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가족이 동시에 식탁에 마주 앉을 수 있는 주말이면 종종 주말 특선 요리를 선보이곤 한다. 냉장고를 빠르게 스캔해 보며 메뉴를 고민해 본다. 흐음, 토마토소스도 있겠다, 냉동실에 새우도 오징어도 있겠다, 적당히 야채들도 모아보니 오늘 메뉴는 빠에야로 당첨!
빠에야는 스페인의 쌀 요리인데 향신료와 해산물이 들어간 음식으로 리조또와 비슷한 느낌이랄까? 아무튼 색다르면서도 익숙한 그런 맛이다. 초등학생인 우리 집 애들조차도 별 거부감 없이 잘 먹는 정도니까. 재료들을 탈탈 끌어모아 손질 후 올리브유를 두른 후 프라이팬에 볶아준 후에 쌀과 시즈닝을 넣고 불조절만 잘해주면 비교적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요리다. 물론 제대로 각 잡고 만들려면 홍합도 필요하고 생 오징어도 있으면 훨씬 퀄리티 높은 요리가 완성되겠지만, 늘 그래왔듯이 나답게 집에 있는 재료들로 적당히 흉내 내본다. 냉파 요리에 더 가깝게 말이다. 여기에 무화과 샐러드까지 곁들이니 제법 그럴듯한 메뉴가 완성되었다.
밥 먹다 말고 식탁을 이탈하는 녀석, 이내 엄지손을 양손으로 치켜들며 엉덩이를 씰룩거리는 세리머니를 선보인다. 춤을 추는 당사자도, 보고 있는 사람들도 한바탕 웃음이 터진다. 그래, 이 맛에 요리하는 거겠지. 밥 두 그릇씩 싹싹 비운 가족들을 보며 '역시 고생한 보람이 있군. 엄마표 집밥이 최고지.'라는 생각으로 흐뭇해진다.
기분 좋게 식사를 마치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도 들었으나, 빨리 밖으로 나갈 생각에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주말에는 아이들에게 예능 프로그램 시청을 허용하기 때문에, 쓰이리(남편+아이들)가 집에 있는 동안 나는 후다닥 운동을 하러 나간다. 신속하게 뒷정리를 해치우고 가족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엄마 다녀올게. 특별한 일 아니면 전화는 좀 참아줘 알겠지?"
꼭 별일 아닌 일로 전화나 문자 테러를 할 때가 많기에 이번에도 단단히 일러둔다. 분명 1시간 후에는 돌아온다고 했거늘 엄마는 언제쯤 집에 올 거냐, 지금 어디에 있느냐는 연락부터 오빠가 자기를 놀리고 화나게 했으니 와서 혼내달라는 등의 고발성 소식, 혹은 지금 축구 한 골을 더 넣었다, 우리 팀이 지고 있다 등의 미안하지만 나는 전혀 안 궁금한 생중계까지....(아니 같이 있는 아빠에게 이야기를 하라고 쫌!)
남편은 운동을 하든, 영화를 보든, 헤어샵을 다녀오든 몇 시간을 나갔다 와도 애들이 신경도 안 쓰는데 왜 유독 나한테만 이러는 건지 모른다. 남편은 나에게 늘 부럽다고 말하지만, 전혀 아니올시다. 짧게라도 그저 온전한 자유가 그리울 뿐이다. 지금은 비록 내 인기가 하늘을 찌르지만 어차피 사춘기가 지나면서 하루아침에 떡락할, 이른바 부질없는 시한부 인기라는 걸 알기에 별로 달갑지 않다. 제발 운동하는 시간만큼은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걸 과연 아이들은 알고 있을까?
아무튼 이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평온한 월요일을 경건하게 맞을 거라고만 믿고 있었다. 이번 주말을 돌이켜보니 참 알차게도 보냈었다. 마술 공연도 보러 다녀오고, 가족이 함께 자전거도 타고, 튀르키예 베이커리에 가서 카이막도 먹어보는 등 최소한 "일기 숙제에 무슨 내용을 쓰지?"라는 고민 따위는 필요 없을 정도였다. 드디어 오늘 밤이 지나면 혼자 지낼 수 있는 반가운 월요일이 올 거라고 굳게 믿었다. 쓰리이가 아웃하는 그 월요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벌써 신이 났다.
머릿속으로는 '무얼 하고 보내지?'라는 생각만으로 실실 웃음이 삐져나왔다. 얼마 전에 통신사 VIP등급으로 승급되어서 무료 영화예매권 혜택이 생겼는데, 오랜만에 홀로 영화나 볼까?라는 생각에 볼만한 영화를 뒤적여봤다. 아니면 동네 카페에 책 한 권 들고 가서 우아하게 티타임을 해볼까? 싶은 마음에 인근 베이커리 카페 정보를 찾아보기도 하다가, 오래간만에 친정에 가서 엄마카세(엄마가 해주는 특선요리)를 즐겨봐야 하나? 등등 그렇게 신나게 이런저런 계획을 세워보며 집으로 향하는데 둘째 아이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아 뭔가 싸한 느낌이 든다. 본능적으로 감지되는 이 불길한 기운은 뭐지....
