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 속의 타임캡슐」 열두 번째
'빅 브라더'가 열어준 캠퍼스 화류계
잠깐 짚어보죠.
지금 저는, 학생운동의 절정기라던 1980년대에, 일찌감치 포섭된 '꿘'의 투사로 '머그샷'을 찍어야 했던 사연을 적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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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정원제'가 잉태한 '꿘'과의 접속」 바로가기
위 글에서 미리 말씀드린 것처럼, 1982년 갓 입학한 개강 첫날부터 '졸업정원제'로 꿘에 접속시키더니,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불과 한 달 후, 아예 전담 형사까지 배정해서 학적이 있는 한 지속 감시 대상의 '요주의 인물'로 만들어 주십니다.
누가요? 단체로 군복을 차려입고 이 나라를 거저 접수한 '빅 브라더'가요. 연극 '대머리 여가수'만큼 부조리한 '대머리 대통령'.
누구를? 불과 수개월 전까지 이태원클럽에서 배꼽형광티 입고 디스코를 추던 '딴따라DJ' 출신의 신입생을요. 졸지에, '버나드 쇼'가 그토록 축복했던 '20대 혁명가'가 된 '날라리'.
하지만, 혁명가는 개뿔이고 빅 브라더가 그렇게 밀어줘서 키운 인물은 고작 종군 기자 수준의 '학생운동 야사 이야기꾼' 정도였다니까요. 오죽하면 제가 영화 '더 킹'의 조인성만큼 억울하다고 했겠습니까?
돌이켜보면 아주 많이 억울하진 않네요.
부조리한 대통령 덕분에 누린 것도 많거든요.
종군 기자의 교양과정을 거쳐, 선배 동기들은 다 떠나고 없는 1988년 가을 노천극장에서, 후배들과 함께 극작 연출로 살아남는 전공과정까지 밟을 수 있었으니까요.
딴따라 출신답게 캠퍼스를 화류계 무대 삼아 놀기도 했어요.
1984년 5월 '학교창립 100주년 무악축전'에서는 운 좋게 '상쇠'를 맡아, 100명으로 꾸린 풍물패를 끌고 캠퍼스 곳곳을 누비는 길놀이를 하기도 했답니다.
그런데 따져 보니, 100주년은 85년인 것 같은데 새삼 사진으로 다시 보면서 왜 84년이지? 싶긴 하네요. 99주년 상쇠였나? 뭐, 암튼 그 쇠나 저 쇠나 그게 그거고.
때로는 강사로, 혹은 가수로 대강당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어요.
1983년 쯤 대강당에서 '무악창작가요제'라는 게 열렸습니다.
'민중의 아버지' 김흥겸
무악방송국 YBS가 주최하는 '진짜' 가수들 가요제에서 이름만 가져온 가요무대.
제가 참여했던 그 무대는 우리 학교 학생들이 쓴 노래로만 채우는 대학가의 운동가요 발표회 정도랄까요?
그때 무대에 올랐던 학생 중 한 명이 '민중의 아버지' 작시(作詩), 작곡가인 신학과 81학번 김흥겸입니다. 1982년 학교 축제에서 '민중의 예수'라는 이름의 거리 현장극이 있었는데, 그때 예수 역을 맡았죠.
당시 신입생인 제 눈에 그는 너무나 강렬했어요.
학교 교문에서부터 본관 앞까지 교정 전역을 골고다 언덕으로 만들며 처연하게 걷는데, 그냥 예수였어요. 큰 키에 야윈 몸, 긴 머리카락 위로 가시면류관을 쓰고 큰 십자가를 둘러맨 그의 모습은 그냥 딱 재림 예수였다니까요.
그때 울려 퍼진 연주가 그가 직접 쓴 '민중의 아버지'였던 것 같습니다.
그 공연 그 노래 그대로, 졸업 후 빈민운동의 길을 걷다가 1997년 불과 36세의 나이에 암으로 요절하고 말았죠.
