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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고운 Jun 16. 2021

아침부터 피자가 웬 말이냐!

그래도 너희들이 잘 먹는다면, 이 한 몸 희생하리

우리 집 애들은 아침에는 국과 반찬이 곁들여진, 그러니까 일반적인 한식 밥상을 선호하지 않는다. 점심과 저녁에는 그렇게도 잘 먹는 녀석들이 왜 아침에는 미역국을 세월아 월아 속 터지게 느릿느릿 먹는지, 절반도 안 먹고 남기는지 그 이유를 도통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떡이나 쌀식빵 주먹밥 등을 주식으로 한다. 여기에 과일이나 야채를 추가하고 부족한 단백질은 계란이나 두유요거트로 채우는 편이다. 그래서 비교적 아침 밥상은 간단하게 준비한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 날 아침은 예외였다.


사건의 발단은 하루 전날 저녁이다. 급식 메뉴를 보더니, 아뿔싸! 점심이 피자와 스파게티인 것이다. 밀가루와 유제품 섭취를 제한(GFCF: 글루텐프리, 카제인프리)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비상인 셈이다. 영양사 선생님과 상의 후 스파게티나 짜장면 같은 메뉴의 경우 면 대신 밥으로 대체해주신다(물론 조리과정에서 소량의 버터나 밀가루는 들어가겠지만 아예 100% 제외하면 급식에서 먹을 게 없으니 적당히 타협한다) 아무튼 감사하게도 밥에 소스를 얹어 리소토처럼 먹을 수 있다. 하지만 피자는 완벽한 밀가루에 유제품 콜라보인, 그래서 경계대상 1호 메뉴.


"학교 다녀와서 오후 간식으로 피자 먹으면 어떨까?"라는 나의 제안은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그것보다 아침에 미리 먹고 가면, 친구들이 피자를 먹을 때 안 부러울 것 같아요." 두 녀석은 단호했다.

하긴 어른인 나도 먹고 싶은 거 참는 게 제일 어려운 일인데 너희들은 오죽할까!

할 수 없이 착한 엄마 모드 발동, "그래 좋은 생각이네! 그럼 내일 아침은 비건치즈로 만든 피자, 오케이?"


이렇게 말하며 쿨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아침부터 피자라니...... 내일은 부엌데기의 시작부터 험난하구나'라고 투덜거렸다. 그래 뭐 해보는 거지. 먼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일단 냉장고 속 재료 체크! 일단 제일 중요한 주 재료인 비건치즈는 아직 남았고, 아몬드가루로 만든 식빵(일명 키토빵 이라 불림)도 잔뜩 만들어 냉동실에 쟁여 두었으니 일단 안심. 그다음으로 부재료 체크. 썬드라이 토마토, 옥수수, 블랙올리브슬라이스는 있고 루꼴라가 없네! 아, 어제 먹다 남은 시금치~ 색깔도 식감도 비슷하니 일단 찜.


여기서 끝내면 뭔가 서운해서 전투적으로 냉장고를 뒤져보니 그때 눈에 들어온 재료가 있었으니, 바로 어제 명란아보카도밥을 만들고 남은 명란 한 덩이 발견. 순간 명란바게뜨가 떠올랐다. 비슷하게 응용해봐야겠다는 생각에 인터넷 검색 찬스를 써보니 꿀, 소금, 후추, 대파, 마요네즈를 섞으면 되겠다 싶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 비장한 태도로 앞치마를 두른다. 정신없이 폭풍 요리를 하는 사이, 그새 오븐 예열 알람이 울린다. 얼마 전 남편의 사내 복지카드로 큰 맘먹고 구매한 오븐이 빛을 발하는 순간. 아무튼 그리하여 탄생한 아침식사 메뉴! 바로 <명란빵과 비건피자>  

조식 나왔습니다!  <명란빵과 비건피자> 아! 나의 노동력


하루 전에 주문한 메뉴가 나오니, 피자를 보자마자 연신 싱글벙글하는 녀석들. 이 맛에 요리를 하는 거겠지. 부디 맛있게 먹고 학교에서 피자의 유혹을 잘 참아주길 바라며, 괜히 또 미안한 마음이 든다. 첫째 아이는 한 입 먹어보더니 "이거 루꼴라가 아닌데요?" 헉, 그걸 귀신같이 맞추다니. 미식가로 인정한다.

