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달력을 식탁 앞에 걸어두자 아이들은 달력의 내용을 궁금해했다. 자신들이 학교에서 받은 학사일정이 적힌 탁상달력과 비교했다. 큰 달력은 내 위주의 일정을 적어둔다(내 생일은 가장 크게 적어둔다. 아이들이 보라고ㅋ. 엄마 생일 좀 챙겨주라). 기나긴 방학이 끝나고 학교 가는 날에 아이가 물었다.
“학생이 없는 집도 있을 수 있잖아.” 내가 대답했다.
“아하! 할머니, 할아버지 같은 집?”
내가 아이의 생각을 가둬놓는 건 아닌지 의심했다. 개학이라고 쓰여있지 않은 달력에 의문을 품고 혼자서 생각할 시간을 좀 주었어야 했다. 즉문즉답을 초스피드로 내놓는 나는 성질 급한 엄마다.
학군이 좋지 않아서 신입생이 적은 줄 알았다
3월 4일의 월요일은 막내의 입학식이었다. 이번 신입생은 80명대였다.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이름순으로 번호가 배정되는 신입생 학교 번호 배정에 막내가 80번대를 받았다. 신입생이 100명은 되겠지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전학생들이 많았다.(둘째가 입학하던 2년 전만 해도 140번대였다) 막내가 다니는 학교의 24년도 신입생은 80명대였다. 그래서 반은 4개뿐이었다. 첫째의 1학년은 일곱 반, 둘째의 1학년은 여섯 반이었다.
“올해 전국 초등학교 신입생 수는 사상 처음 30만 명대(36만 9441명)로 줄었고, 총 6175개 초등학교 중 157곳은 신입생이 한 명도 없어 입학식을 하지 못했다.”(중앙일보)
기사를 보고 나니 비단 우리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어서 안도했다. 우리 학교가 학군이 좋지 않아서 떠나는 사람이 많을까 내심 걱정했다. 그냥 인구수가 적어서 아이를 낳지 않아서 생기는 순리였다.
엄마들이 가장 바쁜 순간, 새 학기
막내의 입학식이 끝나고 집에 오자 첫째와 둘째가 집에 오기 시작했다. 새 학기 첫날은 언제나 엄마가 바쁘다. 하교 후에는 아이들이 준비물목록을 쏟아내고 내야 할 서류는 산더미기 때문이다. 큰 아이는 제법 해봤다고 혼자서 척척해내지만 둘째는 여전히 엄마의 손이 필요했다. 막내 역시 말할 필요가 없어 생략하겠다. 신학기 엄마의 할 일 나열해 보았다.
첫 번째, 학교 제출서류 작성이다. ①개인정보 수집 이용 학부모 동의서 ②상담기초자료 ③응급환자관리 동의서 ④식품알레르기 조사로 총 4장이었다. 아이들은 새 친구, 새 담임선생님의 이야기로 시끌벅적하고 흥분상태로 자기들끼리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다칠까 봐 눈길이 아이들에게 오며 종이로 가며 하다 보니 아이의 이름도 틀려서 화이트로 그어대는 실수도 일어났다. 이때가 가장 나의 심기가 불편하다. 글자도 잘 쓰고 싶고 글의 내용도 멋지고 싶어서 집중하려는데 아이들은 나를 신경 써 주지 않는다. 그래서 표현한다. 소리를 지르며 조용히 하라고. 혹시라도 우리 아이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까 싶어서 신경이 곤두선다. 담임선생님에게 보이는 나름의 첫인상이 서류였다.
두 번째, 아이들이 챙긴 준비물 목록을 점검한다.
[준비물 목록]
필통(천), 깎은 연필 3자루, 지우개, 채점용 붉은 색연필, 검정 네임펜, 지우개, 15cm 자, 가위, 사인펜, 색연필, 투명 테이프, 딱풀, L자파일(가정통신문 보관용), 학습지 파일 2개, 개인휴지, 개인 물티슈, 양치도구(칫솔, 치약, 컵), 미니 빗자루 세트, 여분 마스크
담임선생님마다 학년별 준비물목록이 조금씩 다르다. 이번 신입생들도 학교에서 제공되는 준비물이 많아서 막내는 준비물이 적다. 하지만 학교에서 챙겨준 준비물은 이름표를 붙여오라고 집으로 돌아올 예정이다. 둘째는 이제 영어와 음악 과목이 생겨서 리코더를 준비하라는데 큰아이는 리코더가 자기도 필요하다며 양보할 생각이 없다. 또 쿠팡으로 빠르게 사야 하나를 고민한다.
더불어 아이들의 실내화가 작아졌는지 신겨본다. 이걸 잊었다. 첫째의 폭풍 성장으로 신발이 작아졌다. 이미 로켓배송은 품절 대란이 일어났고 아이가 맞을 만한 사이즈는 내일 받을 수 없었다. 저녁 준비하러 나가는 길에 눈앞의 신발가게에서 보물찾기 찾듯 찾아내 아이에게 안겨주었다. 다행히 아이는 투정 부리지 않고 헐렁이는 큰 실내화를 챙겼다.
세 번째, 아이들의 시간표에 맞춰서 학원과 방과후수업 일정을 맞춘다. 이게 핵심이다. 1년의 일정이 보통 신학기에 짜인다. 이 틀에서 1년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인기 많은 방과후수업도 신학기에 추첨으로 된다면 나머지 분기도 우선권이 주어져 수업참여가 보장된다.
교실 앞 배웅이 하루뿐이라니
다음 날 등굣길에는 딱 하루만 신입생 배웅이 교실 앞까지 허락됐다. 가는 길에는 형, 언니, 누나, 오빠의 손을 잡고 교실로 향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어린이들도 윗사람 노릇 하느라 고생이 많다. 막내를 교실에 놓고 나오는 순간 작별을 느꼈다. 껌딱지 막내가 내 곁에서 더 떨어지겠구나. 배웅이란 떠나가는 손님을 일정한 곳까지 따라 나가서 작별하며 나누는 인사였다. 홀가분하면서도 서운한 느낌이 교차했다. 이것이 빈 둥지증후군이던가.
아직도 못 챙긴 준비물은 배송 중이다. 준비물 사러 나갔다 집으로 돌아오자 커다란 박스를 보고 까무러쳤다. 내용물은 휴대용 티슈 120개. 집에 어디 둘 공간도 없어서 아직도 거실에 자리하고 있다. 남편은 무슨 단체행사하냐며 놀려댔다.
정신없는 중에 오롯이 정신을 차리고 있던건 쿠팡이었다. 내가 바라는 신학기 준비물로 가득 채워진 쇼핑목록 페이지를 보며 120개라는 숫자가 별 거 아닌듯 인식하게 만들었다. 준비물을 준비할 수 없음에 오는 허탈을 피하기 위해 120개의 티슈를 선택했나보다. 쿠팡의 속임수였다. 바쁜 신학기에 잘 돌아가지 않은 머리를 탓했다. 티슈 120개를 정당화 하기위해 머리를 굴려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이건 언제 다 쓰려나. 그래, 그냥 실수라고 하자. 몇 년을 써도 다 못 쓸 텐데...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 주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