'노래를 쓴 학생이 직접 부른다.'는 원칙에 따라 그분이 무대로 오르는데 여전하더군요. 낡고 긴 검정 코트를 입고, 길고 부스스한 머리로 얼굴이 다 가려진 채 채 피아노 앞에 앉아 '민중의 아버지'를 부르더라고요.
'아우라'란 단어로도 표현이 안 되는 그야말로 '간지' 넘치는 분이었는데...
이어서 제가 '타는 목마름으로'를 불렀어요. 곡을 쓴 사람은 우리 102호 서클 선배였는데 당시 수배 중이어서 올 수 없었고, '그럴 땐 1호 전수자가 부른다.'는 부칙에 따라 제가 무대에 올랐죠.
공부요? 그거까지 할 시간은 없었어요. 하하.
숨 돌릴 틈 없었던 1학년 동안 수업에 들어간 기억이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어요. '학사경고'를 두 번 연거푸 찍었죠.
제적 전야의 다음 학기가 됐어요. 위기감 속에 학점 전쟁을 전개하자, 뜻밖에도 '성적장학금'까지 주더군요. 또 한 번 '환골탈태(換骨奪胎)'한 날라리.
졸업하기 전 마지막 몇 학기 동안에는 등록금 거의 전액을 주는 장학금도 받았어요. '민주장학금'이라고 이름 붙었던 특별장학금. 종군 기자 주라고 만든 건 아닐 텐데, 워낙 설치고 다니니 아마 꿘 전사와 헷갈렸나 봅니다.
문제는 이렇게 아주 여러 번 장학금을 받았지만, 집에서는 그걸 전혀 몰랐다는 거죠. 두 분 다 고향 마을로 돌아가실 때까지 아들을, 종목을 바꾸긴 했지만 여전히 춤추고 노래하는 날라리로 기억하셨을 뿐이죠.
달라진 게 있다면 연기 연출까지 추가했다는 것과, 뜬금없이 전담 정보과 형사가 수시로 집에 찾아오는 희한한 날라리라는 것 정도.
당시 장학금을 받는 학기 초엔 제 술자리가 꽤나 오랫동안 푸짐했다죠.
엄니, 그리고 아부지. 아주 늦은 고백 죄송해요.
내가 '지하대학(地下大學)' 신도라고?
그야말로 우연히 접속한 대강당 102호.
Fedra의 덫에 걸려 어느덧 식구가 되고 보니 그것도 나름 괜찮더군요. 술이 있잖아요. '세미나'라는 걸 매주 하는데 재미없어도 버티다 보면 '뒤풀이'는 반드시 Fedra 막걸리니까요.
맛? 그저 그래요. 시큼한 밀막걸리에 투박한 간장양념 끼얹은 생두부 한 접시. 식구가 많으면 특별히 양푼 가득 심심한 김치찌개 한 냄비. 찬이라곤 오직, 두 점은 먹기 힘든 짜디 짠 김치 한 종지. 끝.
세미나는 빠지고 Fedra만 가도 아무도 뭐라 안 합니다. 여기서 보니 더 반갑다며 오히려 좋아하죠.
세미나가 없어도 마찬가지예요.
어느 날은 석양이 너무 벅차서, 다음 날은 왠지 글루미해서, 그다음 날은 아침부터 비가 와서, 아침부터 문 닫을 때까지 매일 Fedra에 죽치고 앉아 있다 보면 저절로 꿘 종군 기자가 됩니다.
Fedra는 우리 서클뿐 아니라 간판에 '연구' 들어가는 서클들 모두의 아지트거든요. 평화문제연구회, 인간걱정연구회, 우리문화연구회... 기타등등 기타등등.
우리 102호도 이듬해부터 '현대문화연구회'로 간판을 바꿨죠. 제가 102호에 처음 접속하던 날, 답을 얼버무리던 단어 '방언'을 빼고 '민속'도 '현대문화'로 진화시켜서.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대신 귀신 직접 보여주는 단어로 바꿨달까요?
