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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깨는 현석이 Sep 02. 2019

19.09.02 - 일기는 일기장에 쓰라고 하지만.

휴학생 짧은 일기.

#1.

혼자 지내면 쉽게 내 감정에 충실해지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지금 혼자 지내고 있고 그래서 쉽게 불안한 내 감정에 충실해지곤 하는 요즘이다.

오늘은 불안한 마음에 익숙하고 흔하게 호흡 고르기를 하다가 내가 그러고 있다는 사실을 번뜩 발견해버렸다. 천천히 들이쉬고. 천천히 내쉬고. 그러다 보면 감정에 호흡의 박자가 엉겨서 꼬여버리는 걸 막거나 해소할 수 있다. 나는 내가 그걸 하고 있는지 몰랐다. 그냥 하다 보니 내가 그러고 있는 걸 눈치챘다. 그러니까 갑자기 전의 기억이 났다. 깊고 규칙적인 숨 고르기가 너무 귀해서 의식해서 깊고 규칙적으로 숨을 쉬어야만 그 편안함을 겨우 느껴볼 수 있었던 그때. 그리고 그때의 나.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여전히 누군가나 누군가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얕은 숨만 껄떡이며 괴로워한다. 뿐만 아니라 내 미래나 나의 대책 없음처럼 걱정을 야기하는 무언가를 떠올리기만 해도 금방 숨이 가빠진다. 불안이 마음에 가득 차서 숨이 들어설 공간이 없는 아주 희박한 생활. 내 생활은 늘 그랬다.


그래서 늘 불안을 퍼내야 했었다. 그러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하지만 불안은 끊임없이 내 마음을 채워냈고 나는 이 지긋지긋한 감정의 뿌리를 뽑기로 결심했었더랬다. 그게 뭔지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그저 제발 좀 편해지길 원했다.


그리고 지금.

‘내 마음을 무언가가 가득 채우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거기에 뭐가 차 있느냐에 따라서 내가 뭘 할 수 있는지가 달라진다는 사실.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이 어떤 감정이라는 사실.

때에 따라 변하지만 내 감정은 보통은 불안이나 걱정, 두려움이며

그 감정을 만들어내는 다른 감정이나 마음속 깊은 곳의 어떤 기억이 있다는 사실.

내 마음속에 그런 감정들이 가득 차있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뭐라도 하던지 / 아무것도 할 수 없던지’ 두 가지의 선택지뿐이었다는 사실들‘ 내 마음에 관한 사실들을 하나하나씩 깨달아가는 단계를 하나씩 밟아온 지금.


많은 부분이 달라졌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아직도 여전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여전하지만 많이 달라졌다. 나는 여전히 관심받고 싶어 하지만 내가 관심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는 걸 이제는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여전함과 다름을 발견하고, 여전히 글을 쓰고 싶어 하지만 글을 그럴싸하게 써 내려가는 것보다 얼마나 진짜 내 이야기를 쓰고 있는가가 더 중요해졌다는 점에서 또 여전함과 다름을 발견한다.

나는 그 여전함과 달라졌음을 구분 짓는 모호한 경계를 계속 관찰하고 탐구하고 기록하고, 그 여전함과 달라졌음의 사이에서 나인 것과 내가 아닌 것을 발견한다.

그러니까 이건 여름방학 숙제로 관찰일기 같은 걸 썼던 거랑 비슷한 것 같다. 단지 대상이 강낭콩이 아니라 나일뿐이다.


#2.

어쩌면 오늘의 일기는 사실 ‘이런 글을 대체 왜 써서 올리냐'에 대한 궁색한 변명이다. 당장 스스로 ‘대체 이런 글을 왜 자꾸 써서 올리는 걸까’에 대해서 계속해서 묻고 답하기를 해왔으니까.

다른 큰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나에게는 이렇게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순간순간이 도전이고 정면 돌파다. 약간 충격요법 같은 그런 거. 사람들에게 못났건 아니건 내 모습을 그대로 오픈하는 것은 나의 경우, 내 불안함의 근본적인 원인을 깨부숴버리는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일기는 일기장에 쓰라고 하지만, 일기를 오픈하는 게 마치 대단한 도전처럼 느껴지는 나 같은 사람들 분명 있을 것이다. 그 사람들이 내 글을 봤으면 좋겠다. 분명 고립되어서 스스로도 스스로를 가둬버린 사람들이 있을 거다. 나는 알고 있다. 나 같은 사람들이 분명 있을 거다.


나는 나를 포기한 적이 없다. 나는 아직도 여전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여전히 언젠가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편한 마음과 편한 호흡으로 지낼 수 있게 되는 날을 꿈 꾼다. 나는 이 시간들을 어떤 방법으로든 겪게 될 것이고, 다 겪어내고 나면 결국 이 시간들을 돌아보며 그땐 그랬지 같은 말을 하는 순간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설거지 같은 걸 하다가 지금을 떠올리면서 으, 그런 글을 막 써서 올리다니 진짜 최악이야 같은 말을 하면서 웃을 수 있을 때가 왔으면 좋겠고, 그때가 얼른 와서 지금을 막 부끄러워하다가 다시 곰곰이 지금을 생각하다가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나는 그런 별것도 아닌, 지금과 크게 다르지도 않을 보통의 날을 꿈꾸며 계속 이 짓거리를 할 것이다. 계속 이런 글을 쓰면서, 여전함과 달라졌음의 모호한 경계에서 나를 발견하면서, 내 모습을 드러내고 숨을 천천히 들이쉬고 내쉬면서. 그러면서 언젠가는 깊고 편한 숨을 일상적으로 쉬면서 살 수 있는 날을 계속해서 바랄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나와 같다면 당신도 당연히 그럴 수 있기를 계속 바랬으면 좋겠다. 나는 나와 당신이 그럴 수 있기를 계속 바랄 것이다. 내가 이 짓거리를 멈추지 않는 이상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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