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기록 일곱 번째
아들의 환한 웃음
다 떠나서 집에 돌아갈 힘이 없습니다.
멀쩡했던 하늘이 잿빛으로 우중충해진다 싶더니, 빗방울이 툭툭 떨어집니다. 이번엔 제가 먼저 친구에게 전화합니다. 친구가 이리로 오고 있을지도 몰라요.
"지금 갈게. 도저히 이대로는 아들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질 자신이 없다."
지나는 사람 거의 없는 거리의 오후. 어느 한적한 골목, 아무도 없는 밥집에 둘이 앉았습니다.
"잘 보냈냐?"
"그냥 순식간에... 당했어. 생이별이란 거... 그거 사람이 할 짓 아니더라.'
시설로부터 두 번째 문자입니다. 그 과장님, 우리 부자의 이별 모습이 계속 눈에 밟히는 게 맞나 봅니다. 괜히 혼자 밖으로 나가 폰을 확인합니다.
"옷 정리 마치고 산책 나왔습니다. 아드님 기분이 아주 좋아요. 더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바로 전화 걸었습니다.
"제 아들 표정이 너무 좋네요.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제 제게 더 연락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생각하고 있을래요. 아빠한테 신경 써주실 1초라도 제 아들 살피는 데 써 주세요. 그저... 잘 부탁드립니다."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요. 가까운 곳에 방 잡고 비상대기하겠다는 거, 절대 하지 마시고 어서 집에 들어가세요. 만에 하나, 아버님 말씀대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 새벽에는 저희 전화 절대 안 드립니다."
"그런데 말씀드렸듯... 이미 그래본 경험이 있는지라..."
"그건 그분들이 미숙해서였을 겁니다. 저희를 믿으세요."
기다리다 걱정됐는지 따라 나온 친구에게 들뜬 소리로 말합니다.
"야, 배고프다. 들어가서 먹자!"
So long, My son
갑자기 허기가 밀려옵니다. 생각해 보니, 어제부터 하루를 꼬박 새우며 아들의 쉼 없는 무박 2일 만찬을 원 없이 차려줬지만, 전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았네요.
국물이 자작한 수육입니다. 막 도착한 아들의 사진을 자랑하며, 늦었지만 소주잔에 사이다 가득 채워 '건배'를 외친 후 정신없이 집어 먹습니다.
말없이 지켜보던 친구가 면 사리도 시켜줍니다. 그것도 아낌없이 먹었어요. 꾸역꾸역 먹다 보니 '막 생이별하고 왔다는 아빠가 이리 잘 먹어도 되나?' 싶군요.
뭐, 아들도 이해해 주겠죠. 게다가 전 지금 다리만 건너면 아들을 볼 수 있는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친구가 일터로 가야 할 시간이 훌쩍 지났습니다. 친구의 일은 오후에 시작해서 아주 늦은 밤까지입니다.
친구가 지하철역 앞까지 배웅합니다. 아직 불안한 시선을 제게 거두지 못하더니 떠났습니다.
어느새 어둑해진 역 앞 광장에서 선뜻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홀로 한참을 서성이다 구석에 앉아 담배 두 대를 연거푸 태웁니다. 이제 정말 아들과 멀어져야 합니다.
일산에서 서울 끄트머리 강동까지는 아주 먼 거리입니다. 걸리는 시간으로만 따진다면 서울에서 천안 정도?
그 긴 시간 동안, 저는 김포로부터 도착한 아들의 두 번째 사진. 환하게 웃는 아들의 모습만 보고 또 봤다지요.
"So Long, My Son."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더니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14개가 '108계단'은 되는 느낌입니다.
이럴 수가. 현관문을 잠그지 않아놓은 건 잘한 일인데, 집에 조명도 난방도 죄다 꺼놓고 나갔었네요. 칠흑같이 어둡고 썰렁한 곳에 불을 밝히니 그야말로 적막강산입니다.
빈집.
어느새 잊었습니다.
불과 10개월 전, 올 1월. 고향마을 앞산에 먼저 몸을 누이신 아버지 곁에, 30년 만에 어머니를 모셔드리고 돌아오던 날, 그 빈집을. 너무 외로워서 무서웠던 빈집.
그나마 그때는 미리부터 빈집이 너무 무서웠기에 잡아끄는 제 손을 놓지 못한 인척들이 빈집의 첫 밤을 함께 해 주었고,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날이 돼서야 '한 지붕 세 가족'이 두 가족이 됐단 걸 실감했는데, 이제 그 아들마저 떠난 오늘은 결국 '한 지붕 한 가족'. 아, 이젠 '가족'이 없군요. 그냥 '지붕 아래 한 명'.
말 그대로 '독거노인'이 완성된 첫날입니다.
몇 시간 후, 또는 며칠 후에 아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게 되더라도, 지금은 그렇습니다. 도대체 제가 바라는 게 아들과의 이별인지, 재회인지 제대로 뒤죽박죽입니다. 어쩌자는 건지 저도 모를 일입니다.