'말뚝이'처럼 Fedra를 지키고 있다 보면, 온갖 신선한 꿘 소식이 다 들려올 뿐 아니라, 드나드는 군상들 모습 보면 오늘은 뭐했구나 대략 보입니다.
새 학기 초 어느 날, 조선일보의 특집 기사를 보게 돼요. 이름하여 '지하대학' 기획기사 시리즈.
"오호라~ 우리를 보고 '이념서클'이라고 하는구나. 근데 웬 '지하대학?' 우리 서클룸 1층인데? 아지트 Fedra조차 대로변 1층이고. 오, 지하대학생들이 읽는다는 책이 우리가 세미나 하던 책 맞네. MT, 농활. 이거 하는 것도 맞고."
그래서 뭐 어쩌라고? 웃기는 얘기죠.
일제강점기, 천황폐하께 신문 1면을 통해 충성을 맹세하던 조선일보. 1979년, 전두환이 탱크를 몰고 나타나자, 역시 신문 1면을 통해 '용비어천가'를 읊어대기 시작한 신문입니다. 낯부끄러운 줄 알아야 할 텐데 지금까지 사과보도도 정정보도도 없네요.
'대머리 대통령' 하고 보니 탈모인 분들께 송구하고요. '군바리 대통령' 하자니 이건 군인 분들께 실례네요. 그냥 실명으로 할게요. 저도 살면서 사이버세상에 처음으로 실명과 사진을 깐 지금 눈에 뵈는 게 없는지라 그게 맞겠어요.
지들도 뭐 어쩌겠단 건 아닙니다. 그저 민심 자극용 편 가르기죠. 전 그때나 지금이나, 글이나 작품이나 딱 웃긴 게 뭐냐면요. 우중충한 단어와 분위기로 멀쩡한 다큐를 공포영화로 만드는 겁니다.
지하대학 기사를 보면 뭔 다단계 교육현장 아니면 신천지 포교현장 잠입 기사처럼 보이지 않나요?
사실을 적당히 깔아놓고 이 나라 전통 유산인 '빨갱이 콤플렉스'와 당시 현대의 미신 셋 중 하나라는 '활자의 미신'을 세게 버무리는 상투적인 여론 만들기일 뿐이죠.
그래도 아직 신참 종군 기자로서 궁금하기는 하더군요. 내가 반푼이 칠삭둥이란 말이지? 계속 술만 퍼마시고 있어도 저절로 신천지 신도처럼 된다는 건가?
4.19를 1주일 정도 앞둔 어느 날 중앙도서관 앞 마당에서 버스를 발견합니다. 앞 유리창에 '수유리 4.19 묘역 참배'라 쓰여있고, 물어보니 4.19 선배 영령에게 추모 참배를 하고 싶은 누구나 타면 데려다준다네요.
호기심 반, 탐구심 반의 기분으로 올라탔습니다. 서클룸 있는 대강당이 가깝지만, 딱히 누구한테 말도 하지 않고요. 이번 주에 4.19 세미나를 한다고 하던데, 선배도 누구도 없이 그냥 혼자 가서 현장학습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세미나 전에, '지하대학 이념서클' 선배의 지도나 도움 없이 혼자 느끼며 알아보고 싶어서. 하하.
생애(生涯) 첫 기습연행
참 멀어요.
그날 뒤로 이곳을 다시 찾진 않다가, 불과 한 달 전 제 아들 살길 찾겠다며 이곳에 있는 '국립재활원'의 '장애인 전담 건강검진센터'를 찾아갔었죠. 무려 40년이 지나.
82년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르더군요. 전 그날, 살면서 처음으로 '연행'이란 걸 당하게 되거든요.
엄근진 분위기 속에 비교적 차분한 참배가 이어집니다.
