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겨울 첫 번째
'마침표'로 끝내기가 초라해서
'말없음표'를 '마침표'로 끝내려다 억울해졌죠.
2026년 1월 13일. 저는 현실세계 속 마지막 승부라고 생각했기에, 간절하게 매달려온 전쟁에서 또 졌습니다. 세상은 또 한 번 저와 제 아들을 거절했어요.
그들이 요구한 대로 포기로 답하려다가, 제가 졌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서 이틀을 버텼습니다. 이렇게 지고 만다는 게 싫었어요. 너무 초라한 마침표 같아서.
말도 생각도 빼앗겼지만, 글이란 게 남아 있더군요. 한 화(話)의 글로 지난 한 달간 겪어낸 전쟁의 시작을 복기했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패배를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패배를 받아들이고 나서야, 빼앗겼던 생각을 되찾았죠.
알고 싶어졌어요.
제 간절함은, 영화에서나 어울릴 법한 실은 어리석은 시도였을까? 천 개가 넘는다는 중증장애인 거주시설 중 제 아들이 살 집이 한 곳도 없다는 게 사실일까?
여명 넘긴 말기 아빠와 그의 아들이 '제발 살려주세요.' 지르는 비명 소리를 이 나라가 외면하는 이유가 뭘까? 무능해서? 비정해서? 세상이 정말 그토록 성악(性惡)하다고?
아빠가 체험적으로 결론 내린, 소망의 승리를 가름할 기준이 있었습니다.
천 개라는 숫자가 상징하고, 아빠 눈에는 그만하면 됐다 싶은 시설을 가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무기는 충분합니다. 이미 지닌 좋은 하드웨어를 가동할 훌륭한 소프트웨어만 있으면 됩니다.
아빠 생각엔 그게 바로 능력 있는 선생의 '의지'입니다. 중증장애인을 힘이 되는 한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 당연히 부모 수준까지 요구하진 않습니다. 부모가 아니니까요. 더는 욕심 부릴 생각 없다는 말입니다.
그곳에서 살게만 해주시면 됩니다. 거기까지만 감당해 주세요. 이 혹독한 짐, 조금만 덜어 함께 져 주시면 안 됩니까?
복기(復棋)를 시작했지만
한 건물 45명이라는 중증장애인 숙박 정원에 비해 2명이라는 당직 선생 수가 마음에 걸리긴 합니다. 교사 한 명당 22.5명의 중증장애인 숙박을 보살펴야 하니까요. 그나마 2명인 이유도 입소 생활자가 여자, 남자가 함께 있기에 교사도 성별 담당을 나누기 때문입니다. 단 한 명인 곳도 허다합니다.
이게 이 나라 표준입니다. 간판에 '중증장애인 거주시설'이라고 적인 곳들의 표준.
장애인과 직접 몸을 부대끼는 최일선 교사들에게 지급되는 보상도 형편없나 봅니다. 네, 급여 말입니다. 보너스나 상금 말고요. 중증장애인을 위한 전문시설이라면서, 관리하기 편한 50대 이상의 무기력한 치매나 지적장애 노인의 요양 시설이 되고 마는 사연입니다.
그런데, 저 같아도 그러겠습니다.
이 나라에는 비장애인 분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장애인이 있습니다. 시설 유지를 위한 T/O 채우기는 일도 아닌데, 뭐 하러 관리하기 힘든 혈기 왕성한 2~30대의 젊은 자폐 중증장애인을 받아주고 재워줘야 합니까? 보상도 형편없고 표창장을 주는 것도 아닌데요.
성모(聖母)든 대부(代父)든 지금은 영화 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마더 테레사도 페스탈로치도 현실에는 없다는 거죠. 있어봐야 한 세기에 한 명 나올까 말까일 텐데, 저는 기다릴 시간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제가 정한 건 아니고, 전지전능한 하늘님이 그리 정하셨어요. 제게도 자업자득의 업보는 있습니다만.
현실 속 페스탈로치를 만들 수 있는 게 정책이고, 정책을 만드는 게 정치라고 합니다. '삶이 곧 정치다.'라는 말이 실감 나네요.
저는 저를 도와주겠다고 찾아온 복지국가의 말단 공무원분들, 그리고 살길 찾는 고단한 여정에서 만났던 자칭 전문가분들께 위에 적은 글과 똑같이 말했습니다. 애꿎은 하소연 끝에는 덧붙이는 말도 잊지 않았습니다.
