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라리에서 딴따라까지

「품 속의 타임캡슐」 아홉 번째

by 꼭두

날라리에서 딴따라까지

「품 속의 타임캡슐」 아홉 번째


위장 '범생이'에서 공인 '날라리'로


신동우 화백의 '홍길동'과 고우영 화백의 '임꺽정'으로 한글을 깨친 어린이는, 계몽사의 '세계문학전집'과 '세계위인전집'을 읽으며 착실한 '범생이' 학생으로 자랐다죠.


고등학교 3학년이 되기 전까지는.


'늦바람'이 무섭다 했나요? '비밀의 정원 월담도박사건' 이후, 일탈의 속도는 아주 빠르게 흘러갔어요.

「포레스트 검프의 회상」 바로가기


일탈의 완성은 최종적으로 선생님들에게 포기당하는 순간이에요. 그걸 확인받던 세 '씬'이 지금도 영화처럼 떠오릅니다.


첫 번째가, 당시 사건 처리에 골몰하는 담임선생님께 '촌지(寸紙)'를 들고 찾아갔던 어머니의 회상입니다. "제가 어떻게 손써볼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며 한사코 그 봉투를 받지 않으셨대요. 어머니 등줄기가 서늘하셨다죠.


그다음이, 1학년 담임선생님의 외면.


군 출신답게 절도 있는 몸짓과 목소리로, 당시 교련과 체육 교사로서뿐 아니라, '애국조회'를 시작으로 학교의 거의 모든 공식 행사에서 늘 마이크를 잡고 진행을 도맡아 하시던 분.


1학년 때, 순위권 성적과 똘똘함으로 위장한 저를 참 이뻐하셨죠. 아마도 담배 피우다 걸린 3학년 어느 날. 교무실 앞에서 벌칙 대기 중인 저를 보더니 한 마디 하시더군요. 마치 전염병 환자라도 만난 듯한 끔찍한 표정으로.


"이 자식, 이거 아주 못쓰게 됐네."


특유의 절도 있는 목소리가 흡사 재판부의 최종 판결문 같더군요. 이후 졸업할 때까지 저를 쳐다보지도 않으셨는데, 그 외면당하던 순간엔 잠시 서운함도 스쳤었죠.


'너무 급히 포기하시는 거 아녀?'


마지막은 당시 '미친개'라는 이름으로 악명 높았던 학생주임과의 만남 씬.


학생들이 보내는 열광적 인기에 비해 성적은 별로였던 우리 학교 야구부. 한 해를 마무리 짓는 제일 큰 고교야구 대회인 '봉황대기' 토너먼트. 전날 연장전에서도 승부를 가리지 못해 서스펜디드 게임이 결정된 다음 날 아침의 동대문야구장.


학급조회를 마치자마자 교실 책상을 아예 빼버리고 모인 몇몇이 야구장에 도착했는데, 입구에서 그 미친개를 딱 맞닥뜨렸네요.


'아, 엿됐다. 하필 미친개라니. 또 정학?' 하고 있는데, 어이없다는 듯 잠시 웃더니 "야구가 그렇게 좋아?" 하고는 그냥 가버리네요? 다른 멀쩡한 친구들 선동하지 않고, 그저 문제아끼리만 움직인 게 다행이라는 표정이 역력합니다.


'난 니들 못 본 거다.' 모드.


무려 18년간 감쪽같이 범생이로 살던 저는, 그렇게 선생님들마저 포기한 공인 '날라리'가 됐습니다.


뭔가 후련했어요. 안 어울린 가면을 벗어던진 듯한 그 묘한 해방감이라니.


2_22_1_09_2.jpg '날라리'를 공인해 준 종로구 계동 골목 꼭대기의 고등학교 본관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친구'까지


고3이 돼서야 열린 공인 날라리 생활. 그거 꽤 재밌더군요.


더는 시험공부에 매달리지 않아도 되는 걸 넘어, 수업 따위 가볍게 째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학교.


당시 우리 학교에는 '14'라는 멤버십이 있었습니다. 전교에서 자격을 갖춘 단 14명으로 엄격히 관리되는. 명실상부한 학교의 '일진' 메이저리거인데, 언제부턴가 마이너리거도 못 되는 고딩 몇이 눈앞에서 알짱거리니 가소롭죠.


자질로 보나 레벨로 보나 함량 미달 주제에 감히 어디를 넘본답니까?


실제로 제 경우, 술과 담배라는 걸 배운 것도 고3이 되기 직전 겨울방학이었으니까요. "이런 거 하면 안 된다. 백해무익이거든." 하는 선배들로부터. 요즘은 어떤지 몰라도 당시로서는 아주 늦은 때에 시작한 겁니다.


