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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깨는 현석이 Nov 09. 2019

19.11.09 - 제가 예민하고 꼬인 게 아닙니다.

휴학생 짧은 일기

모두의 말과 행동에는 사실 마음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모두의 그 마음에는 사실 각자의 사정과 맥락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각자의 마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사실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잊고 있을 뿐일 것이다.






당신께 드디어 한마디 하게 되었다.

그가 겪은 희한한 사람의 이야기가 정말이지 나의 이야기라서, 혹시 그게 내가 겪은 일이라는 걸 알고 말씀하시는 건지 여쭤보다가, 그러다가 한마디 하게 되었다.

당신의 역사엔 늘 당신밖에 없다고.

우리는 없다고.

그러자 당신께서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내가 참 많이 반성한다며.


우리만 알 수 있는 이 이야기가 무엇인지 보다 이게 어떤 새로운 시도였음이 요점이다. 본인밖에 모르는 당신께 나와 당신의 역사를 청산하기 위해, 그래서 이제는 좀 안온한 관계를 만들어 보고자 했던.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무모한 어조의 시도였다. 그건 실수였을까. 나는 다른 방법을 선택해야 했었을까.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다만 오늘의 이야기는 당신께서 나에게 되돌려주신, 정말 놀랍도록 익숙한 질문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말이다. 혹시 너는. 그러니까 누군가한테 좀.. 꼬여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나?"


그 한치의 의심의 여지없이 확신에 찬 나머지, 너무 사실을 이야기해서 내가 상처라도 받을까 나를 배려하듯 건네주시는 그 질문에, 나는 화가 났다. 오래 묵은 이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하시는 말씀이 '니가 꼬여서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라는 사실이, 화가 났다는 말로는 다 설명이 안 될 정도로 화가 났다. 당신께서는 오늘 아침 내가 삐졌다고 하셨다. 나는 삐졌다는 말을 정말 싫어한다. 귀엽고 애교스러운 심통이나 토라짐 같은 말로 내 엿같은 기분을 아무것도 아닌 양 말해버리는 것 같아서.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게 나는 너무 익숙해서. 그래서 그 말이 정말 싫다. 아무것도 아니게 돼버리는 것이 나는 정말이지 싫다.



내가 그네들에게 공들여왔던 건 이런 것들이다.

내가 그네들 사이에서도 열심히 노력하면 마치 그네들과 똑같이, 부족한 나지만 그네들 만큼 한 사람 몫을 해낼 수 있음을 끊임없이 보여내는 것. 부족한 만큼 그네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내가 부족한 부분을 최선을 다해 아닌 척하는 것.

그러다가 그러다가 그게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버리고 나서는. 그네들이나 나나 별반 다를 바 없이, 별 수 없는 인간들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고부터는. 내가 뭔가를 증명해내지도, 그리고 그들이 나를 인정해주지 않아도 상관없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반증해내기 위해 끊임없이 빈약한 증거를 찾아내며 내 마음 채비를 하는 것.

그리고 종국에는 내가 그런 것 없이도 본래 독립된 한 인격체였으며, 그러므로 그네들 사이에서 내가 작아질 필요도 커질 필요도 없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네들에게 알리는 것.

그리고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그들이 늘 해오던 것처럼 나를 잘못된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이제는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를 봐주어야 함을 설득하는 것.


이 설득은 때때로 웃기다. 나는 이 설득을 위해 그들이 나의 이야기를 꾹 참고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상대방을 압도할 수 있는 논리와 언변 같은 것을 늘 준비해야만 한다. 내가 딱히 그런 사람도, 사실 그럴만한 상황도 아닌데. 하지만 별 수 없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내 이야기는 들을 가치 없는 징징거림이 되어버리고, 나는 또 그런 애가 되어버리니까. 그렇게 그냥 뭔가 잘못되거나 모자란 사람이 되어 버리니까. 너무도 대단한 그들에게, 나에게 '니가 잘못되었다' 아주 쉽게 평가하던 그들에게 내가 사실 잘못되지 않았음을 역설하는 순간은 그렇다. 내가 온 힘을 다하지 않으면 그들은 아주 작은 힘으로도 나를 충분히 제압해버리고 만다.


참 웃기다. 내가 당신에게 끊임없이 평가당해왔고 이제는 나를 평가하지 말아 달라는 아주 단순한 이야기를. 내가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인지 다시 한번 자격을 증명해내야 요구할 수 있다는 이 모순된 패턴이 정말 지긋지긋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잘해오고 있다고 느꼈는데,  내가 잘하고 안 하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네들은 여전히 나를 예민하고 꼬인 사람으로 보고 있었고 그들이 달리 마음먹어주지 않으면. 그뿐이다.


