있어.
"왜 없어? 천 개 이상의 시설이 있다면서?"
시설마다 T/O는 정해져 있는데 채우는 건 어렵지 않아. 비장애인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우리나라의 장애인 수는 아주 많아. 지금 내 아들처럼, 그동안 꽁꽁 숨겨놓고 자식을 돌보던 유일 보호자가 사라질 위기에 처한 장애인도 그만큼 많아.
혈기왕성한 젊은 장애인은 무기력한 노년 장애인보다 관리하기가 몇 배는 힘들어. 장애인을 직접 케어하는 일선 교사들을 채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냐. 아직은 그들의 처우가 그렇게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란 거지.
별별 핑계를 대면서 접수 자체를 거부해. 지금 교사가 모자라서 받을 수 없대. T/O가 차서 못 받는대. 그런데 아예 대기도 안 받아. 자해나 타인에 대한 공격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자기들은 받을 수 없다고 해.
모든 책임은 장애인과 보호자에게 돌려. 장애인 부모 특유의 눈치 보기나 '내 탓이오'를 자극하는 거지. 이렇다 보니 전국 대부분 장애인 거주 시설에서 실제로 지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리다 해도 50대부터 시작해서 대부분 지적장애의 노년들이야.
시설의 전문가가 충고라며 은밀하게 말해주길 자폐장애라는 말은 하지 말고 지적장애 뒤에 숨으래. 지자체 공무원이 '우리는 2~30대 자폐장애는 못 받아요. 받을 곳이 없어서.'라고 대놓고 말해.
자기 자식의 자폐를 널리 알려서 도움을 받으라던 그들이야. 그게 장애인 부모로 살아가는 제1의 원칙이라면서. 선한 이웃들이 꼭 도와줄 테니 믿으라면서.
그런데 이게 지금 복지국가 우리나라의 현실이야.
생이별을 부탁해
정신이 번쩍 들더군. 설마 한 곳도 없을까 했던 내 세 번째 결정은 오판이었어. 인정해야지. 다음 입원일만 기다렸어.
"원래는 이번 입원도 안 하려 했던 거지?"
그랬지. 이번엔 내 뜻은 묻지도 않고 퇴원과 동시에 다음 입원을 예약시키더군. 바로 이어서. 그런데 속마음으론 이번에도 입원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어. 더구나 퇴원일에 아들이 거주 시설로 떠났기에 더욱더.
"그런데 하루도 못 자고 쫓겨왔잖아?"
퇴원할 때 잡혔던 입원일을 손꼽아 기다리며 내 첫 결정을 뒤집기로 마음을 정리한 후, 입원하자마자 교수한테 말했지.
"교수님, '치료' 받겠습니다."
갑작스럽게 태도가 바뀐 고집통 어린 노인의 말에 좋아하는 것 같은 느낌도 잠시.
"금주! 금연! 해야 해요. 특히, 술은 단 한 방울도! 안 됩니다."
"네, 할게요.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저도 교수님께 부탁 두 가지만 할게요. 제 아들 저 아니면 밥을 못 먹어요. 저 주중에는 어떻게든 해볼 텐데, 아들이 집에 오는 날에는 꼭 퇴원시켜 주셔야 합니다. 그다음 언제든 다시 오라고 하면 무조건 다시 올게요."
가관이지?
당시 특검 수사를 앞둔 김건희가 아산병원에 한 차례 입원을 했는데 이를 둘러싼 특혜 논란에 나라가 떠들썩했던 시기야. 게다가 전공의 파업사태가 해결되지 않아 아산병원 입원은 '하늘의 별 따기'라던 때지.
그런 병원을 수시로 제 집 드나들 듯 입, 퇴원시켜달라는 요구.
더구나 예약을 하면 외래 진료까지 일 년이 걸리고, PA급 간호사를 개인 전담 간호사로 두고 있는 이른바 잘나가는 교수보고 치료 일정을 자기에게 맞추라는 건방진 환자 같으니라고. 하하.
그러고 보니 여기서 이거 말하고 있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 난 권력도 재력도 김건희 발끝의 만분의 일도 못 미치는 초라한 독거노인이니 무죄 맞지?
"그걸로 끝이 아니라며? 부탁이 두 개라면서?"
"제 아들 살 곳 찾을 때까지만 살려주셔야겠습니다. 더는 안 바랄게요."
웃으려는 건지 어이없단 건지 애매한 표정을 잠시 짓는 것 같더니, 내가 처음 치료 안 받겠다 했을 때와 똑같은 말을 똑같은 투로 하더군.
"그러세요, 그럼."
그 뒤 격주로 이어지는 입, 퇴원이 계속 반복됐지만, 난 그 시크한 의사가 미안해하는 표정을 처음으로 보게 됐고, 그에게서 '인생전역 명령서'를 전달받았어. 이미 그 결과는 회고를 시작하면서 다 말했던 거 기억하지?
「인생전역 명령서」 바로가기
하지만 그렇기에, 난 더더욱 마음이 급해지고 말았어.
자, 인터뷰는 끝났어.
그리고 내 전쟁이 시작됐어. 아들 살 곳 찾아야 하는 전쟁.
"제발 저를 제 아들과 생이별시켜 주세요." 읍소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