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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깨는 현석이 Jul 31. 2019

19.07.30 - 넷플릭스 보는 김현석의 변명 일기.

휴학생 짧은 일기.

아. 넷플릭스가 나를 망치고 있다. 어째서 나는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을 시작해버린 걸까. 발음하기도 어렵다. 나는 교정을 했는데, 교정을 하고 나면 교정을 한 만큼 유지장치를 하고 있어야 한댔다. 그런데 그걸 잘 안 물었더니 발음이 좀 어눌하다. 아니 원래 좀 어눌하긴 하지만. 똑똑한 척할 때는 잘할 수 있는데. 그래도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은 발음하기 너무 어려워.

'이스(is)'라고 하면 너무 굴리는 것 같아서 좀 스스로 재수 없다. '이즈'라고 하면 '더'를 말할 때 발음이 좀 뭉개진다. 혀에 물엿을 바른 것처럼 발음이 떡하니 입천장에 붙어서 소리가 나오다 만다.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 염병할 발음하기도 어렵다니. 이 드라마는 정말 너무너무 복잡하다. 사람이 너무너무 많이 나오고 이야기가 너무너무 많다. 나는 드라마를 드라마로 보는 걸 힘들어한단 말이야.



#1. 구구절절 김현석의 사연.


나는 나를 잘 알고 싶다. 아주 그냥 낱낱이. 속속들이. 나는 '이과가 원리를 탐구한다면 문과는 본질을 탐구하는 게 아닐까?' 하는 개뿔도 모르니까 할 수 있는 생각을 하는데. 나는 내 머리에 빈곤하게 존재하는 융복합적 인재의 역량의 파편으로나마 내 본질과 원리를 모두 모두 알고 싶다. 내 기준 오랜 시간 동안 스스로에 대한 통제권을 스스로 갖지 못했다고 느껴서 더 그런 것 같다. 나는 내 두려움에게 나에 대한 통제권을 모두 넘기고 살았기 때문에 제정신으로, 그리고 스스로, 뭔가를 선택하고 결정해본 기억의 역사가 짧다. 그래서 좀 제대로 살아보고 싶어서 나를 계속 들여다보고 있다. 상담도 받고 이렇게 온 세상 사람들에게 일기도 대놓고 쓰면서 말이다. 근데 사실. 사람들이 많이 안 보대. 그래서 요즘은 좀 더 안심하고 쓴다.


그렇게 나를 계속 들여다본 결과, 나는 좀. 뭐라 캐야 돼노. 좀 너무 복잡하다. 항상 너무 어렵고 헷갈린다. 그러니까 내가 좀 그런 것 같고, 내가 겪는 일은 나한테 항상 그렇다. 조금 덜 알아도 될 것 같은 문제들도 아예 안보이거나 확실하게 보이거나 하면 좋을 텐데 애매하게 알 것 같아서 더 그렇다. 나는 좀 분명했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내 겉껍질부터 하나씩 하나씩 해체작업을 시작한 지 한참인 것 같은데. 나라는 인간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건지 파도 파도 미스터리다.


내 속을 막 헤집는 건 그러니까 항상 이런 식이다. 뭔가 머리를 탁 스치고 지나간 안개 같은 내 감정의 상호작용들을 머릿속에 쓸 수 있는 뉴런들 전부를 활용해서 온 힘을 다해서 훑는다. 그리고 뉴런으로 훑어서 모아낸 그 통찰의 습기들을 다시 모아 모아서 내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빈곤한 플라스크들에 몇 방울씩 분류해서 옮겨 담고 이름표를 붙인다. 그리고 그 빈곤한 플라스크들을 다시 분류해서 줄을 세우고는 나는 마치 스스로에 대한 진리를 손에 쥔 양 잠시 안도감과 포만감을 갖는다. '이쯤 이면 나는 내가 누군지 알겠어!' 하면서 잠깐 취해 있는다.

그러다 나한테 뭔가 새로운 일이라도 생길라치면, 익숙한 것 같지만 늘 새롭고 모호한 상호작용들의 안개들이 덮쳐오고, 나는 애처롭게 다시 뉴런들을 굴리면서 내가 아는 게 쥐뿔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를 절절히 깨닫게 된다. 그건 그냥 통찰도 뭐도 아닌 감정의 파편 조각 같은 거였던 거다! 그리고 그걸 또 온 힘을 다해서 분류작업을 시작하면서 이 사실들 자체에 대해 좌절하고 만다. 뭔가 알아낸 것 같은 그 순간이 조금 지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고 여전히 나는 나를 잘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하고 마는 거다.

