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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깨는 현석이 Jun 12. 2019

19.06.12 - 퀴어퍼레이드가 싫은 당신에게.

나는 당신을 존중할거야.

나는 거기 있었고, 강제로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대상이 된다.



#1. 축제.


축제에는 강제가 없다. 축제를 즐기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즐길 수 있고, 보고 싶지 않다면 얼마든지 안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제 20회 서울 퀴어문화축제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그냥 축제였다. 머드 축제에서 머드를 온몸에 바르고 놀고 벚꽃 축제에서 꽃을 귀에 꽂고 사진을 찍는 것처럼, 인간의 당연한 권리인 ‘성적지향’에 대한 축제에서 온 몸으로 본인의 성적지향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축제였다.

이 축제는 정말 당연하게도 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 합법적으로 이루어졌고, 앞서 말했듯 누구나 즐길 수 있었으며 누구든 즐기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니 당신이 우리와 축제를 즐기고 싶다면 그럴 수 있는 것이고, 즐기고 싶지 않다면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이때, 당신의 ‘보고 싶은가 / 보고 싶지 않은가’ 만큼 우리의 ‘축제를 열고 싶은가 / 열고 싶지 않은가’ 도 똑같이 존중받아야 한다. 나도 당신도 똑같은 사람이고 대한민국 국민이기에 표현과 집회의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축제를 열고 말고를 결정하는 것은 축제를 여는 사람들의 마음인 것이고, 그게 보기 좋고 싫고는 축제를 참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마음인 것이다. 우리는 이걸 분명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때문에 당신의 이해의 범주에 ‘당신의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은 기준이 되지만 ‘우리가 축제를 열고 싶은 마음’은 기준이 되지 않는다면 그건 모순이다.


그리고 애당초 누군가가 무언가를 할 때, 당신에게 이해받아야 할 필요도 없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그래야 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우리는 단순히 내가 보기 싫다고 해서 누군가가 무언가를 말하거나 무언가를 하는 것을 못하게 할 권리를 갖고 있는가? 우리는 누군가의 행동을 이해하기보다 존중하는 것이 낫다.


물론 이건 축제에 대한 이야기이다. 당신이 당연히 나와 축제를 즐기러 왔던 lgbtq+ ‘는’ 괜찮지만 퍼레이드‘만큼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한 것에 대한 응답이다.



#2. 눈에 띄지 않아야 한다는 것.


우리는 축제에서 존중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그날 축제에 왔던 서로를 존중했고 존중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앞으로도 서로 존중하고 존중받자는 약속을 나누었다. 우리는 축제에서 서로에 대한 존중을 노래하고 외친다.


우리는 그 기쁜 시간동안 우리를 누구에게 강제로 보여주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로서 그냥 거기 있었을 뿐이다. 그저 나는 남자를 좋아하고 누군가는 여자를 좋아하며 누군가는 아무도 좋아하지 않거나 누군가는 또 다른 어떤 누군가를 좋아했을 뿐이고, 엄연히 사실인 그 사실들에 대해 이야기 할 뿐이다.


이 때, 우리는 누군가의 눈에 띄지 않아야 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우리가 그날 거리를 걸었던 것 또한 엄연히 합법이었으며, 나는 누군가의 눈에 띄지 않아야 할 일도 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누군가의 눈에 띄지 않아야 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당신이 당연히 그럴 수 있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3. 존중


나는 강요하지 않는다. 우리는 강요하지 않는다. 모두가 성소수자가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강요받는다. 성적지향을 포기하기를, 다시 말해 우리의 정체성을 포기하기를 아주 다양하고 세심하며 눈에 띄지 않는 방법으로까지 강요받는다. 당신의 댓글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냥 우리가 성소수자로서 분명히 존재하고 그리고 성소수자로서 존중받아야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밥을 먹을 때 먹고 싶은 메뉴를 고를 수 있게 배려하거나, 다른 사람의 결혼 생활을 면전에다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거나, 상대방의 이상형이 틀렸다며 뜯어고치려고 들지 않는 것처럼 일상생활에서 존중하고 존중받기를 원한다. 서로에 대한 존중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존중의 사전적인 정의는 ‘무언가를 높이어 귀중하게 대하다’ 이다. 대단한 말이지만, 이걸 실천하는 방법은 정말 쉽다. ‘누군가를 그냥 누군가로서’ 타인의 입맛에 맞게 어찌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중하지만 내 눈엔 안 띄었으면 좋겠다’는 류의 말은 존중이 아니다. 본인의 기호와 취향만큼 또 다른 본인들의 기호와 취향 또한 높이어 귀중하게 대하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선 너무나도 당연하고 또 당연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수많은 ‘본인’들을 있는 그대로 높이어 귀중하게 대해야 한다.


수많은 '본인'들인 우리 개개인은 얼마나 많은 정체성들로 이루어져있는가. 한 개인은 수 없이 많은 정체성들로 이루어져 있다. 남성으로서, 여성으로서, 혹은 그 무엇도 아닌 성별로서, 근로자로서, 아픈사람으로서, 소비자로서, 생산자로서, 성소수자로서, 한국인으로서, 일본인으로서, 심지어 어느 동네 사람으로서 등등 개인들을 구성하는 정체성들은 셀 수 없이 많다. 그리고 그것들은 경우에 따라 바뀌기도하고 선택할 수 있기도, 타고나기도 한다. 우리는 그 모든 정체성들을 알고 이해할 수 없다.


나의 경우에 내가 성소수자라는 정체성은 내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처럼 나를 이루고 있는 수많은 정체성 중 하나일 뿐이다. 만약 내가 한국인인 사실을 존중하지만 내 앞에서 한국인인 것을 티내지 말아달라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존중인가? 그 정체성의 근간이 어디에 있던 나를 구성하고 있는 정체성들간의 차이는 무엇인가?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알 필요가 없다. 그저 존중하면 된다. 우리는 결코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4.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나처럼.


나는, 우리는, ‘lgbtq+는 괜찮은’ 당신에게 괜찮아야 할 이유가 없다. 당신이 나에게 괜찮은 사람이 되려고 애쓸 필요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지금 자기다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어떤 사람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 수없이 많은 ‘나’들은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걸 위해 우리에게는 딱 한가지, '존중'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누구보다도 스스로를 존중할 수 있어야한다.


내가 있어야 남이 있다는 말처럼 내가 나를 받아들이고 존중할 수 있을 때 다른 이를 나와 같이 존중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세상은 어쨌거나 내가 보고 듣고 느껴서 이뤄지는 거니까. 타인을 바라보는 시각은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각의 거울일 것이다.


나는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내가 행복했으면 좋겠으니까. 나도 당신도 언젠가는 우리가 뭔가 결정하고 뭔가를 할 때 응원과 지지를 나눌 수 있을거라고 오늘도 믿는다. 나는 이렇게 당신을 존중할 것이다. 나를 위해서.

우리 존재 화이팅이다.





이런 경우, 나는 오히려 존중받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요 저는 당신도 사랑합니다. 위아더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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