그랬는데, 어느 날 '비원 월담도박사건'을 저지르고 '정학'이라는 별을 달고 나니, 조금은 대우가 달라지더군요.


게다가, 그 신흥 날라리들의 출신성분이 소위 문과의 범생이들인지라, 수시로 닥쳐올 처벌의 순간에 방패막이 정도의 이용 가치는 있겠다 싶었던지, 키링처럼 달고 다녀는 주더라고요.


2_22_1_09_6.jpg 2001년 개봉한 학원 느와르 '친구'


요즘 분들이 당시의 분위기를 느끼시려면, 이정진, 권상우의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를 보면 됩니다. 시대도 딱 저와 같아요. 1978년에 전학 온 권상우.


유오성, 장동건의 영화 '친구'가 몇 년 먼저 개봉했지만, 이 영화에서 장동건의 입학년도는 1981년이거든요. 그 친구들이 나중에 84학번의 대학생이 되는 걸로 봐서.


태어날 때부터 졸업 때까지, '대통령'이라는 단어와 '박정희'라는 단어를 같은 뜻으로 알고 살았던 고등학생들 이야기가 '말죽거리 잔혹사'. 전두환이라는 박정희 2세의 등장과 함께 고삐리가 된 학생들 이야기가 '친구'.


아무튼 당시 고등학교 일진들 풍경을 제대로 재현해 낸 한국 영화는 이 두 편입니다.


'친구'는 곽경택 감독의 체험적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말죽거리 잔혹사'는 치밀한 고증으로 만들어 낸 허구의 시나리오라는데, 제게 훨 실감나게 다가온 건 '말죽거리 잔혹사'입니다.


'이소룡 키즈'의 쌍절곤 수련과 김부선의 '학교 앞 분식집' 모습부터가 당시 고삐리로 지낸 제 기억과 어찌나 똑같던지요.


2_22_1_09_5.jpg 권위주의 시대의 억압과 폭력 속 청춘의 성장일기, 2004년 개봉 '말죽거리 잔혹사'


'집냥이'인 줄 알았던 '길냥이'


하지만 늦바람의 치명적 단점은 짧다는 겁니다. 불과 수개월 만에 학창 시절은 막을 내렸고, 제 날라리 고삐리 청춘도 함께 끝날 수밖에 없었어요.


제대로 대입 시험을 망친 저는 아버지로부터 아예 대입 원서를 못 쓰게 하는 처벌을 당했습니다. 그래도 범생이의 유산이 있었는지라, 당시 예비고사 성적표 기준으로 소위 일류대학 아래로는 입학 가능한 대학이 제법 있었는데도 말이죠.


이제 친구도 할 일도 없어진 제가 할 수 있는 건 종로학원 입학이었어요.


한 친구의 종로학원 입학시험을 대리로 쳐주고 그 집 어머니가 차려준 잔칫상을 받아먹기도 했죠. 그만큼 그 학원의 유명세는 대단했어요. 어지간한 대학교수들 뺨친다는 전설의 일타강사로만 구성됐다는 그 학원.


매해 천 명 이상의 재수생을 서울대에 합격시키던 종로학원.


유명 재수학원들이 70년대 대입 본고사의 성지 종로를 떠나 서대문 일대로 옮겨가던 시기였는데, 종로학원은 중림동의 서소문공원 바로 앞에 자리를 잡았죠. 뒤편으로는 공원과 같은 담장을 끼고, 앞편으로는 유서 깊은 중림시장을 마주한 곳.


그때부터 생겨난 종로학원의 전설이 또 있었어요. 창밖으로 공원이 보이는 반의 서울대 합격률이, 시장이 보이는 반 합격률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는 소문.


저는 공원이 보이는 반이었고 곧 그 소문의 위력을 확인하게 됩니다. 겨우내 범생이 르네상스를 흉내 내며 독실한 재수생으로 살았어요.


그런데 봄이 무르익으면서, 창밖 공원에 봄날의 따스한 햇볕과, 꽃망울부터 터져 나오는 봄꽃이 한데 어우러지는 모습만 넋 놓고 바라보는 날이 계속됐죠.


울렁이는 가슴은 분수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 여름을 버티지 못하고 터져버렸습니다. '난 이미 틀렸어.'라는 터무니없는 알리바이를 세우고는 생애 첫 가출을 감행합니다.


꼬박 일 년 전에 발현됐던 길냥이 DNA가 제대로 부활한 거죠. 도도한 반려묘는 아닐지라도 영특한 개냥이는 되는 줄 알았던 제 피가 실은 '거리의 길냥이'였던 겁니다.


