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담하고도 신기한 질문이었다. 축구대회가 열리는 축구장 진행요원 앞이었다. 유소년축구대회장, 이곳에서 축구 경기를 하다가 다쳤다고 했다. 아이가 아파했을 텐데 아빠는 의연했다. 예전의 나였다면 호들갑을 떨면서 우리 아이 어떻게 하냐고 울부짖었을 텐데 말이다. 팔 하나가 빠지고 머리를 부딪혀 쓰러져 경기장 밖을 나가도 괜찮았다. 그것이 골절이 되어도. 이곳의 부모님들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축구를 하다가 다칠 수 있다고.
대회를 나가면 실력이 향상되는 리그전
신기한 경기방식이었다. 5일간 열리는 긴 일정 속에서 리그전(경기에 참가한 개인이나 팀이 적어도 한 번은 다른 모든 선수나 팀과 경기를 벌이는 경기 방식)이 펼쳐졌다. 아이들은 많은 경기를 뛸 수 있어 축구를 즐기기에 충분했다. 무더운 여름의 열기를 피해 경기 시간도 오후 3시부터 밤 10시 반 경기까지 학년별 끊임없는 경기의 연속이었다. 여성축구에서는 볼 수 없었던 리그전 방식에 내가 기뻤다. 뛸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많은 것인가. 여성축구에서는 토너먼트(여러 편이 겨루면서 경기를 할 때마다 진 편은 떨어져 나가고 마지막으로 남은 두 편이 우승을 다투는 경기 방식. 승자 진출전.) 형식으로 대부분 진행됐다. 때문에 나 같은 초짜는 경기에 5분이라도 뛰면 다행이었다.
우승의 기쁨 맛보기
우리 집 아이는 세명. 첫째는 여자아이라 동일 연령에도 1학년 아래 경기에도 뛸 수 있었다. 큰아이는 4학년 경기에, 둘째 셋째는 3학년 경기에 들어갔다. 큰아이가 뛰던 4학년 경기는 총 일곱 번의 경기가 5일 내내 있었으나 단 한 경기도 이기지 못했다. 둘째와 셋째가 뛰었던 3학년 경기는 삼전삼패였다. 하지만 선수반으로 등록된 5학년과 6학년 친구들이 오르고 올라 상위리그에서 토너먼트 형식으로 진행됐다. 그리고 5학년 선수반은 우승컵을 들었다. 6학년은 3위를 차지했다. 5학년 우승컵을 들어 올려 세리머니를 하는 영상에 구석으로 우리 집 아이 세 명이 함께 했다. 우승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느끼는 게 얼마나 재밌을까. 나도 5분 뛰었지만 우승컵은 황홀했던 기억이 교차됐다.
경기장에서는 계속 시끄럽게 응원했다
“분위기 올려. 열심히 뛰고 파이팅 하자!!”
저학년 아이들의 고학년 응원이 경기장을 울린다. 경기를 보는 내내 우리 아이가 뛰는 경기도 있고 우리 아이가 없는 경기도 있었다. 집에서는 거리가 아주 멀었던 장소였다. 우리 팀의 부모님들은 상대편 부모님들의 수보단 적었다. 그저 조용히 멀리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시끄러웠다. 왜냐. 나도 축구를 하는 사람이라 아이들에게 응원과 격려를 보내고 싶었다. 또 경기할 때 보이지 않는 잔소리를 경기장 밖에서 큰 소리로 해대고 있었다.(누가 보면 감독인줄;;;;)
“붙어! 네가 해! 돌아! 간다! 공 봐! 할 수 있어!”
우리 팀 다른 분은 아마 나를 진상 부모로 봤을 거다. 그래도 상관없다. 내가 모르고 한 소리는 아니었으니. 남편은 옆에서 창피했다고 훗날 고백했다.
응원의 효과는 분명 있었다
집에서 굴러다니는 학원 이름이 적힌 수건을 들고서. 관람석에서 흔들어댔다. 나중에 4학년 친구에게 아줌마의 응원이 어떠냐고 물어봤다. “우리 팀 이름이 적힌 수건은 멀리서도 보여요. 응원도 경기를 뛸 때 진짜 힘이 됐어요.”라며 엄지까지 치켜세워주었다. 그 말에 4일 동안 관람석에서 빽빽 소리를 질러 쉬어버린 내 목소리가 뿌듯했다. 칭찬에 목마른 나는 감격했다.
전화벨이 울렸으면 좋겠다
전화벨이 울린다. 둘째다.
“엄마 게임해도 돼?”
“그럼! 당연히 해도 되지”
(뚜뚜뚜뚜)
그 한마디 하고 전화를 끊었다. 으악. 이 녀석. 대회 내내 세 번의 전화는 다 게임이었다(첫날밤에 잠이 안 온다고 울먹거리며 전화 한 번 하긴 했다). 막내아들 역시 딱 한 번 나에게 전화했다. 내용 없이 웃다 끊긴 대화였다. 분명히 아이들에게 신신당부했었다. 장소를 움직일 때는 엄마에게 전화를 달라고. 하지만 감독님과 코치님들이 핸드폰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큰아들은 핑계를 댔다. 하지만 큰 아이는 딸이라 이동할 때 필요한 순간, 전화가 가능한 때 전화를 주어 안심했다. 역시 딸이다.
축구대회 동안, 엄마가 보고 싶다고 전화가 내내 울릴 것 같았다. 아이들은 30여 명의 축구하는 형들과 자고 먹고를 5박 6일을 함께했다. 내 품에서 멀리 떨어지는 일은 큰아이의 학교 체험 빼고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렇게나 길게 떨어지는 일은 경험이 없어 작은 걱정이 앞섰다. 우리 아이들 셋은 셋 만으로도 천하무적이 될 것이라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그래서인지 우리 집 세 명의 아이들은 또래 아이들과 부모님 없는 자유를 실컷 즐겼다.
자유를 느낀 아이들
큰 아이인 딸은 데리고 와서 함께 자고 오전에 다시 숙소로 데려다 놓았다를 대회 내내 반복했다(하루는 동생들과 숙소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곳은 축구장에서 뿐이었다. 아이들은 엄마 아빠가 보인다고 해서 달려오지도 않았다. 엄마 아빠를 그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경기가 없을 때 함께 몸을 풀고 기다리는 자세를 배워왔다. 단체생활에서 해야 할 일들을 배워가며 그 안에서 즐거움을 느꼈다. 또 아이들은 혼자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씻는 일도 먹는 일도 자는 일도. 내가 키우고 있던 육아는 아직 유아기 때의 방식이었다. 이제는 성인을 준비하는 독립의 육아를 가르쳐야 할 때라는 점을 축구대회를 통해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