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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석이 Apr 22. 2023

19.11.04 - 커밍아웃이 내게 남긴 것들.

가진 게 나 밖에 없어서요.

#1.

6월. 여름치곤 그렇게 덥지 않은 햇볕이 우리를 쬐었고, 우리는 열과 땀을 쏟아내며 소리 지르고 있었다. 작정한 듯 가열차게 열을 내는 사람들, 온갖 고성과 함성, 고함과 스피커를 때리며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들, 그리고 간간이 섞이는 울부짖는 듯한 질타와 욕설까지. 그야말로 난장이었던 그날. 서울의 도로 한복판에서 올려다본 노을 지는 빌딩 숲. 주황빛으로 터지듯 빛나던 하늘과 사람들의 촬영 세례 가운데에서, 나는


'저 빌딩 층층에서도 이걸 보고 있겠지. 우리를 구경하고 있겠지.'


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얼마나 많은 시선들을 받아내고 있는지 가늠도 되지 않던 그 순간. 피할 수 없이 속속들이 와서 박히는 시선들이 고스란히 느껴지던 순간. 그래서 마음먹고 마음을 놓아버린 그 순간에, 나는 같이 걷던 여느 누구와도 다를 바 없이 빌딩을 향해 소리를 지르면서 손을 흔들어댔다. 날 봐. 마음껏 봐. 실컷 봐라 짜쓱들아. 하면서.


그리고 구경의 대상을 자처하는 그 순간에 모순되게도 해방감을 느꼈다. 구경꾼들에게 나를 보여내는 그 잠시나마의 순간은 내가 처음 경험해 보는 거짓말로 포장하지 않은 스스로의 전시였기 때문이다. 처음 겪어보는 날 것이 된 충격은 짧은 시간에 아주 강한 확신을 하게 했다.




'이렇게 살아야 하겠구나.'




그 행진은 그래서 어떤 선언이었다. 여러 함의가 담긴 운동이었고 퍼포먼스였으며 동시에 존재를 알리는 전시로도 기능을 했지만, 무엇보다도 이렇게 살고 싶다는 공공연한 선포였다. 길가에 서서 신기한 듯 촬영 버튼을 부지런히 누르던 이들은 당연히 누려오던, 그래서 그들에게는 해방이랄 게 없는 이 해방감을 처음 맛본 나는 바나나를 처음 먹은 기영이처럼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정신없는 와중에 나는 내 확신을 따르기로 했다.




나는 그렇게 커밍아웃을 하게 되었다.






#2.


아직도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인생은 그렇게 결정되는 게 아닐까. 한 순간의 선택으로. 선택이 우리를 이끌고 이끌다가 다음 물음을 내놓으면 또 선택을 하면서. 그렇게 선택이 문제를 낳고 다시 또 그 문제가 우리를 새로운 선택지 앞으로 인도하면서 말이다.


다만, 어떤 선택은 '다음 선택을 위한 마음의 준비'를 충분히 할 시간 같은 것은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지 못했다. 모든 건 빠르게 진행되었다. 롤러코스터가 내리막에 진입했을 때 누가 열차를 막을 수 있나. 열차 첫 칸이 미끄러져 내려가니 줄줄이 모든 것이 딸려 내려왔다. 나의 패기 있는 선택은, 다음 문제를 내놓기도 전에 내가 겪어야 하는 무수히 많은 괴로운 선택지들을 단시간에 줄줄이 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시간들은 정말이지 괴로웠고 꽤 한동안 이어졌다.




누군가에게 거부당하거나 거절당하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웠던 나는, 약속이라도 한 듯 당연히 찾아오는 거절과 거부의 시간들을 겪어야 했다. 가끔 연락하던 몇몇 친구들의 전과 다른 싸늘한 반응은 몇 번 겪어도 익숙해지지가 않았고, 종종 알바를 하던 곳에서는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너무도 익숙하고 그래서 더 뻔하게 절망적인 그 상황들에 애써서 다른 이유를 상상해 내서 갖다 붙이는 것이 더 괴로웠다. 그것 말고 또 내가 뭐가 문제인지 이유를 생각해 내고는 그 명분을 계속 곱씹어야 하는 거니까.