"끝내 살길 찾지 못한다면 제 선택은 하나밖에 안 남겠죠. 하지만, 저도 아들도 절대로 그냥 가진 않을 겁니다."
"우리 부자 같은 사람이 더는 생기지 않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우리 부자의 비명을 못 들은 척하고, 안 봐도 될 꼴 괜히 봤다며 외면하고, 들어야 했고 봐야 했지만 '나는 못 한다!'고 거절했던 모든 사람 고발하고 갈 겁니다. 당연히, 구조적으로 그렇게 만든 힘 있는 사람들이 최우선 대상입니다."
"'당신들이 우리 부자를 막다른 절벽으로 몰아 죽였다!'고. '살인자는 내가 아니라 공동정범인 당신들!'이라고. 제 마지막 남은 힘을 다 쏟아서. 최대한 큰 소리로."
웬 자해 테러 협박질이냐고요? 시간 많던 지금까지는 뭐 하다 이제 와서 이러냐고요? 중증자폐 아들 혼자 키우느라 틈을 낼 수가 없었어요... 하기에는 변명이 맞네요. 네, 저는 잘못했고 지금 그 대가를 치르는 중입니다.
하지만, 너무 혹독하다는 생각이 가득합니다.
한때 나치를 지지했다는 독일 목사 '마르틴 니묄러(Martin Niemöller)'가 남긴 유명한 어록이 있죠.
동조했든 방조했든 나치와 똑같은 짓을 한 모두에게 하는 말입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죠.
'정치는 더러운 것이니 그들이 독점하게 두고, 우리는 얼씬도 하지 말자. 정치는 더러운 그들 몫. 비평과 냉소는 깨끗한 우리 몫.'
저는 지금 그 벌을 받고 있습니다.
거기에 더해, 이 글을 적고 있는 2월 16일 현재, 저는 그동안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엄청나고 어이없는 후폭풍을 겪고 있습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저를 좌절시켰던 김포의 그 시설로부터.
김포의 불가 통지가 예정된 것이었나 봅니다. '장애인의 꿈은 탈시설 자립'이라는 정책 화두가 갈길 바쁜 저를 덮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결과가 곧 나올 겁니다. 그것도 꼭 기록으로 보고드리겠습니다.
영화는 가상현실, 이곳은 실제현실
가장 고전적인 살길로 알려졌던 '시설 찾기'였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다른 길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빠의 간절함은 영화라는 가상현실 속에서나 가능한 부질없는 소망이었는지, 실제현실에서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잘못된 길이었는지 알아야겠습니다. 10개월. 무려 10개월 동안 포기만 계속 당해야 하는 게 설득이 되지 않습니다.
이제는 빼앗긴 말을 되찾을 차례입니다.
이틀을 버틴 오늘은 아들의 체험 입소 마지막 날인 1월 15일입니다. 시설로부터 1월 16일인 내일 데려가라는 통지를 1월 13일에 받았고요. 서둘러야 합니다.
누룽지를 끓여 먹고, 약을 먹고, 샤워도 면도도 했습니다.
제가 '마침표'가 아닌 '쉼표'를 찍을 수 있으려면, 김포의 장기거주시설 입소 전 처음으로 돌아가야만 가능합니다. 제일 먼저, 이전에 다니던 주간 단기보호시설 원장에게 전화했습니다.
"원장님, 걱정했던 일이 이제서야 터졌습니다. 그곳에서 못 하겠다네요. 제가 그곳으로 가면서 부탁드렸었죠. 쫓겨나오면 꼭 다시 받아주셔야 한다고요. 다시 원장님한테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됐어요."
굉장히 놀랍니다. 한 달이 다 돼가기에 당연히 잘될 줄 알았다네요. 아니, 처음 건강검진 해냈을 때부터 '그곳은 노하우가 있구나. 의지도 있어 보이고.' 했답니다. 그런데 그다음 말이 충격입니다.
"저희 제원이 못 받습니다."
"아니, 아니... 왜 이러세요. 꼭 그렇게 하겠다, 저하고 약속하셨잖아요?"