"엄마, 나 열나는 거 같아요. 열 재봤는데 38.2도예요."
"아....... 그래? 아까 전까지는 괜찮았잖아."
"이제 어떡하죠?"
"어떡하긴. 38.5도 넘으면 해열제 먹으면 되지. 그나저나 엄마가 운동할 때 전화하지 말라고 했던 거 기억 안 나? 내가 당장 열 내리게 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일단 전화 끊고 집에 가서 이야기하자."
매몰찬 나란 인간은 괜히 딸에게 화풀이를 했다. 하필 희망한 월요일을 꿈꾸고 있던 찰나에 걸려온 전화라니. 마치 '꿈 깨시지!'라고 조롱하는 듯한 기분을 느껴서일까, 확 짜증이 몰려왔다. 잠시나마 홀로 영화를 볼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참 부질없이 느껴졌다.
'오늘 또 불침번 당첨이로구나'는 생각에 급 우울해졌다. 불과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잘 먹는 아이들을 보며 흐뭇해하며 따스한 봄 날처럼 평화로웠거늘, 무슨 이중인격자인 것처럼 이번에는 소나기가 퍼붓는 것 같이 마음이 오락가락하는 걸까?
그래봤자 오전에 4시간 정도 잠깐 허락되는 자유 시간인데(그것도 집안일하다 보면 순삭 돼버리기 일쑤라는 사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여름방학이라 애들과 내내 붙어있었고, 개학과 동시에 첫째 아이가 아파서 며칠 동안 집에서 돌보느라 팍삭 늙어버린 기분이었다. 그렇게 몇 주를 시달리고 자체 보상이라도 해주려고 했는데 꼭 이렇게 어쩌다 한번 일탈이라도 해볼라치면 꼭 뭔가 틀어지고야 만다. 아, 억울하도다!
물론 아플 때 곁에 있어줄 수 있는 처지라 다행이고, 열은 있지만 고열은 아니라 다행이고, 중요한 약속을 잡은 것도 아니라 다행인 건 맞다. 근데 그건 그거고, 머리로는 다 알겠는데 왜 이렇게 요동치는 마음이 쉽사리 진정되지 않던지.
뿐만 아니다. 평소에도 유독 잠에 예민해서 잠드는 일이 매번 큰 숙제인 첫째 아이 때문에 매일 밤 시간에도 나에게 자유란 없다. 애들이 잠들고 나서 티비를 보는 것조차 극히 드물 만큼 온 집안에 소등을 하고, 취침 시간을 같이 해야만 한다. 안 그러면 잠이 안 온다며 온갖 짜증이란 짜증을 내는 건 기본이요, 어쩔 때는 새벽까지도 쉽게 잠들지 못하다가 뒤늦게 겨우 잠이 들어서 아침마다 한바탕 실랑이가 벌어진다. 피곤해하는 녀석을 억지로 깨우고, 밥을 먹이고, 한바탕 소동 후 억지로 등교를 시키고 나면 영 마음이 편치를 않다. 아, 이거 나만 이런 건가?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면 훨씬 삶의 질이 나아질 줄 알았더니, 생각지도 못한 또 다른 차원의 어려움이 존재할 줄이야.
어째 내 인생은 내 맘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 것일까. 내 속마음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일부러 방해라도 하는 건가 싶은 합리적인 의심이 드는 건 왜일까? 야무진 계획들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는 듯한 이 허탈한 기분이란.... 엄마의 삶이란 고작 이런 건가? 이러려고 결혼했나? 갑자기 존재론적 회의감과 허무함에 사로잡혀 땅굴을 파고 들어가게 된다. 각종 변수는 왜 이렇게 많이 생기며 결국 수습은 나의 몫이고, 책임져야 하는 부분들도 왜 이렇게 많은 건지. 좋게 말해 매니저이고, 알고 보면 극한 직업, 감정 노동자가 따로 없다.
밤새 열과 기침으로 뒤척이는 녀석 옆에서 자는 둥 마는 둥 하다 보니 아침이 밝았다. 내 이러니 흰머리가 안 생길 수가 있나. 그래도 나는 못 잤지만, 아이는 아픈 것 치고는 그럭저럭 잘 자고, 생각보다 밤에 잘 견뎌주었다. 그래 그럼 됐지 뭐... 첫째는 열감기가 안 옮아서 다행이다 생각하며 애써 마음을 다잡아 본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OO엄마인데요 아무래도 열도 나고 감기라 쉬어야 할 것 같아요."
담임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걱정해 주시며, 잘 쉬고 컨디션 회복해서 만나자고 하시는 선생님. 오전에 소아청소년과를 들려 진료를 받고 와서 엉망이 된 집을 부랴부랴 정리해 본다. 아, 원래대로라면 이 시간에 집에 있으면 안 되는데, 기회비용을 생각하며 신세 한탄을 하고 있는 나는 나쁜 엄마일까. 하지만 토마토처럼 벌겋게 익은 얼굴로 축 쳐져있는 아이의 모습을 보니 속상하다. 까불기로는 언제나 1등인, 생기가 넘치는 녀석인데 말이다. '그래, 오늘만큼은 잘 돌봐주고, 잘 놀아줘야겠다'라고 결심을 해 본다.