 

참, 원래 이 그릇은 돈가스를 담는 용도로 산 그릇인데 이렇게 갓 오븐에서 나온 피자나 빵 종류를 담을 때 제격이다. 뜨거운 열기 때문에 자칫 눅눅해 지기 쉬운데 튀김망 위에 올리니 그럴 염려가 없다. 의외로 활용도 높은 아이템.


아침부터 오븐을 돌리고 난리를 쳤더니 주방이 말이 아니다. 식탁은 기본 바닥에도 빵가루가 난리난리. 서둘러 뒷정리와 설거지를 마치고, 점심은 최대한 간단하게 먹으리라 다짐한다. 애들이 없는 시간은 왜 이렇게 빨리도 가는지, 돌아서면 점심시간이 돌아온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주 3일을(주 3일씩이나) 재택근무하는 남편 덕분에 아무래도 혼자 있을 때 보다 점심에 신경 쓰게 된다. (얼른 매일 회사에 가 주길 바래!)


그래서 밥을 챙기느라 평소보다 시간이 더 소요된다. 그래서 이런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키고 있으니, 바로 점심으로 자주 등장하는 단골 메뉴는 떡볶이! 보통 시판 떡볶이는 2인씩 포장되어 있다. 혼자 먹기란 번거로운 일이다. 물론 양념을 만들고 재료를 준비해서 먹기도 하지만 나는 지금 그럴 기운이 없다. 아침부터 힘을 뺐더니 영 만사가 귀찮다. 이럴 때를 위해 준비해둔 비상용 메뉴, 바로  떡볶이가 있다. 냉동실에 고이고이 모셔둔, 판매 오픈하자마자 1분 안에 클릭해야 살 수 있다는, 대학 수강신청보다 더 치열하다는 그 떡볶이를 내 손에 쥐었을 때의 쾌감이란! 이런 열정으로 공부를 했었어야 하는데 말이다.


아무튼 떡볶이를 꺼내며 냉동실에서 하필 오징어와 새우랑 눈이 마주쳤다. 순간 해물 떡볶이가 떠올랐으나, '손질하기 귀찮아' VS '이왕 먹는 거 맛있게 먹어볼까?' 두 개의 자아가 치열하게 싸우는 중이다. 몇 초간 망설였다. 그러다 냉장고에 절반 정도 남은 콩나물도 발견한 순간, 이건 빼박이다. 그냥 운명으로 받아들이자. 간단하게 먹겠다는 의지는, 늘 그래 왔듯이 나의 불타는 식탐에 완패당하고 말았다. 빠른 손길로 해산물을 해동하고 그 사이에 콩나물도 씻어 놓는다. 떡과 어묵도 적당히 해동되었다. 이런 스토리를 담아 탄생한 점심 메뉴, <해물떡볶이>


남편의 평가는 어땠을까. "와! 이건 팔아도 되겠다. 당장 매장 하나 내자" 어 그건 당신 생각이고..... 내 능력은 딱 네 식구 먹을 만큼만 요리하는 게 전부인 거 알면서. 아무튼 극찬이 이어졌다. 양념부터 내가 만든 떡볶이에 이런 찬사를 받았으면 어깨가 으쓱했을 텐데, 이건 반조리 제품이거든요. 해산물은 거들었을 뿐이고, 떡볶이 업체 사장님께 모든 영광을! 남은 국물까지도 원샷해버리는 걸 보니 어지간히 맛이 마음에 들긴 하나보다.