"얼마나 망가졌을 지 저도 모르겠고요. 약도 그곳에서 바꿨다면서요. 그래 놓고 이제 와서 포기라뇨. 저희도 최근 이사를 하면서 공간도 좁아진 데다 선생님들이 많이 그만둬서 지금은 여력이 없습니다."
아들 초등 3학년 시작할 때부터 26살이 될 때까지 만 17년을 다닌 곳입니다. 아들이 유일하게 적응할 수 있었던 곳이죠. 아들에게는, 내가 집과 함께 생활하는 곳이라는 반복적 기억이 굳어져 있는 곳.
"같이 시설 운영하는 입장에서 제가 할 말은 아닌데... 무조건 그곳에 매달리세요. 그 길뿐입니다."
아들이 육영학교 12년을 졸업할 때까지는 '특수체육교실'이라는 이름으로 '방과 후 활동'을 했던 곳이죠. 제 아들을 포함해서 원생들이 졸업을 하게 되자, 자폐장애 성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주간보호시설'을 추가로 만든 곳입니다.
말씀드렸던 것처럼 상당히 고비용을 요구하지만, 저는 선택의 여지가 없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곳 외에 다른 곳은 수차례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성공해 본 적이 없거든요. 다 떠나서, 비즈니스적으로 매우 뛰어난 원장입니다.
'시설'이란 단어 들어가는 곳마다 나보고 죽으라고 단체로 고사를 지내는구나! 싶습니다. '같이 시설 운영하는 입장'이란 말이 기가 막히네요. 동종업계라 이해관계도 같다는 말로 들려서요.
구차한 말을 몇 마디 보태다가 그냥 끊었습니다. 시설이란 곳의 매뉴얼은 하소연으로 바뀌지 않는다는 건 26년간 배웠고, 이틀 전 충분한 심화학습도 했기에 더는 속절없이 비굴해지기 싫습니다.
말을 계속 이어가다가는 17년을 함께한 세월에 대한 배신감과, 불과 4주 전 몇 번이나 다짐했던 약속을 손쉽게 깨버리는 어이없음에 저절로 욕이 나오게 될 것도 싫었습니다. 저 17년 동안 갖다 바친 원비, 꽤 큰 돈입니다.
다시 돌아오더라도 한시적일 거라는 특유의 비즈니스 감각이겠죠. 4주 전, 중장기 구상으로 성인시설은 이제 접어야겠다고 제게 이미 말했었거든요. 장애인은 우선 니치 마켓이어야 하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처음으로 돌아갈 수나 있는 건가?'
더럽게 추운 '쉼표'
집을 나섰습니다. 주민센터 복지팀을 찾았습니다. '그분'을 만났습니다.
이틀 전, 시설로부터 '입소 불가'라는 '친절한 안내'를 받았다고 이미 알리긴 했었죠. 저만큼이나 심란한 표정으로 저를 맞아줍니다.
"주중 잠을 잘 수 있었던 곳에서도 안 받아준다네요. 결국 저, 이틀 동안 두 번 거절당했습니다. 하하. 제가 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있을까요?"
곤혹스러움도 잠시, 아주 오래 시나리오를 함께 짚었습니다. 결론은 현재 이 나라가 해주는 모든 걸 해보기로 했습니다.
당장 아산병원에 검사와 진료 일정이 있습니다. 그때를 위해 '긴급돌봄서비스'를 신청하잡니다.
당장 급한 건 이전의 주간보호시설을 대신하는 '단기거주시설' 찾기입니다. 제가 진단받기 전부터 이용해 온 시설인데, 지금 제 몸 상태를 고려할 때 이게 해결돼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이전에 해온 노력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구청과 협조하고, 아는 곳마다 연락해서 긴급 수배해 주겠답니다.
김포에 이어 또 다른 '장기거주시설' 찾는 것도 당장 시작하잡니다. 강동의 행정력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겠답니다.
저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돕고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더 힘이 세지 못해 미안하다고 늘 제게 말해주는 분입니다. 저보다 한참 나이 어린 분이련만, 거의 제 친정엄마 행세를 합니다.
'저까지 신경 쓰지 마세요.' 아무리 말해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전공이 원래 이거라면서, 쌀도 찬도 김치도 가져오고, 지원금 받을 수 있는 곳을 찾아 숙제도 계속 가져오고, 뭔 전기장판에 겨울이불에 손에 잡히는 대로 가져옵니다.
