득도하는 심정으로 셀프 고행길에 오른 심정이란...
결혼이나 상담에 관련된 책을 보면 단골로 등장하는 미션이 있다. 바로 상대방의 장점을 적어보라는 것. 배우자의 장점을 곰곰이 생각해보고 구체적으로 작성해보는 활동을 통해 그동안 잊고 지냈던, 혹은 미처 알지 못했던 상대방의 장점을 찬찬히 생각해보라는 것이 취지일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큰맘 먹고 나도 해봤다. 그리고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왜 절반의 성공이냐? 문자 그대로 장점을 쭉 나열하는 미션 자체는 성공했지만, 그렇다고 이를 통해 배우자에 대한 고마움을 떠올리며 훈훈한 감동의 분위기는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점 50개를 떠올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차라리 "배우자의 단점을 적어보세요."라는 미션이라면 순식간에 100개는 채울 자신이 있는데. 그래도 예상보다 비교적 짧은 시간인 1시간 30분 만에 머리를 쥐어짜서 50개를 꾸역꾸역 채우긴 했다. 다 완성하고 나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엉뚱하게도 '앞으로도 글로 먹고살 수 있겠군.' 이였다.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무한 자신감을 얻었다는 의외의 수확을 거두었다.
어쨌거나 남편 생일을 맞아 생일 편지를 쓰며 사서 고생을 했다. 애초에 불가능한 미션이라 생각했지만, 막상 글을 적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맞다, 의외로 이 사람 이런 장점도 있었지.' 하지만 순순히 남들처럼 곱게 장점만 나열하면 내 스타일이 아니지 않겠는가! 밋밋하지 않게 약간의 변주를 줘야 더 재미있을 거 같다는 생각에 장점 옆에는 마음의 소리도 같이 곁들였다. 그래야 진정한 차별화된 남편의 장점 리스트일 테니까. 마치 병 주고 약 주고 같은 느낌이지만 어쨌든 내 식대로 해봤다.
아, 참고로 아래의 내용은 당사자에게 허락을 구하고 내용 전문을 공개하는 바이다. 오해 없기를.
<생일 특집, 남편의 장점 50가지>
(괄호 안은 마음의 소리)
1. 아이들과 창의적으로, 재미있게 잘 놀아준다. (애들보다 본인이 더 신날 때 많음 주의)
2. 문제 해결력이 뛰어나다. (엉덩이 가벼운 편. 일명, '엉가')
3. 패션감각이 있다. (옷도 신발도 미어터짐 주의)
4. 아침마다 비타민과 각종 영양제를 잘 챙겨준다. (하지만 재고 파악 및 구매는 내 몫. 다 떨어지기 전에 부디 미리미리 보고 바람)
5. 집안일을 적극 돕는다. (비록 디테일은 부족하지만)
6. 잘 씻는 편이다. (냄새 안나는 깨끗한 남편은 인정)
7. 술, 담배를 하지 않는다. (이건 나도 마찬가지 1)
8. 가족 중심으로 생활한다. (이건 나도 마찬가지 2)
9. 아이디어가 좋다. (but 뒷수습은 나의 몫)
10. 아끼고 절약하는 소비습관이 있다. (그렇지만 당근마켓 거래 중독은 이제 그만!)
그래도 여기까지는 수월하게 작성
11. 부모님께 자주 안부 전화를 드린다. (장인 장모님께도 연락 좀 드리면 안 될까?)
12. 다이어트 성공 후에도 운동을 꾸준히 한다. (애들이 아빠를 안 찾으니 가능하다는 걸 아는지? 부럽다.)
13. 동영상 편집 기술이 프로급이다. (유튜버 고고? 수익으로 연결시켜보자니까!)
14. 운전을 잘한다. (시간 단축은 덤, 하지만 생명 단축의 위험도)
15. 주차를 잘한다. (물론 타고난 주차운도 한 몫 함)
16. 길을 잘 찾는다. (꼭 결정적인 순간에는 내비를 잘못 봐서 기름 낭비, 시간 낭비 제대로)
17. 가리는 것 없이 뭐든 잘 먹는다. (먹는 일 자체에 큰 의미를 안 둔다는 게 함정)
18. 정리정돈을 잘한다. (그래서 내 물건이 어디 있는지 한참 찾아야 한다)
19. 최신 트렌드에 민감하다. (마케터의 직업병)
20. 눈썰미가 좋다. (나한테는 여전히 언제나 늘 무관심 하지만)
와! 20번까지 완성!! 오예~
21. 전형적인 교회 오빠이다. (집-회사-교회가 루틴)
22. 일탈을 하지 않는다. (최대 일탈 이어 봤자, 나에게 운동하러 나간다고 뻥치고 심야영화 보러 갔던일)
23. 일반 남자들 답지 않게 세심한 편이다. (그래서 늘 감정이 요동치는 건가?)
24.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쉽게 잘 다가간다. (교회에서 목자로 섬길 때 유용함)
25. 유머러스하다. (but 아재 개그)
26. 내가 먹고 싶은 메뉴를 2개 고를 수 있게 해 준다. (하지만 둘이서만 밥 먹는 일은 극히 드물다)
27. 아내의 선택을 존중해준다. (회장님 잘 모셔줘서 고맙)
28. 가게 지출 내역에 대해 불만이 없다. (내가 얼마나 아껴 쓰는데!)
29. 아내에게 사회활동을 강요하지 않는 현명함이 있다. (지금은 애 둘 잘 키우는 게 돈 버는 일!)
30. 육아의 가치를 (가끔은) 알아준다. (가끔 말고 항상이면 더 좋겠음)
아... 슬슬 한계가 온다... 뭘 쓰지.... 두뇌 풀가동!!!!
