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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석이 Jul 25. 2019

19.07.25 - 좋아지는 건 참 무섭다.

휴학생 짧은 일기.

편집을 하다가 넷플릭스를 보다가 글을 쪼끔 쓰다가 햄버거를 먹었다가 다시 넷플릭스를 보다가 글을 썼다가.

기를 모으고 타자를 두드리기를 여러번 반복하다가, 이어지지 않는 호흡에 숨이 턱! 막혀서 산책을 나섰다.


나는 우리 동네가 진짜 좋다. 산도 많고 논도 있고 연못도 많고 나무도 많다. 공식적으로 도농 복합단지랬나. 나는 풀냄새나 흙냄새를 정말 좋아한다. 그래서 친구들이랑 전화라도 하면 꼭 동네 자랑을 하고, 같이 지내던 친구 정훈이와는 매일같이 산책을 하곤 했었다.


오늘은 비가 정말 억수같이 내린 날이었다. 진짜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 처럼 비가 오는 날이었는데, 장대비가 쉬지도 않고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때리고 천둥이 머리 바로 위에서 우릉대서 천둥이 정말 무섭다고 느꼈다. 나는 천둥을 무서워 한 적은 없었는데.


그렇게 무섭게 내리던 비가 다 그치고 나서 습하고 따수워진 여름 저녁 공기에는 내가 좋아하는 풀냄새가 잔뜩 녹아있었다. 흐르는 땀에 지나가는 바람에도 습습하게 풀냄새가 묻었다. 풀냄새가 녹은, 녹진한 공기를 온몸에 묻히면서 걸어가는 기분은 뜨끈녹녹하고 달달했다. 마음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 초록색 기분이 너무 좋아. 한 20분만 돌자고 마음 먹은 것이 역시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그래 내가 누군데. 늘 마음보다 줄이거나 늘려서 생각하고 급하게 선택하는 버릇은 동네 한바퀴를 도는데도 여전했다. 한 시간은 걸었나. 기분이 좋으니 지치는 줄도 모르고 걸었다. 풀냄새를 막 헤치면서 걸었다.


한참을 걷다가 시계를 보니 아차 싶었다.

하던 일이 있으니. 돌아가야지.

아쉬운 마음에 발걸음을 뭉그적 돌렸다. 그리고 아주 아주 천천히. 공기를 몸으로 밀어내는 양 천천히. 집으로 돌아왔다. 연못을 한 세 개쯤 지나면서. 얕고 깊은 연못들이 떠나가라 울다 마는 맹꽁이들을 눈으로 뒤지면서. 동네 맥주집에서 흘러나오는 노란 소음이랑, 술취한 사람들의 빨간 얼굴 냄새를 맡으면서. 아주 천천히 집으로 돌아왔다.

슬리퍼를 신었다는 핑계로 더 느리게 속도를 냈다. 발에 모래며 흙이 자꾸 들어가 발바닥은 모래 사장을 걸은 것처럼 건조하게 끈적였는데, 아주 좋은 핑계가 되어 주었다. 빨리 걷다 곳곳에 고인 웅덩이를 밟으면 발바닥으로 도자기 반죽을 할거야. 웅덩이를 요리조리 피하면서.


그렇게 집 근처 연못까지 오니 웅덩이를 피하는 찰나가 참 아쉬웠다. 내가 언제까지 여기서 이러고 있을 수 있을까 싶어서.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사는 이 곳이 벌써 못내 아쉽고 서글펐다. 그리고 지금 이러고 있는 이 한량같은 소중한 시간도.


덜컥 겁이났다. 아쉬워서 그런가. 이 동네가 막 너무 좋아지려고 하는 마음이 드는 것 같았다.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니 잃을 걱정에 실컷 좋아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대신 그자리에 이 모든게 언젠간 끝나고 없어질 것이라는 슬픈 마음이 왈칵 차올라서 거기가 좀 무거워졌다. 무거워지니까 걸음이 더 느려졌다. 그래서 그 핑계로 더 천천히 천천히 걸었다. 웅덩이를 요리조리 피하면서. 천천히 천천히. 발로 도자기 반죽을 만들까 겁이나서 천천히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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