제가 세상에 없던 22년 전 1960년 봄, 선배 학생들이 주도했다는 '4.19 혁명'. '늙은 민간 독재자 이승만'을 끌어내렸지만, 불과 1년 후 '젊은 군인 독재자 박정희'가 몰고 나온 탱크에 짓밟히며 미완으로 끝나버린 혁명.
제가 태어난 날인 1962년 12월 26일 본인이 공포한 개정헌법으로 집권을 시작한 박정희. 웃긴 건 4.19를 밟아버린 그가, 이 헌법전문 첫 줄에 '4.19 의거'란 표현으로 그날을 처음 박아 넣은 장본인이라는 사실.
혼자 온 저는 딱히 이야기 나눌 사람도 없기에 그렇게 사실들을 짚어가며 자습만 하고 있는데, 근처에서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합니다. 누가 주도를 하는 건 아니고 하나둘 시작하면 어느새 모두가 따라 부르는.
요즘 정부 공식행사인 '4.19 혁명 기념식'에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지만 당시엔 그 노래는 안 만들어졌고요.
처음엔 '눈이 부시네 저기' 진달래, 그다음은 '긴 밤 지새우고' 아침이슬 정도를 부르더니, 점점 호흡 가쁜 노래들로 바뀝니다. '우리 승리하리라' 정의가, '낮은 어둡고 밤은 길어' 전진가.
점점 노랫소리가 빨라지던 그 순간, 학생들을 둘러싸고 있던 훨씬 더 많은 수의 '청커버' 무리가 순식간에 묘역을 덮쳤습니다.
청커버들은 진청색 기동복 위에 청커버 보호복을 입은 시위 진압 전경, 의경들입니다. 말하자면 '백골단'의 전신. 흰색 화이버를 쓰고 다녀 '백골단'이라 불리던 진압 경찰은 아직 없었어요.
그래도 4.19 전야의 묘역인데 허를 찔린 채 아수라장이 된 현장 속 젊은 학생 참배객들. 저도 상상조차 못 하고 있었어요. 경건한 묘역에서 그리 폭력적으로 기습진압을 할 줄은.
전 지하대학생은커녕 그 노래들 반도 모르는 어리바리 신입생이었고, '이런 게 시위인가?' '구호를 외치는 것도 아닌데...' 하며 깍두기처럼 앉아 있었을 뿐이거든요.
도망갈 엄두도 못 내고 그대로 붙잡혔습니다. 순식간에 버스 안으로 집어 던지더니 "야, 커튼 쳐!" "머리 박아, 이 새끼들아!" 소리 지르곤, 그대로 등에 전투화 신은 발을 찍어버립니다. 숨이 턱 막혀요.
얼마나 맞았을까? 안경은 깨지고 얼굴에 피는 흐르고 날라리 테리우스 몰골이 말이 아닙니다. 처음 저를 집어던진 고참급 청커버가 나를 보더니 다가옵니다. 지가 보기에도 좀 덜 떨어져 보였나 봐요.
"야, 넌 뭐야? 몇 학년?"
"1학년인데요."
"허 참. 갓 입학한 놈이 뭘 안다고 여길 다... 이 피는 뭐야? 아이고, 누가 그랬쩌?"
'니가 그랬잖아, 이 색히야.' 속으로만.
10대 정도의 버스에 2백여 명 정도가 붙잡혔어요. 참배객들이 1,000명 정도였으니 무려 1/5이 붙잡힌 거죠. 허허벌판 뙤약볕 아래 묘비뿐이라 딱히 도망갈 곳도 없었죠. 이날 아마도 뭔가 작정한 작전 같아요. 딱히 요구사항이 담긴 구호 같은 것도 없었거든요. 아님 실적이 필요했거나.
수유리 묘역 관할 성북서로 가더군요. 그 고참 청커버가 오더니 물수건으로 제 얼굴 피를 대충 닦아주며 속삭입니다.
