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의 졸업식이었다. 나에게는 첫 졸업식이었다. 첫째, 둘째 그리고 막내. 아이가 셋이 있는데 유치원 졸업식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코로나 시기의 입학식과 졸업식을 못한 아이들이 바로 우리 첫째와 둘째였다. 첫째 때는 졸업식을 반에서 조용하게 하고 끝냈다. 다만 담임 선생님의 재량으로 밖에서 학부모에게 노래를 한 곡 불러주었다. 그 해 초등학교 입학식도 생략됐다. 둘째의 유치원 졸업식은 열렸으나 학부모는 들어갈 수 없었다. 유치원 앞 풍선 장식만이 졸업식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졸업이라는 일상의 소중함
이번 졸업식은 소체육실에서 열렸다. 총 30명의 아이들이 졸업을 했다. 규모가 크진 않았지만 부모님들의 마음속에는 정말 커다란 잔치였다. 아이들은 각자의 레드카펫을 밟아보려 한 달 동안 연습을 했다. 이곳에서 부른 노래들과 율동은 코로나로 이런 행사를 보지 못한 한을 깨끗하게 씻어줬다.
아이들이 레드카펫을 걸어오며 들어오는 시간에 춤이며 율동을 뽐냈다. 그 재롱이 한없이 감사하던 시간이었다. 우리는 늘 있어왔던 졸업식의 당연함 그러니까 이런 일상의 소중함을 모르고 지내왔다. 하필이면 우리 아이들이 당연히 참석해야 할 행사시기에 코로나가 생겨나고 없어질 때까지 이런 일상을 못 느꼈다는 것에 억울함이 있었다. 하지만 막내가 있어서. 졸업식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 주어서 하늘에 감사했다.
욕심쟁이 막내의 레드카펫
우리 집 막내는 셋 중에서 가장 욕심이 많다. 이번 졸업식에서도 그랬다. 레드카펫을 들어올 때 남들처럼 춤을 추겠지 생각했다. 막내는 30초라는 시간 동안 15초는 옆 구르기를 다섯 번을 돌아 끝지점에 일찍 도착했다.
“막내야 왜 옆돌기를 한 거야?”
“아무도 옆돌기는 안 하니까.”
남들과 같은 건 싫었던 거다. 누구를 닮았나. 나다. 서른 명 중에서 스물일곱 번째 순서였던 막내는 사람들의 환호소리와 함께 옆돌기로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남은 15초 동안 어색한 흐느적거림의 춤으로 마무리 지었다. 졸업식이 있기 3주 전부터 유난히 노래를 더 많이 불러대곤 했다. 그 반복적인 흥얼거림에 누나도 형도 여러 노래들을 함께 노래를 외워 떼창을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졸업식에서 나오는 어느 노래에서도 막내는 큰 소리로 박자와 음정을 정확하다 못해 적확하게 불러댔다.
졸업식 노래의 1절은 학부모의 가사였다. 나는 1주일 전이 돼서야 부랴부랴 외우기 바빴다. 졸업식에서는 막내와 서로 눈을 바라보며 나는 1절을, 막내는 2절을 불러주었다. 대부분의 남자 어린이들은 입만 뻥긋거리고 부르지 않았지만 막내는 그러지 않았다. 그렇게 다른 우리 집에서 막내는 무엇이든 해내는 노력의 아이콘이었다.
학부모 축사를 자진했다
유치원에서는 학부모 축사를 공모했다. 공모한다고 한들 자진해서 할 학부모가 거의 없다. 나는 이번만큼은 막내에게 어깨뿜뿜을 더하고 싶었다. 그래서 공모한다는 공지가 나는 바로 그날 휘리릭 쓴 글을 내밀어 축사에 자진 발표하게 됐다. 내 앞 순서로 옆 반의 다른 학부모 대표 어머님이 축사를 했다. 글을 읽는 내내 눈물을 안으로 삼키시면서 글을 읽고 멈추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에 나도 몰래 가슴에서 차오르는 눈물을 목구멍 밖으로 나오지 않게 누르고 있었다. 그다음이 내 차례였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내가 감동을 받아도 울지 않는 냉혈한 인간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나는 참는 거다. 결혼식 때 남편이 나 몰래 준비한 결혼 영상을 식장에서 처음 봤을 때 울지 않았다. 감동적이지 않을 때는 감동받은 척하며 울고 싶지 않아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뿐이다. 하지만 자식 일은 달랐다. 사소한 일에도 눈물을 참아낼 때가 많다.
얼떨결에 휘리릭 지나간 나의 축사는 2시간 졸업식의 거의 마지막 부분이어서 쳐지는 졸업식의 분위기에 힘입어 집중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내심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