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을 다시 살려보는 건 어때 전공을 다시 살려보는 건 어때 전공을 다시 살려보는 건 어때 전공을 다시 살려보는 건 어때 전공을 다시 살려보는 건 어때 전공을 다시 살려보는 건 어때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 맴맴 돌고 있었다. 이 말 한마디가 나의 마음에 깊숙하게 들어와 박혀 버렸다. 왜 하필 이 문장 하나가 내 마음을 들었다 놨다하는가.
나의 전공이 무엇이었나
“전공을 다시 살려보는 건 어때?”
1교수님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15여 년 만에 1교수님께 아무 이유 없이 전화했다. 내심 나의 마음이 무언가를 얻기 위해 전화했었다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아마도 최근의 여유가 일을 하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일으킨 것 같다. 내가 했던 전공을 다시 살리는 일은 현재로서는 어렵다. 가정을 내려놓는다는 이야기밖에. 가정에 충실하면서 일을 할 수는 없었다. 나는 한 가지에 빠지면 다른 일에는 집중하지 못한다. 아무 능력도 없는 밑바닥이지만 아무 일이나 하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남아있는 너덜거리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경단녀가 된 지 11년이었다.
교수님의 퇴임 소식을 들었다
대학 시절 가장 존경하는 2교수님의 퇴임 소식을 들었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1교수님도 갑자기 생각이 나서 전화를 드렸고 2교수님께는 무턱대고 카톡을 남겼다. 대학 시절 나는 전과생이었다. 전공으로 받아주신 분도, 취직을 연결해주신 분도 다 2교수님이었다. 취직한 회사에서 강의할 분이 필요했는데 2교수님은 나의 부탁에 흔쾌히 먼 곳까지 와주셨다. 교통비라도 드리려 했으나 한사코 거절하셨다. 그리고 뒤돌아 오른손을 하늘로 흔들면서 가시던 2교수님의 뒷모습은 15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일들을 기억하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나를 기억하실 거라는 기대는 버리는 편이 좋았다.
애들 선생님 말고 나의 교수님
매년 스승의 날이 되면 아이들의 선생님 선물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와중에 나의 은사님은 잊고 지냈다. 전화라도 드릴걸 그랬다. 오랜만에 연락드려서 부끄러웠다. 하지만 지금이 인사할 수 있는 타이밍이었다. 그리고 길게 카톡 답장이 왔다.
“안부 인사 고맙다... 너는 내 기억에 확실히 남는 제자란다. 공부도 잘했고 차분하고 성실한 학생이었지... 이제 세 아이의 엄마라니 경의를 표한다. 엄마로서 아내로서 분주할 텐데 옛 스승까지 기억하고 연락해 주니 더욱 고맙구나. 퇴임 후 여유가 생기면 옛 제자들을 만나 격려해 주고 칭찬해 주며 살아갈 예정이다. 부디 건강하고 행복하거라.”
아이들 픽업을 하고 아이의 병원을 다녀오느라 답장 확인이 늦었다.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것도 약국에서. 공부를 잘했다니 지독하게 놀고 또 놀았던 대학생이었다. 2교수님이 대학 시절의 나를 예쁘게 기억해 주셔서 감사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이었나. 옛날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어떻게 다른가. 그런 고민들이 많았다. 2교수님의 대답은 문제집의 해답을 엿본 느낌이었다. 옛날의 나는 그래도 성실한 학생이었다. 지금도 성실한 엄마인가? 성실하게 내 삶을 살고 있는가? 다시 고민하게 만드는 교수님 두 분과의 통화였다. 이제 스승의 날이 되면 다시 전화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