"야, 너 연대라면서. 나도 거기 소속야. 이따 같이 갈 건데, 넌 그냥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 알았찌?"
'진짜 몰라, 이 십탱아.' 이번에도 복화술(腹話術)로.
몇 시간이나 냅두더니 죄다 끌고 나가 일일이 이름을 부르면서 버스마다 나누어 태웁니다. 다시 출발. 이번엔 소속 대학 관할 서대문서에 도착했습니다.
조금 정신이 수습된 뒤라 버스를 내리면서 둘러보니, 수유리에서 연행된 2백여 명 중 서대문서 관할 학생은 불과 6명입니다. 서에 들어서는데 '정보과'라는 문패가 보이네요.
가슴이 웅장해집니다.
슬기로운 독립투사
심문이 시작됩니다.
'아, 이런 게 취조구나. 난 독립투사다. 이자들은 일제의 조선앞잡이 고등계 형사들이다.' 비장하게 마음을 다집니다.
"넌 어디 소속야?"
"연대요."
"그거 말고! 너 소속된 이념서클이 어디야?"
"서클요? 저 AFKN 들긴 했는데 잘 안 나가요."
"아니 뭐... 연구회 이런 거 안 해?"
"그게 뭔데요?"
뭔가 뜻대로 안 풀린다는 표정.
"너 감명 깊게 읽은 책이 뭐더라?"
"음... '죄와 벌' 정도? '그리스로마신화'도 좋지만 역시 실존주의가 최고죠. 도스토옙스키는 그것 말고도..."
"야야, 그만! 너 '난쏘공' 봤지. 그게 더 재밌잖아? '해방전후사의 인식' 정도는 진작 봤을 테고."
'이놈 보게. 약자를 쓰네. 제법인걸.' 싶습니다.
"그게 뭐죠?"
점점 짜증이 묻어나는 표정.
"이 자식이 보자 보자 하니 정말. 너 오늘 거긴 왜 갔고? 노래도 불렀잖아? 누가 시켰어?"
쓰는 단어마다 딱 조선일보 '지하대학' 기획기사 쓴 기자하고 똑같군요. 한 편인가 봅니다.
"시키다뇨? 형사님. 저 이제 학교 들어와 갓 한 달 된 신입생이에요. 학교 안마당에 거기 데려다준다는 버스 있기에 그냥 타고 간 거뿐이고요. 그 노래들도 '아침이슬' 말고는 아는 것도 하나 없어서 전 부를 수도 없었어요. 저 빨리 집에 보내주세요."
제가 생각해도 전 정말 슬기로운 독립투사입니다.
반대로 이자는 폭발하네요. 급기야 소리를 지릅니다. 누가 들으면 지금 지가 고문을 당하고 있는 줄 알겠어요.
"야, 이 새끼 누가 잡아 왔어? 뭐 말이 안 통하네. 아 성질 뻗쳐."
다음날, 아침 해가 뜨고서야 저부터 풀어주더군요. 집에는 또 술 처먹고 어디 쓰러져 잠든 걸로 남는 게 좋겠고, 왠지 그리웠던 Fedra로 갔어요.
또 다음날, 대강당 언덕에서 그 청커버를 만나요. 386들의 지겨운 꿘 스토리에 단골로 등장하는 학교 잔디밭 사복경찰이 내 눈 바로 앞에도 등장하다니.
불과 이틀 전 나를 사정없는 발길질로 찍어대던 그 청커버가 말쑥한 대학생 차림으로 잔디 위에 앉아 있다가 저를 보고는 반갑게 손을 흔드는데, 정말 등줄기가 서늘해지면서 소름이 쫙 끼치더군요. 손에 전공책 몇 권까지 들고 있어요.
끝이 아니었어요. 며칠 후 교문을 나서는데 나이 지긋한 중년 신사가 다가오더니 저를 데리고 학교 앞 호사스러운 일식집으로 모셔갑니다. 단둘이 정갈한 다다미방에 앉았는데 잠시 후 생전 처음 보는 쓰키다시와 회가 줄지어 입장합니다.