실험실 수습생이 이런 기분일까. 사실. 나는 이과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다. 다만 모르는 것 투성이인 내 세상에서 분명한 건 나는 여기에 있고,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원리와 그 너머에 있는 본질을 깨닫기 위해서 쉬지 않고 짱구를 굴리고 있다는 거다.


그리고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가난한 '김현석 마음 원리 모음집'들 중에서 비교적 완성도가 높다고 하는 플라스크에는 '내 머리는 몰라도 내 무의식은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이 담겨있는데, 내 무의식은 나랑 다르게 너무 많은 걸 이미 알고 있어서 내가 따라가기가 좀 버겁다.

그래서 나는 모르지만 내 안의 나는 이미 알고 있는 이 문제들을 다시 또 하나씩 하나씩 분류해서 알아나가는 과정은 어떨 땐 즐겁지만 가끔은 너무 과해서 지치고 관두고 싶다. 그냥 좀 문제 있게 살면 안 되나? 그냥 모르고 살면 안 되나? 하는 생각이 들고 만다.


그래도 나는 나를 잘 알고 싶은데 참 어렵다. 왜 이걸 시작했나.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나. 내가 지금 원하는 게 뭐고 지금 내 기분은 어떤가 따위를 생각하면 바로바로 답이 톡. 나오는 사람이고 싶은데 그럴 수 있는 나는 항상 저기 멀리에 있다. 그럼 주저앉아서 '아, 나는 더 안가. 못가' 하다가도 몇 번 주저앉아보니까 이제는 주저앉기 전에 다시 일어날 걸 알아서 그냥 또 그 미련한 짓을 반복한다.


내가 분류해야 하는 게 '나'나 '내가 느끼는 흐릿한 안개 같은 사실'들이 아니라 진짜 껍질에 쌓여있는 무언가라면 얼마나 쉬울까. 내가 정말 사탕 봉지에 쌓여 있는 사탕이라면 얼마나 편할까. 까다 보면 언젠가는 껍질은 다 벗겨지고 단단한 알맹이가 나올 텐데. 그런데 안타깝게도 내 마음은 사탕이 아니라서 내가 지금 껍질을 까는지 삽질을 하는지, 아니면 쥐라기 공원의 호박 속 모기처럼 또 알맹이 속 어딘가에 붙잡혀 있는지 분간해낼 도리가 없다. 심지어 그게 사탕 인지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 이상하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알맹이도 껍질도 분명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이 이야기를 하는데 서론이 엄청 길었네. 나는 좀 솔직한 이야기를 할라치면 참 말이 길어진다. 오. 이것도 플라스크에 추가.



#2. uh-oh- 드라마는 그냥 취미가 아니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보면, 나를 볼 때 보다 비교적 명확하게 그 사람들이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당연히 나는 그 사람을 모르지만 보니깐 그렇대.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내가 하는 고민들을 이미 너무너무 많이 한 것 같이 보인다. 그 사람 당신의 어떤 사실들에 대해서 아주 당연하게 여길 줄 아는 것 같고, 자기의 기분이나 욕구들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누군지도 분명히 아는 것 같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들은 나에게 어떤 교본같이 느껴진다. 모든 교본이 다 정답이고 모든 교본이 단 하나도 같은 게 없는 교본.


그래서 나는 누군가의 진짜 이야기가 담긴 콘텐츠들을 아주 아주 푹 빠져서 탐독하곤 한다. 예습을 하는 기분으로 말이다. 아직 겪지 못해서 알지 못하는, 내 현실보다 훨씬 잘 분류되고 정돈된 그네들의 감정의 상호작용들, 그 안개들을 탐독하고는 상상하고 분류해본다. 그건 그냥 몰입을 잘한다의 정도로 이야기할 수 없다. 작가가 섬세하게 그 감정들을 다룰수록. 감독이 의도를 잘 연출해내면 해낼수록. 기껏해야 한참을 고생해서 몇 방울을 분류해내던 내 뉴런들은 생전 태어나서 처음 겪는 안개 폭풍을 짧은 시간에 엄청나게 훑어대고 나는 내 플라스크에 용량 걱정 없이 그 통찰 비슷한 것들을 담았다가 한순간에 기화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뭔가 읽고 듣고 보는 건 항상 스스로에 대한 예습같이 느껴진다. 마약 같은 순간이다. 내가 나에 대해 알고 싶어 하면 할수록 이야기의 흡입력은 그에 비례해서 더, 더, 더 강해진다.