평소에 아이들이 독차지하는 과일 주스도 꺼내서 홀짝거린다. 하지만 이마저도 1인 1 주스 하지 못하고 반씩 나눠 먹는 모습이란. 며칠 전 입주한 들꽃 화분이 오늘따라 더 예뻐 보인다. 나의 최애 메뉴 떡볶이를 마주하고 있어서 기분 탓이려나?

매콤한 맛에 해물과 콩나물의 조화는 언제나 찬성이요! <해물떡볶이>

  

저녁 메뉴는, 첫째 아이가 일찌감치 신신당부하며 예약해둔 메뉴 마약김밥이다. 마약김밥으로 유명한 광장시장도 아닌 반포동의 한 냉면집에서 먹어 본 마약김밥, 그 후에 아이는 한동안 마약김밥 앓이를 했다. 채 썬 단무지와 당근 단 두 개의 재료일 뿐인데 어째서 이런 천상의 맛이 나는 건지. 물론 비법은 적당한 소금간과 아낌없이 발라준 참기름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여기에 하나 더! 간장소스에 겨자를 듬뿍 풀어 넣어주는 게 포인트. 물론 아이들은 매워서 겨자는 패스하지만.


김밥 축제의 날이니 만큼 어차피 판을 벌린 거 햄버거 김밥도 만들어 보기로 마음먹었다. 오직 고객(=두 아이들) 만족을 위해. SNS에서 보고 "이거다" 싶었던 햄버거 모양 김밥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마침 집에 자투리 야채들을 비롯한 재료가 얼추 다 있었다. 소시지를 물에 살짝 데치고 반으로 가른 후, 홍파프리카, 상추, 계란 순서로 안을 채워 넣는다. 얘네들끼리 따로 김으로 감싸서 꾹꾹 말아주고, 또 다른 김은 밥만 얇게 펼쳐준 후 아까 만든 햄버거 모양을 가운데 넣고 돌돌 만다. 막상 아이들보다 내가 더 신이 났다. 설레는 마음으로 단면을 잘라보니, 제법 그럴듯한 햄버거 모양 완성! 물론 끝내주게 예쁘지는 않았지만(너무 두꺼운 파프리카가 잘못한 걸로) 햄버거 모양의 김밥이라니, 그 발상이 참으로 기발해서 피식 웃음이 난다. '역시 따라 해 보길 잘했어'.


김밥 축제에 빠질 수 없는 메뉴가 있으니 바로 어묵국이다. 밀가루가 안 들어간 야채 어묵을 꺼내 진하게 우려낸 디포리와 다시마 육수에 무심하게 무를 툭툭 썰어 넣는다. 국간장으로 간을 맞추고 주인공 어묵은 마지막 단계에서 투하. 너무 처음부터 넣으면 흐물흐물해져서 꼬치에 꽃다가 낭패를 본 적이 있기에 이번에는 정신을 차려본다. 나도 그렇고 우리 아이들도 비록 초등학생이지만 먹는 데에 늘 진심이다.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어묵은 꼭 이렇게 꽃이에 끼워줘야 한다. 으이구 시집살이. 이렇게 완성된 <마약김밥, 햄버거김밥, 어묵국>

주문하신 <마약김밥, 햄버거김밥, 어묵국> 삼 종 세트 나왔습니다


정말 쓰이리는(이 씨 성인 남편과 두 아이를 부르는 호칭) 끝도 없이 먹는다. 김밥 아줌마는 오늘도 부지런히 김밥을 말아보지만 먹는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다. 고마운데 안 고맙다. 맛있게 잘 먹어주는 건 참 고마운 일이지만, 빨리 더 달리고 재촉할 때는 안 고맙다.


"고객님들, 좀 천천히 드시고,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금방 김밥 대령하겠습니다."


오늘도 잘 먹어줘서 고마워!


*본 글은 Daum 홈&쿠킹 섹션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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