일 년 만에 다시 만난 해방구. 이번엔 신분도 교복 차림 학생이 아니라 준 성인의 어린 청년.


다시 해방이닷!


2_22_1_09_3.jpg 1981년 서소문공원의 봄은 볕과 꽃으로 시작하고, 여름이면 분수를 뿜어낸다


딴따라를 떠나 '돌아온 탕아'


제 무대는 재수학원 교실이 아니라 당구장 그린필드가 됐습니다.


원래대로면 날라리의 교양과목으로 고삐리 때 거쳐야 했을 기술 습득을 뒤늦게 시작한 거죠. 늦바람 기간이 너무 짧아서 이수하지 못했던.


불과 삼 개월 만에 점수 200의 당구 중수가 됐습니다. 역시 저는 보헤미안의 자질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짜장면은 당구장 짜장면이라는 것도 이때 알게 됐죠. 역시 세상이 넓어지면 배우는 것도 많아요.


하지만 친구 집을 전전하는 '동가식 서가숙(東家食 西家宿)'도 하루이틀이지, 그 시절 가출이란 없는 돈에 더는 버틸 수 없으면 다시 집에 기어들어 가는 게 국룰입니다.


하지만 제가 누굽니까? 저는 직장을 구했어요. 바로 그 시대를 풍미하던 꿈의 직업, '디스크자키'. 그것도 버젓한 음악다방 DJ. 비록 변두리였고 임시였지만 숙식이 해결되니 살 것 같더군요.


DJ의 메이저리그는 라디오죠.


MBC '두시의 데이트 김기덕입니다. 헤헤헤~'라는 오프닝 멘트로 유명했던 김기덕. MBC '별이 빛나는 밤에'의 별밤지기 이종환과 박원웅. TBC ‘밤을 잊은 그대에게’의 황인용. 하나같이 그 시절 청소년들에게 팝의 시대를 열어준 전설들입니다.


메이저리그 못지않은 트리플A급 마이너리그가 전문 음악다방입니다. 그 이름도 유명한 종로의 호다방, 희다방, 쎄시봉이 선두였죠. 그곳의 DJ라고 하면 어디서도 VIP 대접을 받던 시절. 어지간한 문화예술인 행세도 가능한.


고딩 때부터 재수까지 제 지역 거점이었던 종로, 광화문, 서대문, 남영동에도 음악다방이 꽤 있었지만, 전성기에 접어든 DJ들의 활동 영역은 학교 앞 유명 분식점과 '고고장'이라고 불리던 디스코텍으로 넓어졌습니다.


다방에서 오빠부대를 거느리는 것도 무료해질 쯤, 좀 더 좋은 대우를 해주겠다는 분식점으로 옮겼습니다. 다방에서 오빠부대가 리퀘스트 쪽지와 함께 주는 커피와 주스가 지겨웠는데, 분식점에 가니 먹을 게 풍성해지더군요.


오므라이스에서 팥빙수까지. 천국이었죠. 가출 청년의 끼니 걱정이 완전 사라지는 가히 꿈의 일터.


급기야 이태원의 나이트클럽까지 진출했습니다. 야간 통금이 있던 시절에 밤샘 영업을 하는 해방구. 게다가 '일당제'입니다. 하루 일하면 바로 그날의 일당을 꽤 두툼하게 챙겨줍니다.


그곳은 '딴따라'를 넘어 아예 '화류계'입니다. 오빠부대 멤버의 나이가 많아진 만큼 돈도 많아요. 누구누구는 일당이 아니라, 그들이 주지 못해 안달하는 각종 선물과 현금 공세를 골라 받으며 지낸다는 루머가 무성한 신세계.


흰색의 짧은 배꼽 형광티를 입고, 긴 머리채를 훗날리며, LP판도 돌리고 몸도 돌리는 춤 실력이 제법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이건 너무 나갔다는 생각에 이어 이제 제 존엄을 지켜야겠다는 큰 결심을 하고 다시 서대문으로 돌아옵니다.


수입이 필요하기에 여전히 '디스코 DJ'였지만, 길을 건너면 바로 종로학원이 있는 곳으로.


그렇게 날라리에서 화류계까지 풍미했던 마지막 불꽃을 원 없이 불태우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집으로 돌아갔다죠.


거리의 길냥이치고는 자유에도 권태가 심했던 '돌아온 탕아'.


이제 학교 가자!


2_22_1_09_1.jpg 날라리가 졸업하던 1981년에 당시 문화재관리국에서 '사적'으로 지정한 중앙고등학교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