이런 이유로 나는 쉬지 않고 이야기들을 읽어댔었다. 문명이 지금만큼 발달하지 않았던 중고등학교 때는 책을 정말 쉬지 않고 읽다가 수업시간에도 책을 몰래 읽는 지경에 이르렀었는데 아직도 '뚜깐뎐'이라는 책으로 내 머리통을 후려치셨던 국사선생님의 분노가 기억난다.

또 새벽에 몰래 컴퓨터로 온갖 웹툰과 소설을 죽어라 보고 사람들이 단 댓글의 대댓글까지 전부 읽느라 새벽 네시를 훌쩍 넘겨서 두세 시간을 겨우 자고 학교에서 부족한 수면을 채우던 나날들과 게임을 하면 게임보다도 게임 속 캐릭터들 이야기들을 외우다시피 했던 것도 기억도 난다.

4차 산업 혁명이 우리 생활을 송두리째 뒤집어엎는 지금. 덕분에 유튜브로 온 지구 사람들 이야기를 다 볼 수 있게 된 지금은 진짜 좋아서 좋아요를 누른 영상들이 천 개가 훌쩍 넘어가고 좋았던 영화를 두 번 세 번 네 번 대여하다가 결국 영화를 구매하기 시작하는가 하면 브런치 작가..라고 하기엔 좀 허접하지만 작가가 된 다음부터는 브런치의 토막글들에 조금씩 내 남은 뉴런들이 잠식당하는 중이다. 그리고 하다 하다 이제는 월마다 꼬박꼬박 만원 넘는 돈을 내면서 넷플릭스까지 시작해버렸다.



#3. 오뉴블은 근데 쫌.


그런데 문제는 이 드라마다.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 리치필드 여성 교도소의 이야기. 나는 평론이나 그런 걸 하려는 게 아니다. 내가 이 드라마를 얼마나 힘겹게 봐 내고 있는지를 이야기하고 싶다. 감히 드라마에 대해서 논하지는 않을래. 얘기하면 내 밑천만 드러날 것 같다.

확실한 건 지금의 나로서는 드라마 속 사람들의 이야기나 그 이들의 마음이 내 마음에 와 닿는 게 아니라, 논리적으로 이해조차 할 수 없는 감정들을 폭탄처럼 받아내는 느낌을 받는다는 거다. 아. 인생이 이런 걸까. 나는 이 상황이 뭔지도 모르는 데 덜컥 나에게 벌어져 버리고 내가 지금 무슨 상황이고 어떤 기분이며 내가 원하는 게 뭔지도 모르는데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의 연속인 걸까. 심지어 아무도 그런 걸 알려줄 수도 그 순간 그 선택을 대신해줄 수도 없다. 내가 드라마를 보면서 느끼는 이 모든 것들이 너무 잔인하고 현실적이지 않은가. 그래서 예습이나 선행학습 같은 부드러운 단어로 내가 이 드라마를 보는 느낌을 설명할 수가 없다. 군입대했을 때도 이렇지는 않았는데. 우리 엄마가 '야 니는 전쟁 준비하는 데 있지만 밖에 나오면 전쟁이야'라고 했었는데. 그냥 그 말이 생각이 난다.


그래서 드라마를 보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굼벵이나 번데기, 뭐 그런 종류의 어떤 형태로 쭈그리고 누워서 숨도 쉬지 않고 정주행을 하다가, 전두엽이 지끈거려서 화장실로 가서는 잠깐 거울을 보고 '이건 드라마야. 나는 리치필드 교도소에 있는 재소자가 아니야. 나는 지금 내 방에서 누워서 5시간째 이것만 보고 있어.' 같은 말을 하면서 정신을 차려야 할 정도다.


그래서 나는 요즘 정신을 못 차리겠다. 별 것 없지만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인 내 세상을 공부하다가 허구의 세상에서 후드려 맞는 꼴이라니. 그리고는 아유 정신 차려야지. 아유 정신 차려야지. 하고서 다시 현실의 솜방망이 펀치에 엎어져서 엉금엉금 기어가느라 요즘 아주 정신을 못 차리겠다 이 말이다.

그러니까 내가 드라마를 보는 건 아주 아주 엄청난 일이다.

그러니까 아까 보던 시즌 5를 마저 조금만 보다가 다시 자야겠다.

어떻게 될까. 아유 정신 차려야지. 그래야 폭동이 진압될 텐데. 어유 정신 차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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