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일격을 가했다. 비가 내렸다가 안 내렸다가 변덕을 부리는 날씨에게.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은 섬뜩했다. ‘엄마는 아직 갱년기 아니야. 마흔밖에 안되었거든?’ 말해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갱년기가 되기 무서웠다. 어쨌든 날씨는 딸의 말처럼 운동의 기대를 저버리기 일쑤였다. 축구복을 입었는데 갑자기 비가 와서 축구 수업이 취소됐다. 하지만 뜻밖에도 소나기였을 때, 아쉬움이 가시지 않는다.(아이들은 비가 오면 실내로 배드민턴 수업을 들으러 가긴 한다) 단지 오후 운동에 큰 기대를 한 나여서 나에게 돌아오는 실망은 컸다. 기나긴 장마가 가고 이제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 이어졌다. 비가 오면 운동 못할까 졸이던 그 마음이 이제는 뜨거운 햇볕에 힘듦을 걱정했다. 사람의 마음은 참 간사하다.
비야 비야 오지 마 다음에 다시 오렴
비가 오면 그치기를 얼마나 고대했던가. 어느 날은 축구장에 갔는데 비가 쏟아부을 때도 있었다. 그러면 축구장 한쪽 캐노피 나무 계단에 앉아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렸다. 비가 내리는 계단에 앉아 있으면 아이들도 소리친다.
“비 맞으면서 축구해요!”
“비야 그만 내려라. 우리 축구하게!”
그러면서 아이들은 캐노피 처마 밑으로 가서 빗물과 놀기 바쁘다.
강수량 적을 때는 축구를 할 수 있었다. 비 오는 여름날 축구는 달콤하다. 비가 왔을 때 가만히 기다리는 법도 축구인의 인내였다. 어쩌면 승리의 여신이 날씨로 시험하는 게 아닐까 했다. 인간은 자연을 거스를 수 없었다. 트래킹을 하거나 등산을 하는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었다. 마침내 비가 그쳤을 때의 그 희열. 간절히 바랐던 소원이 이루어지질 때다. 그리고 마중 나온 무지개를 보았을 땐 글자로 형용할 수 없었다.(나는 축구장에서 쌍무지개도 본 적이 있었다)
축구하다 날파리를 먹기도 하고
그래서인지 축구를 하면 하늘을 많이 보게 되었다. 무지개가 있는지, 구름은 있는지, 날파리가 있는지, 잠자리가 있는지. 저절로 하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2년 만의 건강검진에서도 시력이 좋아졌다. 1.2에서 1.5가 되었다) 비가 온 뒤 축구장은 지렁이 천지다. 오죽하면 한 분은 지렁이를 보고 ‘아나콘다’가 땅에서 나오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 어떤 날씨의 변화 때문인지 몰라도 날파리가 끝도 없이 날아다녀 입으로 들어올 때도 많았다. 아직 여름이 가기 전인데도 머리 바로 위로 잠자리 떼가 날아다녀 가을로 착각하기도 했다. 처서가 지난 요즘은 바람이 다르다. 온몸으로 계절의 변화를 느낀다. 땀이 얼굴을 덮어 흘러도 살랑이는 바람이 한 번 지나가면 오싹함을 느낀다. 우리는 변화의 계절에 서 있다.
성급함의 대명사, 나
기다림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계절의 변화에 서 있었다. 나. 뭐든 생각하지 못하고 행동이 앞섰던 나에게 기다려보라고 가르쳐 준 게 바로 축구였다. 예를 들면 택배가 알아서 도착할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송장번호를 수시로 조회해서 언제 몇 시에 받을지를 계속 새로고침으로 알아본다. 또 아이들의 시험 날 아이들이 집에 오면 바로 물어본다. “시험 잘 봤어?” 내 호기심을 채우는 게 우선이었다. 그게 시간의 낭비가 되었던 상대방의 기분이 어떤지 알지 못했다. 성급함의 대명사, 나였다.
축구에서는 공격수가 수비수의 발을 내밀기를 기다리는 인내도 필요했다. 나에게 공이 오면 나는 우리 팀에게 패스하려고만 했지 상대방을 속여서 내가 처리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공을 뺏길 것 같다는 움츠려든 몸이 자신감을 잃었다. 공을 가진 사람이 언제나 유리한 위치임을 경기 당시에는 알 수 없었다. 공격수가 공을 가지고 수비수의 움직임에 반응해도 늦지 않음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연습을 하지 않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지금도 그렇다. 경기 중에 외치는 언니들의 ‘여유’라는 단어는 대형마트의 주차장에서도 들렸다. 주차장 천장에 붙어있는 초록 글자 ‘여유’ 주차 공간. 그 글자가 나에게는 축구 경기장에서의 여유를 가지라는 격려로 들려 피식 웃음이 났다. 어디를 가도 무엇을 보아도 축구로 귀결되었다.
물도 기다리면서 먹어야 한다
운동을 하다 쉬는 시간이 되었을 때 물을 마신다. 아무 때나 마시는 게 아니다. 경기 시간에 맞춰서 물을 먹는 습관을 길들여야 했다. 20분에서 25분 경기 중에는 물을 먹지 않아도 되도록 물을 기다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러면 목이 말라도 그 시간 중에는 참는 게 우선이다. 그리고 먹는 물은 꿀맛이다. 운동이 다 끝나고 맛있는 물을 한꺼번에 마셔버리면 속이 울렁거린다.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만 기다려서 먹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숙취처럼 하루가 힘들어졌다.
하루는 운동하다 보면 비가 오고 쉬면 비가 그치고, 운동을 하려고 하면 비가 오기를 반복했다. 이런 날이면 운동은 일찌감치 포기하는 편이 나았다. 이것은 오늘은 운동하지 말라는 하늘의 뜻이다. 하늘이 막걸리를 하사했다. 축구가 끝나고 그렇게 먹은 날은 함께 할 수 있음에 생각보다 행복했다. 그렇게 비가 그리웠다.
해가 쨍쨍한 날,
비를 그리워했다.
비가 내리는 날에는
운동할 수 있는 쨍쨍한 날을 고대했다.
중간이 없는 날씨 덕에 인내와 여유를 또 한 번 배운다.
행운의 여신은 인내하는 자에게 가장 큰 상을 내린다. - <아주 세속적인 지혜>, 발타자르 그라시안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