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줄기 속 출정의 아침

이별 기록 세 번째

by 꼭두

빗줄기 속 출정의 아침

이별 기록 세 번째


입장권은 건강진단서


체험 기간 한 달 성공은 아득한 나중이고, 첫 밤을 넘길 수 있을지 근심하는 아빠 앞에, 첫 밤부터 가로막고 있는 첫 허들이 드디어 나타났습니다.


체험 입소에 필요한 첫 서류인 '건강진단서'를 어떻게 받을 수 있느냐가, 코 앞의 현실로 닥쳐온 거죠. 건강진단서 있어야 입장이 됩니다.


아들은 26살이 되기까지 병원에서 건강진단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아예, 병원 입장부터 성공해 본 적이 없으니까요.


사람이 크면서 일상적으로 해야만 하는 건강 관리. 다들 단계적으로 거치는 성장 과정을 밟지 못한 피터 팬이기에 부모들이 겪어야 하는 큰 어려움입니다.


그나마 아들이 건강 체질인 게 참 고맙기만 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주기적으로 겪어야 하는 감기 몸살, 고열 따위에 대처는 물론이지만, 특히 성장 과정에 필수적인 치과.


아들 여섯 살이던 2005년.


"이제 장애아도 편하게 진료받을 수 있습니다. 장애인 전문 치과를 우리나라 처음으로 '서울특별시'가 만들었어요."


이 뉴스를 보고는 오아시스를 만난 심정으로 한걸음에 찾아갔던 어느 겨울날 아침.


"아무리 장애인 전문 치과더라도 아이의 협조가 없으면 우리도 방법이 없어요."


별스럽지 않게 말하는 의사를 어이없이 쳐다만 보다 쓸쓸히 나와야 했던 참 추웠던 날. 그 서러웠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서울특별시답게 참 '특별한' 치과를 만들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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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전담 국립재활원


아들에게 '힘'이라는 게 생긴 초등 고학년 이후에는, 병원 입장부터 불가능하게 됐죠. '과' 관계없이.


아들 발목이 골절됐을 때, 건장한 보호사 몇 명의 도움으로 정형외과 입장까지는 했지만, 끝내 X-RAY 한 장 찍지 못했던 아들.


그동안의 건강 관리는 아빠의 대리 처방으로 버티고 있었지만, 건강진단의 필수인 혈액 채취에 온갖 궁리만 가득합니다.


어떻게든 힘으로 제압하는 것밖에는 없다. 그렇게라도 반드시 해낸다, 생각하고 있었어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상상하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을 만나고, 그들이 알려 주는 모든 곳에 찾아갔습니다.


제일 큰 곳부터 먼저 갔죠.


보건복지부가 책임 운영한다는 국립재활원. 이 나라에서 제일 권위 넘치는 재활병원.


그곳에는 이 나라에서 제일 큰 '장애인 전담 의료센터'와 '장애인 전담 건강검진센터'가 있습니다.


수유리 4.19 묘역을 지나, 좌우로 도봉산과 수락산을 거느리고, 바로 뒤편에 북한산 인수봉을 끼고 있는 풍경 좋은 곳입니다.


하지만 찾아가는 사람에게는 그저 산속 오지일 뿐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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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의 인권?


그곳의 의사가 말하길, 장애인을 힘으로 제압하는 건강검진은 이제 안 한답니다.


장애인 인권이 아주 중요한 시대라네요. 지금은 이전처럼 어떻게든 힘으로 해내던 혈액 채취, 안 한답니다.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장애인 인권 중요하겠죠. 그런데 사람의 생존을 위한 인권이 우선인 게 당연하지 않나요? 긴박한 건강 관리나 시급히 살 곳 마련을 위해서라면 말이죠. 제 아들, 건강진단 못 하면 거주 시설에 못 들어갑니다."


아빠의 원망이 하나 더 추가되는 순간입니다.


"그 원초적 기본 인권을 위해 다른 인권이 어느 정도 침범받을 수 있느냐를, 최소한 직계 피붙이인 부모가 판단할 수 있게 해 줘야 정상 아닙니까?"


늘 들어온 말이라는 듯, 별로 망설이지 않고 바로 답하네요.


"선생님 말씀이 맞습니다. 그런데 저희는 못 합니다."


딱 거기까지. 그리고 요지부동.


생존권 사수 투쟁을 하자는 게 아닙니다. 이게 안 되면 당장 체험 입소를 아예 못 하잖아요.


"피 몇 cc만 뽑으면 됩니다. 제발 부탁합니다."


결국 10명이 오면 3명 정도는, 무려 국립재활원의 무려 장애인 전담 건강검진센터에서도 성공하지 못 한다네요. 그게 현실이랍니다.


'장애인전문치과병원'에 이어, 이번엔 깊은 산속 '장애인전담건강검진센터'에서 또 쓸쓸히 퇴장해야 했죠.


'전문', '전담' 이 단어는 국가고시를 거쳐 사용면허를 받은 사람들만 써야 할 것 같습니다.


보건복지부답지 않게 참 '박복한' 병원을 만들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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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큘라가 된 사람들


결국, 처음부터 내심 각오했던 방법을 시도해 볼 차례입니다.


아들 대리 처방 때면 이용하던 '지역 병원'에 물어봅니다. 못 하겠답니다.


별 수 있나요.


애꿎은 주민센터에 또 SOS를 보냈죠. 우리 아들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주시는 '그분'.


