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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고운 Jun 22. 2021

어서 와, 부추 지옥은 처음이지?

싸다고 덜컥 한 단 사 온 부추를 과연 어떻게 소진할 것인가!


종종 들르는 과일 야채 가게가 있다. 얼마나 저렴한지, 정신줄을 놓게 만든다. 그날도 원래는 과일이나 몇 개 사려고 가벼운 마음으로 들렸다. 하지만 한 단에 800원 하는 부추와 1,000원에 2개 파프리카를 보고 어찌 지나친단 말인가. '이건 무조건 사야 해!' 왠지 안 사면 손해인 기분이었다. 구매 계획에 없던 야채가 어느새 양 손에 주렁주렁 손에 들려있음을 자각했을 때, 비로소 현타가 왔다.


내가 지금 무얼 한 거지, 잠시 후회되는 마음도 들었으나 건강에도 좋은 야채 뭐 실컷 먹으면 나쁠 거 없다는 생각으로 찝찝했던 마음을 훌훌 털어본다. 그나저나 부추는 없으면 아쉽고, 있으면 골칫거리인데 저 많은 걸 언제 다 먹어 치우려나 고민에 빠진다. 어떻게든 먹으면 되니까! 아침부터 부추로 요리를 할 수는 없으니 일단 저녁 메뉴로 미뤄둔다.


아침은 만만한 삼각김밥으로 준비해본다. 필수로 쟁여두는 먹거리 중 하나인 시판 주먹밥 재료에 밥, 그리고 참기름을 둘러준다. 삼각김밥 틀에 넣고 모양을 만들고 김을 잘라 붙여주면 제법 그럴듯한 모습의 삼각김밥 완성. 엊그제 만든 대추청은 두유요거트에 살포시 얹어본다. 여기에 견과류와 꿀도 추가하면 의외로 꽤 조화로운 맛이다. 둘째가 좋아하는 방울토마토와 야채주스도 곁들이면 아침 메뉴 준비 완료.


아침 밥상에 그릇이 3개밖에 없는 이유는 뭘까? 바로 나를 제외한 쓰리이의 밥만 있기 때문이다. 이른 점심에 약속이 있어 일어나자마자 냉동실에 있는 떡 하나만 간단하게 먹고 끝냈다. 이게 다 점심을 맛있게 먹기 위한 큰 그림이랄까.

만만하게 뚝딱 준비할 수 있는 단골 아침메뉴, <삼각김밥>



점심에는 이 근처에 일이 있어 들린 언니를 만났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 전날부터 격렬하게 논의했던 한자매의 먹성은 하여간 알아줘야 한다. 많은 후보들 중 선택하기 어려운 순간. 수많은 후보들이 나열되고 최종 순위에 오른 메뉴는 바로 명태조림.


그 매콤하고 알싸한 단짠의 조화는 생각만으로도 입에 침이 고인다. 명태 살도 야무지게 발라먹고 국물에 밥도 쓱쓱 비벼먹을 생각을 하니 벌써 입가에 미소가 절로 난다. 명태조림의 백미는 칼국수 사리! 의외의 조합일 것 같으나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린다는 것.

 

어찌하다 보니 1시간 반을 걷고 걸어 명태조림 가게에 도착했다. 아침도 간소하게 먹었는데 허기가 극에 달해 음식이 나오자마자 허겁지겁 먹을게 분명하다. 11시 30분, 오픈 시간에 맞춰 1등으로 매장에 들어섰다. 자리에 앉기도 전에 주문부터 하는 이 성격 급한 한자매. 빨리 먹고 하교 시간 전에 서둘러 가야 하는 애 엄마의 처지이다 보니 늘 이런 식이다.


아무튼, 맛은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얻어먹어서 그 맛이 더 극대화된 이유도 분명 있겠지만 이 날 따라 간도 딱 적당하고 맵기도 딱 기분 좋을 만큼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파워워킹의 효과도 상당 부분 영향을 끼쳤음에 틀림없다. 다음에 오게 된다면 이 루틴을 다시 한번 재연해야겠다.


사실 사진에는 없지만 초코우유로 후식도 야무지게 챙겼다. 그래야 얼얼한 입도 중화시키고, 뭔가 마무리까지 제대로 한 것 같은 느낌이랄까. 이로써 다이어트는 오늘도 저 멀리에, 점점 멀어져 가는구나.

때깔부터 입맛 확 당기는 <명태조림>



하교 한 첫째 아이가 울상이다. 반에서 피자와 치킨 파티를 했다는데, GFCF(Gluten Free Casein Free) 식단을 하느라 밀가루를 최대한 자제하고 있는 터라 본인은 안 먹었다고 한다. 얼마나 속상했을지. 음식 앞에서는 애도 어른이고 똑같이 힘든 것 같다. 그래서 부랴부랴 비건 피자를 준비해본다. 다행히도 재료가 대부분 있기에 일단 있는 재료로 급하게 만들었다.