독립투사답게 외면하고 싶었지만 생전 처음 보는 일식 만찬은 참 황홀한 맛이었어요. 전 봤어요. 맛있게 대접받고 있는 저를 곁눈으로 슬쩍 본 여종업원이 모든 사연 다 안다는 듯 웃고 있는걸.
지금도 '잡새'라고 부르지만 그땐 '곰'이라고도 부르던 사람들. 서대문서 정보과 소속의 그 늙은 곰은 이미 제 집을 다녀온 제 전담 형사였어요. 새로 배정받았답니다. 졸업하는 날까지 친하게 지내자더군요.
'이 사람들 작정하고 실수하는구나.' 싶긴 한데 '그럼 졸업 때까지 이 일식 만찬이 보장된단 말이지?' 생각이 먼저 들더군요.
꿘 주요 인사들을 상대로 그의 동정이나 조직 동향, 시위 정보를 사전에 얻는 게 목적인 사람들. 세상은 기브 앤 테이크. 그들도 회 접시뿐 아니라 주는 게 있어요. 슬쩍 말해주는 자기들의 현재 대응전략, 그러니 뭐를 조심해라 그런 거.
하지만 그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전 꿘 주요 인사가 아닌 걸요. 전 받기만 하고 주는 건 없기를 2년 정도 했나?
그동안 이 곰은 저보다 우리 엄니와 더 친해지더니 나중엔 우리 집에 잡다한 민원이 생기면 그걸 처리해 주고 있더라고요. 친지 중 누군가 싸우다 파출소라도 가면 척척 해결해 주곤 하는.
아들을 전담 형사까지 거느린 무슨 학생운동 꿘의 거물로 착각했던 엄니는 곧 특유의 친화력으로 곰과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가 됐고, 나중엔 숫제 사설 경호원으로 부리고 있더란 말이죠.
저한테서 나오는 고급 정보도 없고 보아하니 딴따라 짓 말고는 특별히 하는 것도 없어 보이는 데다, 뭔가 자기 꼴이 이상해졌다 생각했는지 언제부턴가 나타나지 않더군요.
게다가 그때쯤엔 이미 학원자율화 시대라 이전처럼 시위 주동을 해도 잘 잡아가 주지도 않는 지경까지 온 무렵이죠.
암튼 그렇게 저는 빅 브라더에 의해 꿘 투사, 아니 20대 혁명가로 입학 한 달 만에 낙점되어 키워졌지만, 그들의 큰 기대에 못 미치며 꿘의 현장 통신원 내지 종군 기자를 겸하는 신종 캠퍼스 딴따라로 학교를 마칩니다.
작게는 학교에서 콜라병이 사라진 비하인드부터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제가 꿘의 야사나 야담을 우리 가문의 마지막 기록이 될 세 세대 회고록에서 풀 일은 아마 없을 거라고 말씀드렸었죠?
아주아주 혹시라도 듣고 싶어 하는 분이 나타나 제게 청하는 일이 생긴다면, 그때쯤 제 피터 팬 살길도 찾았고, 그러고도 제가 멀쩡히 살아있다면 이 회고록의 외전이나 번외 정도로 풀어낼 일이 있을지도요.
지금은 제가 살아온 날들을 기록하는 데에 배경화면으로 딸려온 꿘 스케치는 지금까지 세 화(話)의 대학 시절로 마칠게요. 아, 졸업 전야의 마지막 극(劇) 스토리는 기록해야죠. 그때 딸려올 꿘 스케치가 또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여기까지, 제게는 생의 중요한 페이지로 남은 젊은 청년의 기록을 마칩니다.
"엄니, 아들의 젊은 날은 글로도 끝났어. 이젠 날라리 아냐."
그럼 그만하라십니다.
"아직 좀 남았어. 내게 남은 업보, 지금까진 못 찾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