다음은 '강동구 보건소'입니다. 몇 달 전 '장애인 건강검진사업'으로 표창도 받았다는데, '그분'을 통한 소개를 부탁했죠.


그분으로부터 보건소 검진실 풍경을 자세히 들었는데, 만만치 않아 보이네요.


역시 그분답습니다. 보건소뿐 아니라 고덕동의 장애인복지관을 다녀오셨더군요. 우리나라 첫 장애인종합복지관이라는 '서울시립 장애인종합복지관'이 마침 강동에 있습니다.


저는 생각치 못했던 또 하나의 방법을 말하시네요. 장애인복지관에 특별한 도움을 부탁했답니다. '방문 채혈'.


이거다 싶더군요. 저는 수면제를 먹여놓고 기다리려 합니다. 아빠 직권으로 아들의 피 뽑는 인권을 잠시 침범할 겁니다.


때맞춰 김포의 시설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다음 주 16일인 화요일 체험 입소가 잘 준비되고 있는지 점검입니다. 그동안의 피를 찾아 헤매는 사연을 다 말했죠.


"아직 검진 못했어요. 여기저기 다녔지만 다 잘 안됐고 지금 방문 채혈에 목 매고 있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피 뽑기' 허들이 갑자기 몇 배로 높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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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ver Rains But Pours'


원래 저처럼 '운수 좋은 사람'에게는 느낌 좋은 보슬비나 잠깐의 상쾌한 소나기 같은 건 없습니다.


한 번 쏟아지면 억수 같은 폭우, 그걸로도 성에 안차면 폭풍우가 몰아친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어쩐지... 웬일로 잘 풀린다 했더니.


올겨울 2차 팬데믹 조짐이 보인다는 코로나 검사가 더해졌답니다. 자가검사키트로 안 되겠냐 했더니 안 된답니다. '반드시' 병원에서 해야 한답니다.


네, 코에 호스를 집어넣어서 하는 그 검사요. PCR로 불리는 그 검사. 길고 굵은 면봉을 코에서 목까지 집어넣어야 하는 그 검사.


'엎친 데 덮친다', '불행은 한 번에 온다' 딱 그 꼴 아닙니까?


'그냥 여기서 포기해야 하나?' 하던 순간, 김포의 귀인답게 또 희망을 배달해 줍니다.


"이렇게 하시죠. 우리 시설에서 늘 다니는 병원이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거기서 월요일에 합시다. 제가 다른 선생님과 함께 갈게요. 만 하루면 진단서 발급되니 화요일 입소에 맞출 수 있을 거예요."


'아니 그게 아니고... 그냥 병원은 입장부터가 전투인데' 이 말은 삼켰습니다.


"걱정되네요. 잘 부탁드린다는 말밖에 못 드려 송구합니다. 월요일 일찍 도착하겠습니다."


2025년 12월 15일. 월요일 아침입니다.


2주 전, 첫 김포 출정의 아침과 달리 간밤엔 잠도 잘 안 자는 아들. 재우려 애쓰다 생각하니 '차라리 밤 새면 어떠리. 미리 힘 빼놓는 게 나을지도 몰라.' 싶어 냅뒀습니다. 새벽 돼서야 잠든 지 불과 세 시간 된 아들을 간신히 깨워 집을 나섭니다.


다정한 척 팔짱 끼고 걷다가 전력 탐색 삼아 적군의 팔뚝을 만져 보니, 다시 160kg 전성기 시절의 곰뚱이로 돌아간 것 같아요. 단단하군요.


'아, 밥도 굶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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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진읍 전장(戰場)으로 출정


세상에나, 주민센터의 '그분'이 이 아침에 여기까지 배웅을 나왔어요.


"이기고 돌아오세요."


저는 천 년을 훨씬 더 뛰어넘어, 황산벌 전장으로 출정하는 계백장군이 됐습니다. 제가 전생에 저지른 짓 중 백제만은 빼놓고 팔아먹었길 바랄 뿐입니다.


김포 가는 올림픽도로. 해가 안 떠요. 빗줄기마저 떨어지네요.


비장함이 차오르는구나 싶은 것도 잠시, 병원이 보입니다. 여기는 '김포시 통진읍'. 생각했던 것보다 꽤 크고 몹시 깨끗한 전쟁터네요.


이어서 아군이 도착합니다.


과장 선생님 말고도 두 분이나 더 오셨어요. 아군의 빈약한 전력은 부모 둘뿐이지만, 힘센 UN 지원군이 세 명입니다. 오오, 원래 주인공은 마지막에 모습을 드러내는 법. 지휘관도 오셨네요. 시설의 간호과장이십니다. 한눈에 봐도 숱한 전장을 누빈 아우라가 대단한 분이죠.


비도 그쳤습니다.


굳게 닫힌 요새를 뚫어내는 전투의 시작입니다. 팔짱 낀 손에 힘을 주려는 순간, 어라? 아들이 몹시 자연스럽게 병원 정문을 들어섭니다. '이놈 봐라?' 아직 만세를 외치기엔 이르죠. 내친김에 속도전입니다.


2층의 접수 데스크까지 순조롭게 진격합니다.


접수 완료 시각은 오후 1시 40분.


계백은 떨고 있지만, 전투가 시작됐어요. 힘이 부딪히는 실전이죠.


곧 피가 튈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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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