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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고운 Sep 23. 2022

결혼생활에 현타가 오기 시작했다

내가 꿈꾸던 결혼과 점점 멀어지는 서글픈 현실을 자각했을 때

또래 친구들은 물론 심지어 부모 세대들에게도 '남편'이라는 존재는 골칫거리이다. 나이를 불문하고 남편 때문에 속 썩는 일이 많다는 것인데, 참 애석한 일이다. 사사건건 부딪치는 건 기본이요, 행동이며 말투며 왜 이렇게 거슬리는지... 생활습관도 가치관도 달라도 너무 다르다. 한마디로, 싹 다 마음에 안 든다. 세상의 모든 부부는 분명 처음에는 사랑으로 시작한 관계인데, 점점 몸도 마음도 멀어 지고야 마는 게 슬픈 현실이다.


세월이 지날수록 서로에게 길들여지고, 발전된 모습으로 거듭나야 하겠지만 말처럼 참 쉽지 않다. 우리 부부 역시 여전히 으르렁대고 티격태격하며 지낸곤 한다. 꽤 오랜 기간 대화의 단절도 경험해봤고, 때로는 죽도록 남편이 미워서 그림자만 봐도 짜증이 몰려왔다. 더 심할 때는 상대방이 뭘 하든지 아예 관심을 꺼 버리는 날도 있었다. 그 무섭다는 무관심의 단계에 이른 것이다. 찬란하게 빛날 것만 같았던 우리의 결혼생활은 왜 이렇게 얼룩져버렸을까?


그동안 마음속으로는 수 없이 헤어질 결심을 했다. 다만 용기가 없어서 실천하지 못했을 뿐. 신앙적 신념을 저버릴 수 없어서, 그리고 이놈의 자식들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의 인생의 목표는 누가 뭐래도 '행복한 가정 만들기'였다. 그리고 나는 당연히 잘 해낼 거라며 자신만만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차라리 사회적 성공이나, 으리으리한 대저택에 살겠다는 목표가 훨씬 더 쉬웠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행복한 가정’이라 함은 일단 사이좋은 부부가 필수조건이지 않겠는가! 그렇게치면 나는 여전히 인생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부끄러운 실패자인 셈이다.  


남편과 백날 싸워본들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을 머리로도, 경험으로도 익히 알면서 내내 되풀이하고 있다. 참으로 지긋지긋하고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쓸데없는 감정 소모를 멈추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된다. '나만 그런가?'싶은 조바심에 주위를 둘러보면 다행히도 상황은 비슷비슷하다. 다만 괜찮은 척 ‘쇼윈도 부부’ 행세를 더 하느냐 덜 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물론 극히 드물지만 부부 사이가 엄청나게 좋은 경우를 목격하기도 한다. 하지만 남편을 존경의 마음으로 대하는 사람을 보면 마치 외계인을 만난 것 마냥 이질감이 먼저 든다. '왜 나는 저들처럼 남편과 다정하게 지내지 못하는 것일까?'라는 생각으로 자괴감에 빠져 마음이 어려워진다.

부부싸움은 평생 피할 수 없는 과업이다. 각 가정마다 싸움의 강도와 빈도의 차이는 있을지 언정 부부싸움 자체를 피해 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스갯소리로 내전의 종결은 부부 둘 중 한 명이 먼저 세상을 떠나야만 끝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결혼생활에서 부부싸움은 필수 불가결한 존재인 셈이다.


이쯤에서 '싸움의 기술'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다. 피할 수 없기에 제대로 잘 싸우고 갈등을 잘 극복해야 한다는 조언을 익히 들어보지 않았던가? 그러면서 진정한 어른으로, 건강한 부부로 성장하는 과정이 우리의 평생 과업이지 않을까 싶다. 지금까지 나의 결혼 생활을 돌이켜보면, 총알과 폭탄이 수시로 빵빵 터지는 전쟁터나 다름없는 나날을 겨우 지나온 듯하다. 거대한 화산 폭발은 멈춘 단계지만, 잔잔한 감정의 충돌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너나 잘해!'라고 누가 말한다면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다. 패잔병과 다름없는 처지이기에 결혼 생활에 대해 함부로 논할 자격은 없긴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 가정을 꾸리는 인생 후배들과 여전히 척박한 결혼 생활을 버티고 있는 동지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건네고 싶은 마음으로 글을 시작하게 되었다.


고상한 언어로 고리타분하게 결혼생활을 포장할 생각은 애초에도 없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럴 만한 내공과 지적인 깊이도 턱없이 부족하니까. 어쩌다 한 번 입게 되는 비싸고 말끔한 수트보다, 매일 입는 청바지 같이 만만하고 실용적인 글이었으면 한다. 그래서 단박에 술술 읽고, '맞아 나도 그랬지.', ‘아, 이런 방법이 있었네.’하며 피식 웃음 지을 수 있는 그런 마음의 평안을 전달해주고 싶다.


언젠가 시댁이든 친정이든 이 내용을 접하시게 되면 서로 얼굴을 붉힐 염려가 되어 글을 시작하기도 전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최소한 뒷목을 잡고 쓰러지시거나, 혹은 이러다 쫓겨나는 건 아닌지 말이다. 살짝 꼼수를 부려 익명으로 써 볼 까도 고민해봤지만 왠지 비겁해 보였다. 결론은 "그냥 나 답게, 있는 모습 그대로 당당하게 맞서 보자."였다. (참고로 우리 시어머니는 보라색, 카키색으로 머리를 염색하실 정도로 세상 쿨한 분이시다. 거슬리시는 내용도 분명 있겠지만 분명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실 거라 굳게 믿는다.)


일방적인 남편 까대기도 아닌, 그동안 쌓였던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고발성도 아닌, 그렇다고 은근한 돌려 까기도 아닌, 어떻게 하면 좀 더 행복한 결혼생활을 꾸려 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의 답을 담아 보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이 글은 본인의 애환이 담긴 속 풀이인 동시에, 못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자기 회고록이자, 남편과 아이에게 사죄하는 마음이 담긴 자기 반성문이자,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다짐과 노력을 담은 일종의 결의서와 같은 처절한 몸부림의 흔적이다.


적절한 결핍은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고 했던가? 남편과 사이가 내내 좋았더라면 이렇게까지 깊이 자아성찰을 하지 않았을 테고, 답답한 마음을 부여잡고 이 지독한 고난을 극복해보겠다며 처절하게 애쓰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피할 수 없는 운명과 마주쳤을 때에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인간의 잠재력이 최고조에 달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잠재력은 한 개인의 비극을 승리로 만들고, 곤경을 인간적 성취로 바꾸어 놓는다.


그러고보니 ‘남편과 안 맞는 게 분명합니다’라는 글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다 남편 덕분이다. 원인 제공부터 동기 부여까지, 나도 몰랐던 내면의 힘을 끌어올리게 해 준 남편에게 매우 고맙다. 덕분에 유형의 결과물을 얻었으니까. 남편에게 실망하고 온통 상처투성이인 동지들에게, 그리고 결혼생활에서 휘몰아치는 피로감으로 지친 동지들에게, 진정한 '공감'과 '쉼'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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