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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fly) 반딧불, 중식이

by 구작

몇년 전 한파경보가 있었던 겨울에

야근을 하고 느즈막히 퇴근하던 마을버스 안에서

습관처럼 보던 커뮤니티의 유머게시판에서 '나는 바딧불' 노래를 알게 됐다

그 글의 제목은 "차태현이 힘들 때마다 듣는다는 노래"였다

그 글의 노래는 '그래서 창문에 썬팅을 하나봐'였다

어느 예능프로그램에서 차태현이 좋아하는 노래라고 소개했나 보다


'집에 오는 길이

너무 쓸쓸해

너무 쓸쓸해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도 가끔은 울어도 된다

...

누가 날 흉볼까 고갤 숙이고

아! 그래서 창문에 썬팅을 하나 봐

혼자 원 없이 울고 싶어서

맞아 그래 나도 가끔은 울어도 된다

...

나도 울 수 있어요 나도 울 수 있어요

나도 맨날 틀리고 후회해요

나도 너무 떨리고 무서워요

다 큰 어른도 울어요

상처를 받아요 상처를 받는다구요(후략)'

<그래서 창문에 썬팅을 하나봐>


'아재 가슴을 휘어파는구나~' 추천 박고

그 글에 달린, 그 가수의 다른 노래 추천 댓글에 나는 노래 하나를 더 들었다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

그래도 괜찮아 난 눈부시니까

하늘에서 떨어진 별인 줄 알았어요

소원을 들어주는 작은 별

몰랐어요 난 내가 개똥벌레라는 것을

그래도 괜찮아 나는 빛날 테니까(후략)'

<나는 반딧불>


그날밤 나는 이 두 노래로 밤을 지새웠다

'나는 개똥벌레가 맞는데, 나도 빛날려나?'


'나는 반딧불' 노래 가사는 심상치 않았다

보통 반딧불이를 주제로 작사하면

'벌레지만 괜찮아. 우린 반짝이며 날 수 있으니까!'라고 희망을 던졌을 터인데

이 노래는

'나는 별인 줄 알았는데 내가 벌레라네? 괜찮아 나는 빛날 테니까'라고 말한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다시 오른다

별은 착각이고

벌레는 실제이며

빛날 것이란 기대는 소망이다


작년 가을부터 이 노래는 수능곡으로 알려지면서 빌보드까지 진출했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는 역주행, 인생역전의 아이콘이 돼 유퀴즈에도 나왔다

가난했던 청년은 맨몸으로 상경해 죽을 고비까지 넘기면서 버티고 버텨 드디어 세상의 '성공'을 맛봤다

며칠 전 인디음악에 관심 없는 아내가 들어보라며 이 노래를 추천했다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가 별에서 벌레로 낙조하다가

'괜찮다 괜찮다' 다짐할 땐 하늘을 뚫을 듯 힘을 쏟아냈다

수능을 앞둔 수험생들에게 얼마나 힘이 됐을지 가늠이 됐다


그런데 이건 내가 아는 노래가 아니었다

내가 들었던,

그 밤을 지새우게 만들었던,

마흔둥이 아재의 벗어놓은 하루를 뒤흔들었던 그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 목소리는,

신발에 무수히 긁힌 시멘트 바닥이었고

칼칼한 장칼국수였고

무주 깊은 계곡에서 으르렁대는 삵이었으며

글라스에 가득 채워진 진로 오리지널이었다


역주행은 황가람이었고

그 밤에 함께한 건 중식이였다


10년 전 슈퍼스타K7에 나와 잠깐 반짝인 적이 있었던 중식이는 '흙수저 밴드' '촌(村)스락(Rock)'이란 키워드로 설명됐다

방송에서 이슈가 됐지만 방송이 끝나자 마자 다시 참치배달 알바를 해야했다고 한다

무명가수가 힘든 건 특이한 일도 아니다

무명가수가 배달하고 노숙하는 건 그들 사이에 생색낼 일도 아니다

내가 중식이에게 연민을 가진 건 그의 이별 노래 때문이었다

한 살 많은 여자친구와 크리스마스 이브에 헤어진다

아이를 낳고 싶다는 여자친구를 그는 품지 못한다

막노동하면서 노래하는 남자가 어찌 가정을 꿈꾸랴

그는 '아기를 낳고 싶다니'란 노래로 매몰차게 그녀를 밀어냈다


"아기를 낳고 싶다니 그 무슨 말이 그러니

너 요즘 추세 모르니?

헤어지잔 말이 아니야 나 지금 니가 무서워

너 우리 상황 모르니?

난 재주 없고 재수도 없어

집안도 가난하지 머리도 멍청하지

모아 둔 재산도 없지

아기를 낳고 결혼도 하잔 말이지?

(하략) "


사랑하는 여자에게

둘의 사랑을 잉태하자는 여자에게

어떻게 이렇게 모진 말을 할까

"못난 놈"

뱉고 나서 가슴이 아린다. 누구나 그렇다

상대의 부족함보다 나의 부족함을 느낄 때 더 화가 나지

자신감보다 자존심 상할 때 더 무력해지지

과거보다 미래가 절망적일 때 더 바보가 되지


그로부터 10년이 지났다

'나는 반딧불'은 유튜브와 빌보드, 유퀴즈를 거치며 히트곡이 됐다

황가람의 반딧불은 별이 됐다

중식이의 반딧불은 이제 갓 개똥벌레를 벗어난 것 같다


중식이가 보고싶어져 찾아본다

다행히 꾸준히 공연을 해오고 있다

중식이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졌는데

10년 전 인터뷰 말고는 찾기 힘들다

중식이가 보고싶다

우리는 이런 '중식이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오늘의 중식이를 생각해 본다

황가람이 채워준 저작권료로 두둑해진 호주머니로 술집에 있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수육에 진로 오리지널을 가득채운 글라스 앞에 앉아있다

테이블은 비어있고 식당 사장님이 켜놓은 티비는 눈치 없이 재잘거린다

글라스를 입에 털어놓은 중식이가 티비를 본다

금요일의 티비는 화목하고 웃음이 넘친다

중식이 눈에서 개똥벌레가 꽁무니를 반짝인다

나는 자리를 옮겨 그의 앞에 앉는다

글라스에 소주를 가득 채운다

"팬입니다"

건배.


중식이의 반딧불이가 별까지 닿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창문에 썬팅을 하나봐>

https://youtu.be/zdCsEk_7ZUg?si=qGNAx_qBCW4rrbbw


<나는 반딧불>

https://youtu.be/qgpnmorv2Ss?si=HuofWUupT6SgSn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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