한때 IT 법인 25년 경력의 대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에 청렴 선비인 양 거절하고 싶지만, 솔직한 형편으로는 고마운 일이죠. 부자 망해도 한세월은 버틴다곤 하지만, 곶감 빼 먹듯 병원비를 감당하면서 곶감 단지가 거의 비어 있거든요.
미안하고 송구한 마음에 내주는 숙제라도 따박따박 하는 모습으로 보답하다 보니, 저는 알지도 못했던 건강보험공단의 '재난적 의료비'라는 것도 받고, 강동의 각종 단체로부터 '긴급 지원금'도 받았습니다. 하필 연말연시라 단체마다 관련 예산이 떨어졌다며 돈 더 못 버는 걸 안타깝다고 하시는 그분.
제가 주무관님께 십일조 감사헌금이라도 해야 할 텐데, 돈 더 많이 벌어오셔야 헌금도 많아진다고 하자, 함께 손뼉을 치며 맘껏 웃음을 터트리는 사이가 됐습니다. 혹시라도 오해하지 마세요. 우리 집에서는 물 한 모금도 안 마시는 분입니다. 그래야 한다면서요. 처음 만났을 때 내 애꿎은 원망을 한마디 말도 없이 다 들어주시던 그분.
솔직히 말씀드립니다.
마침표 대신 쉼표를 찍기로 이미 작정하고 벌이는 발악 비슷한 짓을 시작합니다. 어차피 더 구차해질 것도, 내려놓을 것도 없고, 눈에 뵈는 것도 없습니다. 독이 바짝 오른 코브라 한 마리만 남았습니다.
독거노인의 품격? 그게 뭐죠?
이틀 전 비장하게 브런치 중단 글을 작성하며 하염없이 느꼈던 송구함도 이제 잊었습니다. 제 기록이 많은 분들께 우울만 전염시키는 의미 없는 짓에 그치고 말 거라는 걱정, 당연히 지금도 합니다. 결국 또 실패하거나, 더 끔찍하게는 실패라도 또 해보기 전에 '그 순간'이 올 가능성도 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패의 기록도 누군가에게는 의미가 있을지 모른다는, 슬픔도 때로는 힘이 된다는, 허술하고 옹색한 알리바이에 기대 보겠습니다.
'나는 실패했다, 그래서 기록한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불과 3년 전 발간된 에세이집이고 저자의 이름이나 나이는 밝혀지지 않았죠.
작가는 공부, 사업, 연애, 가족관계와 대인관계 모조리 실패했고, 그에 관한 '오답노트'를 지독하게 솔직한 분석과 고백으로 기록했습니다. 자기처럼 실패하지 말자면서.
철저히 신비주의 전략을 지켰다는 그분과 다르게, 저는 살면서 처음으로 실명과 사진까지 까고 따라 해 보겠습니다. 그런 에세이를 책으로 기록한 사람이 이분만 있지도 않습니다. 유명 인사도 제법 있습니다. 저도 실패를 기록한 사람의 무리 중 한 명으로 남아보겠습니다.
글이 점잖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미 느끼고 계셨다고요?
이제는 지금까지처럼 하소연하기도 비굴해지기도 싫습니다. 제게 말 바꾸며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이 있으면 가차 없이 원망할 겁니다. 어쩌면 욕을 할지도 모릅니다. 세상을 향해서 크게 소리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네, 지금 저는 눈에 뵈는 게 없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올겨울 이상하게 덜 춥다 싶더니 더럽게 춥네요. 속았습니다. 겨울이 끝난 줄 알았지 뭡니까?
아들이 시설에서 외롭게 버티던 날들.
그 사이 년도가 바뀌며 황송하게도 아빠의 나이가 +1 되더니, 마지막 병원 입원 중 시설로부터 지금까지와 다른 이상한 소식을 처음 듣고 퇴원하던 1월 8일. 갑자기 지독하게 추워졌죠. '왜 이리 춥지?' 하며 옷도 벗지 못하고 무려 만 하루를 잠만 잤으니까요. 덜덜 떨면서.
염병을 떱니다. 그 무렵보다 지금이 더 춥구먼요. 계속 그러든가. 빌어먹을.
춥거나 말거나, 저는 지금 막 '쉼표'를 찍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