나는 예비군 훈련장에서 만난 까마득한 후임이 내 동기에게 카카오톡에 공유된 내 동영상을 보여주며 '김현석 이야기 들었냐'라고 물었다는 소식을, 의연하게 들어 넘기지 못했다. 그들의 의중을 순수한 호기심이나 안부로 여기기에는 소문은 정말 빨랐고, 나는 정말 겁에 질려있었고, 약해져 있었다. 어쩌다 만난 사람들, 친구들이 애써 건네주는 이해와 관용을 먹고살았던 것 같다. 처음 결심했던 마음가짐은 어느새 온데간데없었다. 담담한 척하고 싶었지만, 마음과 다르게 내 마음은 계속 망가지고 있었다.






#3.


부모님이라고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처음부터 최선을 다해주신 걸 이제는 안다. 그리고 그분들도 별도리가 없었음도 안다. 내가 거절과 거부의 시간을 안팎으로 보내는 동안, 반대편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세상이 해체되고, 그걸 다시 조립해야 하는 경험을 했어야 했을 것이다. 나는 그게 어떤 건지 잘 알고 있었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더욱 끔찍한 시간이었다.




그들이 그들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겪어 낼 때까지 나는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다는 것. 나는 짧은 평생을 늘 숨기고 참고 인내하며 기다려왔지만, 용기 낸 대가는 새로운 기다림이었고 그 누구도 나의 기다림에 대해서 그건 당연하지 않고 부당하다고 말해주지 않는 상황. 나는 내가 잘못한 게 없다는 사실을 예습을 통해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점점 죄인이 되는 것 같았다. 고립의 끝에 완벽한 고립.  찬바람이 불다 불다 온기가 싸늘하게 식어버린 내 마음을 내가 부둥켜안고 침대에 누워있는 게 고작해야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견딤이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내가 얼마나 무력하고 나약한 존재인지 수십 번 수백 번 확인할 수 있었고 지독하게 외롭고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기다리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니. 절망적이었지만 그 모든 일들이 일어나고, 그걸 그냥 겪어내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가 힘을 내야 되는데. 힘을 내서 다시 어떻게든 이야기를 해보고 설명을 잘해야 하는데. 내가 잘 이야기해야 하는데 하는 조바심이 가슴 한구석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반대쪽 구석에는 그런 조바심마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게 하는 절망감이 가득 차 있었다. 힘을 낸다고 한들, 설명을 잘한다고 한들 사실 닫혀있는 그들의 마음을 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시간이 지나 괴로움을 딛고 다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때까지, 그럴 수 있는 마음을 먹을 때까지는 잠자코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냥 괴로울 만큼 괴로워하는 것 말고는 달리 방도도 없었다. 원래 가족들과 나누고 싶었던 이야기들이 아주 많았지만 우리에겐 그런 여유도 없었다. 그 시기를 다시 떠올리고 글로 옮기는 게 지금도 조금 힘들다.






#4.


왜 오늘 이 이야기를 쓰려고 했을까. 그 시기를 다시 떠올리는 게 아직도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데 말이다.


사실 처음 커밍아웃을 하고서부터도 불과 몇 달 조금 더 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어쩌면, 여전히 나는 그 시간들을 통과하고 있는 중일 것이다. 나는 여전히 하루에도 몇 번씩 똥꼬충은 죽었으면 좋겠다 같은 이야기를 굉장히 다양한 버전으로 접하고 있고, 사회질서를 위해 내가 희생해야 할 부분을 천천히 읊어주는 친구들의 위로 아닌 위로를 감사하게 받아야 하나 화를 내야하나 늘 고민한다. 내가 그냥 존재하는 것, 살아서 생활하고 있는 것에 대한 혐오는 내 주변에 늘 이렇게 만연해 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의 순간 이후에 분명히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이건 나와 가족들 한 명 한 명의 관계에서 계기가 되어주었다. 우리는 서로로 인한 각자의 불안과 근심 걱정을 나누기 시작했다.




정말 어렵고 힘든 시간이다. 누군가 '다시 태어난다면 또 게이로 살겠냐'라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선뜻 대답하기가 어렵다. 또 누군가 커밍아웃을 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걱정스럽고 염려스러운 마음이 앞설것이다.




어찌 됐건 그 시간들을 온몸으로 두들겨 맞고 나니 또 이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두들겨맞지 않을 때의 간신한 안온함이 이제는 간간히 느껴다. 물론 처음 겪어보는 평온한 시간들이 곧 사라질까 폭풍전야처럼 불안하지만, 아주 조금씩 생활이 어떤 박자나 운율을 만들어내는 느낌 같은 게 느껴진다. 두들겨 맞고, 맞지 않고. 쿵, 짝, 쿵, 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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