"엄마, 뭐 해?
"엄마, 놀아줘."
"엄마, 심심해."
"엄마, 잠깐 이리 와봐."
아, 귀에서 피가 날 것 같다. 하아, 방금 전에 굳은 결심을 했거늘, 그 말 취소. 스트레스 지수가 쭉쭉 올라가는 게 느껴진다. 이럴 때는 커피 한잔 긴급 수혈. "엄마 잠깐만 커피 한잔만 하고. 그동안 잠깐 만화 보고 있을까?" 최대한 우아함을 잃지 않으려 노력해 본다. 아이랑 둘이 있은지 고작 3~4시간 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 무너지면 안 되니까.
'에라이, 오늘은 떡볶이나 한 접시 해야겠다."
조건반사처럼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 펼쳐질 때면 자동으로 떡볶이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마치 소주 한 잔 들이켜는 기분으로, 매콤한 떡볶이 하나 입에 넣어주면 그나마 평정심을 되찾게 되기 때문이다.
그 후로 아이와 보드게임을 같이 하고, 같이 색종이도 접어보지만 시간은 참 더디게 흐른다. 이 정도면 시계가 고장 난 게 아닐까
"엄마 오빠는 언제 와?" 라며 오빠의 하교시간만을 기다리는 녀석.
"응, 밥 먹고 약 먹고서 한잠 자고 나면 오빠가 올 거 같은데? 그럼 우리 점심밥 먹을까?"
"그럼.... 떡볶이 해 주면 안 돼?"
오호라, 내 마음을 읽은 것일까, 말하지 않아도 통하다니. 물론 아이는 아직 매운 떡볶이를 잘 못 먹어서 간장 떡볶이로 해야 하지만 그래도 따로 또 같이 떡볶이를 먹을 수 있는 파트너가 있다는 게 또 좋기도 하다. 며칠 전에 만들어둔 장조림에 가래떡을 썰어 넣으니 뚝딱 궁중 떡볶이 못지않은 간장 떡볶이 완성. 김말이도 꼭 곁들여서 줘야만 흐뭇해하는 딸 녀석. 배운 여자구나, 너? 코를 풀어가며 먹은 매칼한 떡볶이에 어느새 시름이 한 풀 꺾이는 듯한 기분이다. 세상 단순한 사람 같으니라고. 오늘도 떡볶이에 큰 빚을 졌다. 고맙다, 떡볶이야.
"애들 때문에 시달리다가 탈탈 영혼까지 털린 후 먹는 떡볶이의 맛을 모르는 자와는 인생을 논할 수 없다니까!"
언젠가 언니가 말했던 명언이 떠올랐다. 학창 시절 시험 성적이 낮아 속상함을 달래며 먹었던 떡볶이도, 최종면접의 불합격 소식을 듣고 쓰라린 마음을 움켜쥐며 먹었던 떡볶이도, 그때 나름대로는 힘들다고 생각했던 사건이지만 지금에 비할 바가 아닌 것이다. 인생의 깊이 자체가 다른, 몇 차원 높은 고민이라 해야 하나?
아무튼 이런 이유로 냉장고에는 떡볶이가 상시 대기 해야 한다. 엄마들의 사기 저하를 한방에 해결해 줄 마법의 음식이니까. 주꾸미볶음도 마라탕도 매운 음식이지만 이상하게도 떡볶이가 제일 만만하고 좋다. 대중적인 메뉴여서 단가도 적절하고, 집에서 해먹기도 손쉬운 음식이라 그런 걸까? 동네 어딜 가든 쉽게 만날 수 있어서일까? 아무튼 떡볶이는 늘 옳다.
왠지 아이의 감기가 하루가 아닌 장기전에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마침 엊그제 사 둔 빨간오뎅떡볶이가 냉동실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안심하게 되었다. 어찌나 든든하던지. 그래, 또 떡볶이 찬스가 필요하면 이번에는 너를 꺼내서 먹을 테니 딱 기다리라고!
그 후로 아이는 기침이 끊이지 않고 해열제를 아무리 먹어도 열이 도통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코로나도 독감도 아닌 게 어디냐며, 감사했지만 그래도 일상을 빨리 회복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삼일을 꼬박 집에서 보내고(아니 버티고) 소아청소년과를 한 번 더 다녀와서야 드디어 열이 내렸다. 아이도 나도 오래간만에 활짝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그나저나 결석계를 쓰는데 번호가 생각이 도저히 나지 않아 아이에게 물었다. 엄마는 왜 맨날 번호를 물어보냐고, 이제 2학기인데 기억할 때가 된 거 아니냐며 핀잔을 준다. (미안하다 딸, 엄마의 기억력은 언제부터인가 사라져 버렸어.) 아무튼,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남편은 출근을 하는, 어떻게 보면 너무 평범한 이 일상이 축복이라는 것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