무력한 나. 애써온 시간이 무색해지게 무력해지는 나. 그렇게 되는 순간을 만드는 그 말들은 그저 아무런 성찰도 반성도 없이 그저 쉽게 내뱉어진 말이겠지만, 나는 그 말 한마디를 극복하기 위해 꾸준히 자기 검열의 시간을 가져왔었다. 늘 평가되어오던 이는 내가 평가의 대상이 아니어도 된다는 증거를 스스로 발견해내기 위해 늘 온 힘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평가해버리는 이들은 정말 모르는 걸까. 그들도 어딘가에서는 아주 쉽게 평가됨을 나는 알고 있다. 결국 그네들도 그리 쉽게 평가되는 일개 한 인간일 뿐이면서 어째서 다른 누군가를 그렇게 쉽게 판단하고 마는 걸까. 나는 정말 온 진심을 다해서 말하고 싶다. 내가 너무 쉽게 잘못된 사람이 되어버리는 그 상황이, 그 기분이 정말 끔찍하게 싫다.


심지어 나는 이제 그네들에게 내가 화냈던 어제의 당위성을 설명해야 할 것이다. 나의 기분과 상황을 아주 철저하게 객관적인 시선으로 봤다고 그들로 하여금 믿게 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충분히 화를 낼만한 상황이었다고도 생각해주지 않았었으니까. 그네들에겐 그냥. 누군가 쉽게 했던 말이 나의 트리거를 건드렸을 뿐이고 나는 그 순간 북받치는 감정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했던 것뿐이니까. 나는 그렇게 예민하고 꼬인 애니까.



오늘은 웬일로 당신께서 사과 카톡을 보내오셨다. 처음 일어난 일이다.


나는 그 사과를 받지 않았다. 술자리 실언이니 잊으라 말씀하시는 사과를 받지 않았다. 나한테는 그 정도의 일이 절대 아니기 때문에. 단순한 술자리 해프닝이라 하기에는 늘 겪어오던 일이기 때문에. 지금 내가 다르게 굴지 않으면 앞으로도 여전할 것임을 알고 있으니까.

나는 오늘 한 자 한 자에 화를 꾹꾹 눌러 담아 당신께 보내드렸다. 내가 그토록 쉽게 말 한마디에 유린되는 사람이 되는 그 상황들이 넌더리 나게 화가 난다는, 그 사실과 사실관계에 대해서 분명히 알지 못하면서 쉬이 사과하지 말라 말씀드렸다. 그리고 나와 당신의 역사에서 당신만 쏙 빠져나와 어떠한 반성도 책임도 없이 쉽게 사과를 뱉는 그 태도를 꼬집었다. 그 놀라우리 만치 무신경함에 분통을 터뜨렸다. 대체 누가 꼬인 거냐고.


그러자 당신께서는 다시 한번 더 사과하셨다. 형식적인 사과가 아닌 진심이라 하셨다. 다시는 실수하지 않으마 말씀하셨다. 나는 나의 분노가 곧장 조소의 대상이 되지 않았음에 한편으로 안도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감사하는 마음을 갖지 않기로도 마음먹는다. 대신 내가 하루 사이 겪은 분노와 허탈한 상실감의 찌꺼기가 내 주변에 둥둥 떠다님을 못 본 체하지 않는 것에 집중하기로 한다. 내가 아니면 누가 내 마음을 알아주겠어. 하면서.


나는 지금 카페 2층에 앉아 창밖을 보는 중이다. 어떤 사람이 아무도 마주 보는 이 없는 허공을 여기저기 찌르듯 바라보며 한자리를 한참을 빙빙 돈다. 그는 곧이어 박수를 치며 박장대소를 한다. 이어폰도 없이. 그는 그걸 한동안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계속 박장대소를 하며 여러 가게의 문들을 열었다 닫으며 유유히 시야 밖으로 벗어난다. 또 어떤 사람은 횡단보도에서 운전하는 이에게 괜스레 눈싸움을 건다. 그리고 아주 아주 천천히 횡단보도를 건너 기어이 운전자가 고성을 내게 한다. 그 사람은 만족스러운 듯 웃음을 터뜨린다.

그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들의 마음은 누가 들여다봐주고 있을까. 그들의 마음은 들여다봐지고 있을까. 있었을까.


정말이지 미치지 않고는 살기 힘든 세상이다. 그래도 어쩌겠어. 그래도 살아야지 어쩌겠어. 그래도 살아야지. 어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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