아몬드가루식빵에 썬드라이토마토, 옥수수, 블랙올리브슬라이스 그리고 비건치즈까지. 간단하지만 그래도 얼추 피자 흉내는 낼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먹구름이 잔뜩 낀 것 같던 첫째 아이의 마음에 햇살이 비추는 것 같다. 먹는 게 이리도 사람의 기분을 좌우한단 말인가. 뭐, 하긴 나도 방금 명태조림을 만족스럽게 먹고 왔기에 이렇게 기분 좋게 뚝딱 비건 피자도 만들어 줄 수 있었으니까.  

아이들 간식 간식 메뉴로 당첨, <비건피자>



드디어 대량의 부추를 처분해야 하는, 큰 숙원과제가 시작되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파프리카도 있겠다, 훈제 오리도 있겠다 이건 뭐 고민의 여지가 없다. 오늘은 월남쌈으로 가자! 냉장고에 잠자고 있던 있는 야채, 없는 야채 죄다 끌어 모은다. 그리고 열심히 채 썰기를 시작한다.


보통 월남쌈에는 파인애플을 넣지만 나는 사과를 선호한다. 맛의 미묘한 차이는 있겠지만 둘 다 단맛과 상큼한 맛을 담당하기에 부족함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과는 다른 야채들처럼 채 썰 수 있어서 쌈으로 싸 먹기에도 훨씬 편하다. 금액적인 차이도 무시할 수 없다.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 집 월남쌈에는 파인애플 대신 사과가 자주 등장한다. 오늘은 사각 모양의 현미 라이스페이퍼도 준비되어 있다. 월남쌈을 자주 먹다 보니, 아예 전용 그릇도 있다.  


먹성 좋은 남매, 아무래도 오리고기 한 팩으로는 부족하다 싶다. 처음부터 월남쌈을 계획했더라면 더 넉넉하게 사놨을 텐데, 늘 그래 왔듯이 즉흥 요리니까. 양이 적을게 분명하다 싶은 생각에 두뇌를 풀가동해본다. 뭐가 좋을까. 아하! 부추 부침개가 있구나. 마침 호박도 양파도 있다. 휴 다행이다.


오늘은 완전 채 썰기의 날인가 보다. 재료를 얼른 손질하고 큰 볼에 찬물과 전분, 현미가루를 넣어 섞어준다. 기름을 넉넉하게 두르고 최대한 얇게 부쳐주면 부추전 완성. 매콤한 맛을 포기할 수 없기에 어른용에는 청양고추를 잘게 다져 넣어준다. 두 가지 버전의 부추전을 부치느라 정신이 없다. 사서 고생하는 이 기분이란.


월남쌈의 매력은 아이들에게 거부감 없이 다양한 채소를 먹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냉장고에 남은 야채도 빠르게 처분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아이들도 마치 놀이를 하듯, 재료를 하나씩 라이스페이퍼에 올리고 돌돌 말아 모양을 만들며 신이 났다.


월남쌈을 만들 때 일일이 도와줬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엄마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는 초등학생들. 이럴 때 참 많이 컸구나를 실감한다. 서로 경쟁하듯 맛있게 먹어주는 녀석들의 모습을 보며 오늘도 기운을 얻는다.





딱 여기서 주방문을 닫으면 좋겠지만 또 하나 남은 과제가 있다. 부추와 함께 산 살구가 영 맛이 별로다. 아직 제철이 아닌 건지, 혹은 저렴한 게 파는 건 다 이유가 있던 건지 후숙을 시켜봐도 영 맛이 시큼하다. 이럴 땐 뭐다? 잼으로 만드는 수밖에. 살구는 껍질을 벗길 필요도 없고 과육도 분리가 쉬워 다행히도 손질하는 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감자 으깨려고 산 저 주방도구는 잼 만들 때도 유용하다. 꾹꾹 눌러주면 잘 으깨져서 굳이 믹서기에 돌리지 않아도 된다(물론 설거지도 줄일 수 있는 장점도 있다). 설탕과 레몬즙을 첨가해서 졸여주면 살구잼 완성.


의외로 맛은 대 성공적이었다. 천덕꾸러기였던 살구의 환골탈태라고나 할까? 새콤한 맛이 일품이다. 사과잼, 포도잼과는 또 전혀 다른 색다른 맛이라는 점이 놀라웠다. 다음에는 살구잼 만드려고 일부터 살구를 왕창 사 올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오늘의 마무리 노동, <살구잼>


내일 아침은 살구잼을 활용해야겠다. 샌드위치는 기본, 요거트에도 토핑으로 올려봐야겠다. 가족들의 시식평은 어떠려나,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그나저나 아직 1/3도 먹지 못한 부추는 내일은 또 어떻게 먹어치워야 하나... 고민하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부추 지옥은 언제쯤 탈출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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