온 방의 조명을 켜고 난방 온도도 올리고 음악도 틀었습니다.
10개월 전 빈집에선 제가 있든 없든 24시간 온 방의 불을 켜고 음악을 틀어놓고 한 달을 보낸 후에야, 겨우 불을 끄고 잠들 수 있었습니다. 특히 밖에 나갔다 다시 올 때, 조명과 음악이 미리부터 있어야 안심하고 들어설 수 있었죠.
이번엔 얼마나 걸릴까요?
첫날의 느낌으로는 외로움이 비교할 수 없이 더 크기에, 지금으로선 잘 모르겠네요. 엄니한테는 한없이 송구합니다만 이해해 주시리라 믿어요. 옛말 좋아하시는 엄니? 이래서 그런 말이 있잖아요?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
'남겨진 것'과 '사라진 것'
첫 밤이 지났습니다. 첫 새벽도 지났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 밝았습니다.
아무 연락이 없습니다.
아들 없는 첫 주말이 됐습니다.
새삼 짚어보니 지난 26년간 아들 없는 주말 밤은 처음입니다. 아들이 주간보호센터에서 지내온 최근 6년. 주중에는 센터에서 자더라도, 주말이면 아빠 품에서 잠을 자던 아들입니다.
실컷 먹고 자고 싸고 아빠도 괴롭히며 주말을 보내야, 그 힘으로 또 한 주를 지낼 수 있었던 아들입니다.
아무 연락이 없습니다.
혼자 보내는 주말의 어색함을 견뎌내기가 무척 힘듭니다. 뭐라도 일거리가 있으면 좋겠는데 할 일이 없습니다. 세탁기가 멈춘 지 오래고, 설거지도 할 게 없어요. 욕실도 조용합니다.
당연히 세탁세제도, 주방용품도, 욕실용품도 그대로입니다. 마지막 만찬에 다 남김없이 털어서 차려냈다고 생각했는데, 라면 한 박스, 생수 세 팩, 튀김가루와 부침가루가 각 두 봉씩 덩그러니 남아 있습니다.
무엇보다 전투식량으로 담가놓았던 마지막 종가 김장김치가 여전히 김치냉장고 한가득이네요. 의사의 저염식 오더에 따르면, 어차피 제게는 '김치'가 금지된 먹거리입니다.
'이제 저걸 어쩌지?'
'남겨진 것들'이 이렇게 잔뜩한 데, 아들과 함께 '사라진 것들'은 제가 습관처럼 26년간 혼자 해오던 일거리입니다.
'그게 왜 그리 힘들었을까?'
생이별이 정말 현실로?
'무소식을 희소식'으로 생각하겠다던 아빠.
아빠에게 신경 써줄 1초라도 아들을 위해 써달라고 큰소리쳤었기에 차마 연락은 하지 못하고, 그동안 한 일이라곤 귤 10박스를 시설로 보낸 것뿐입니다.
하는 말마다 멋있고 믿음직한 그곳 선생님들이 정말 고마웠어요. '마더 테레사와 신부님들'. 어떻게든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다고 '그 일산친구'에게 고민을 말했죠.
종종 하는 일이라곤 하는데, 그 친구가 새벽에 가락경매시장을 직접 들러 고른 후 퀵 화물트럭으로 보내줬습니다. 생색은 저보고 내라는 말과 함께. 요즘 그 친구를 생각하면, 이 정도로 배려가 깊고 고마운 사람이 아직도 내게 남아 있었구나 싶을 따름이지요.
강직함마저 갖춘 신부님들. 내심 한 박스씩 가져가시길 바랐지만, 입소자들이 모두 맛있게 함께 나눠 먹었다 하더군요. 저는, 순식간에 귤 한 박스를 앉은 자리에서 해치우는 아들이 그걸 먹으며 혹 아빠를 떠올렸으면 어쩌나 그 걱정만 했답니다.
'아들아, 정말 아빠 잊은 거 맞지?'
아들이 떠난 지 만 한 주가 지났고, 이제 요일이 바뀐 8일째입니다.
아무 연락이 없습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은 개뿔. 더는 참지 못하고 김포 과장님께 전화합니다.
"일 주일이 지났습니다. 아직도 아무 문제가 없는 건가요? 아들이 혹 아빠를 찾지는 않고요?"
"사실 저도 아빠 없는 주말이 처음이란 걸 알기에 걱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대 이상으로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처음 며칠은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좀 불규칙했는데 지금은 아주 안정됐어요. 우려처럼 아빠도 찾지 않고요."
스치는 아쉬움이나 서운함은 사치일 따름이죠. 대견함이 모든 걸 덮습니다.
우리 아들, 참 장하네요.
과연 제 간절한 소망처럼, 이대로 생이별이 현실이 될 수 있을까요?
그때까지는 분명 그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