31. 어깨, 허리, 다리 등 마사지에 탁월한 능력이 있다. (티비 보면서 영혼 없이 대충 할 때가 더 많다는게 흠)
32. 적당한 무관심이 때로는 고맙다. (사사건건 안 따지고 들어서 좋음. 물론 나도 켕기는 일을 절대 안 함)
33. 그림을 수준급으로 잘 그린다. (내가 일러스트를 부탁하면 뚝딱하고 잘 그려줌, 또한 애들 키우며 유용한 능력)
34. 끈기가 있어서 의지가 있는 일에는 끝장을 본다. (동영상 편집하며 아무리 에러가 생겨도 극복하는 정신력이란!)
35. 사람들에게 인사를 잘 건넨다. (단 층간소음으로 깊은 갈등이 있는 위층 이웃은 제외)
36.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이다. (하지만 규칙/규범 준수는 필요)
37. 문서 작성 퀄리티가 여느 광고대행사 못지않다. (학부 때부터 유명했지, 이건 인정!)
38. 잔재주가 많아서 어떻게든 우리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을 것 같다. (많아도 너무 많은 잔재주)
39. 잘 때 소리에 민감하지 않고 잘 잔다. (기침소리, 화장실 다녀오는 소리, 물 마시는 소리 등등 잘 견뎌내 줘서 고마워)
40. 쉽게 화를 내지 않는다. (고로 한 번 화 내면 파급효과가 어마어마함, 앞으로도 화내지 말라는 소리)
아직도 10개가 남았 다니 이거 큰일이다! 머리가 쥐가 나는 기분 ㅠㅠ
41. 큐티 말씀 묵상 나눔과 주일 설교 말씀 요약을 잘한다. (종종 바리새인-겉과 속이 다르게 외식하는 자를 말함-같이 느껴지지만, 주일에 옆에서 졸고 있거나 딴생각 중일 때는 반성하게 됨)
42. 연락을, 특히 영상통화를 자주 하려 애쓴다. (아무리 나랑 애들이 보고 싶어도, 적당히 하는 걸로! 스윗한 남편 코스프레 반댈세.)
43. 의리가 있어서 상대방의 힘든 일을 함께 동참하려고 한다. (효율적이지 않아 굳이 안 그래도 될 때가 더 많다는 게 반전)
44. 어떤 환경에서도 불평 없이 잘 잔다. 심지어 맨바닥 일지라도. (둘째 출산 후, 옆에 빈 침대에서 심하게 코 골며 잔 것은 아직까지도 용서안됨)
45. 비자금을 조성하지 않는다. (투명한 재정 운영, 앞으로도 잘 부탁함)
아 그냥 여기서 포기해야 하나, 그렇다고 여기서 그만두긴 아까운데... 왜 내가 이걸 시작했을까 자괴감이 밀려온다.
46. 비밀 없이 자세하게 이야기해준다. (비록 실시간은 아니더라도,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대부분 상황을 공유해줌)
47. 식당에 갔을 때 빠르고 세심하게 가족들을 잘 챙겨준다. (애들용 포크, 앞 접시, 앞치마, 물 등등... 직원보다 빠르게 움직임)
48. 놀이터에 가면 인싸가 된다. (막상 우리 애들은 빼고 남의 애들과 신나게 놀아준다는 게 흠)
49. (아주 화려하고 독특한) 이모티콘 부자다. (남들은 일부러 안 쓰는 건지, 못 쓰는 건지 모르겠지만, '트렌디한 마케터'라서 그런 걸로)
50. 모든 것을 아내 혹은 가족과 상의하고 결정한다. 그래서 독단적으로 결정하지 않고 사소한 것도 상의하는 편이다. (단, 결정장애가 있는 건 비밀)
해냈다!!!!!!! 아니 이걸 해내다니, 나 천재인가??
정작 남편은 활자 공포증이 있어서 제대로 하나하나 곱씹으며 읽었을 리가 만무하지만, 어쨌든 남편의 좋은 점을 무려 50개나 구구절절 작성했다는 것 자체가 고귀한 일임은 틀림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쯤에서 궁금해지는 생일 편지를 읽고 난 후 남편의 반응은?
남편: "근데, 이게 나의 장점이야? 단점이야?
나: "(약간 당황했으나 절대 주눅 들지 않고) 어, 이거 당연히 장점인데, 왜?"
남편: "음, 아무리 봐도 두괄식이 아닌 미괄식인 거 같아서...."
나: "................" (맞는 말이라 차마 대꾸하지 못함)
자고로 사람은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통해 발전해야 하는 법! 고로 타인의 객관적인 시각에서 본 자신의 단점도 받아들이고 개선할 줄 알아야 진정한 큰 사람이 될 수 있다. 즉, 본인이 조금 바꿔야 할 부분도 함께 생각해볼 수 있는, 그러니까 아주 건설적이고 유익한 편지였던 걸로 치자면서 서둘러 대화를 마무리했다.
다가오는 내 생일에는 반대로 나의 장점 50가지를 적어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해 볼 작정이다. 과연 어떻게 50개를 채워 나갈지 궁금하다. '설마 한 20개 쓰고 못하겠다고 포기하는 건 아니겠지?'라는 불안감이 엄습하지만 말이다. 당시에는 머릿속이 혼돈 그 자체였으나, 그 고통을 이겨내며 일종의 인간승리 경험을 안겨준 <남편의 장점 50가지 작성하기> 미션을 통해 그래도 남편과 한발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이 정도면 미션 성공이라고 해도 괜찮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