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간 줄 알았던 아빠가 학교 앞에서 나를 기다린 건 나흘 째 날이었다
나흘 간 노숙을 했는지 꾀죄죄한 모습이었다
삐걱거리는 SUV에서 창문을 열고 하교하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웬일인지 궁금했지만 서둘러 올라타 출발하길 기다렸다
"잘 있었냐?"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뭘
"그렇지, 며칠 안 됐지."
-한두 번도 아니었으면서 그래
"그렇지, 너도 익숙해졌겠네."
-이번엔 어디 다녀왔는데?
아빠는 대답대신 내 머리를 헤집었다
도리질로 아빠 손을 물리치고 고개 돌려 창밖을 봤다
엄마 손을 잡고 집에 가는 친구가 참새처럼 팔딱팔딱 뛰고 있었다
우회전이 집 방향인데 차는 좌회전을 했다
"엄마 좀 보고 가자."
-곧 퇴근하실텐데?
아빠는 말이 없었고 나도 따라 침묵했다
도로 옆 2층 건물이 엄마가 일하는 직장이다
부동산중개소인데 엄마는 직원이고 사장은 따로 있다
1층은 사무실이고 2층은 응접실처럼 쓴다
사무실이지만 단독주택처럼 예쁜 건물이다
엄마는 특히 통창으로 된 2층을 좋아했다
신축 대단지 아파트 옆에 있어 2층에서 보이는 건 아파트뿐인데도 엄마는 그 풍경이 좋다고 했다
손님에게 집을 보이고서는 꼭 2층에서 커피를 대접한다고 했다
푹신한 쇼파에 앉아 엄마가 내려주는 커피를 마시며
통창으로 보이는 신축 아파트를 보고 있노라면
신혼부부든 저물어가는 노인이든 영끌을 해서라도 집을 사게 된다고 했다
언젠가 엄마도 저 집을 사고 싶냐고 물었더니
엄마는 그런 마음이 드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파서 안 한다고 했다
무슨 말인지 잘 몰랐지만 엄마가 아프다니 그 아파트가
내 공을 어디론가 튕겨버린 학교 뒤 옹벽처럼 느껴졌다
아빠는 부동산 건너편에 차를 세웠다
엄마 사무실에서 대각선 방향에 있는 골목 안이었다
아빠는 내리지 않고 가만 부동산을 보길래 나도 좀 더 편하게 앉아 바라봤다
엄마가 2층에 있었다
감색 H라인 스커트에 아이보리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그 블라우스는 촉감이 좋아서 엄마가 그걸 입고 퇴근하면 엄마 배에 고개를 묻고 부비곤 했다
엄마는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하면서 서있었다
한 손에는 머그잔을 들고 있었다
부동산을 나가면서 살이 점점 빠지는 엄마는 그 건물에 어울리게 예뻤다
"엄마가 너를 키우면서 집에 있을 땐 저런 옷이 어울릴 줄 몰랐다."
나는 아빠를 돌아봤다
홀로 떠나려고 SUV에 짐을 가득 채울 때의 눈이었다
"내가 예전처럼 전시회를 해서 돈을 잘 벌었다면 엄마는 더 편한 옷을 입고 이 시간이면 네가 좋아하는 불고기를 만들고 있었을 거야."
-난 엄마가 저렇게 예쁘게 입는 것도 좋아
"엄마는 내 럭비티를 입어도 예뻤어. 젊었을 때 엄마 친구들이 아무리 꾸며봤자 엄마보다 예쁠 수 없었지."
엄마를 다시 봤다. 그때까지 엄마는 통화를 했고 과장된 손짓을 하며 웃고 있었다
-아빠는 떠날 거야?
"떠나는 게 아냐. 찾아가는 거야."
-뭘?
"내가 편한 곳."
-그게 어딘데?
"새와 바다가 있는 곳."
-그런 곳에서만 사진 찍을 수 있어?
"전에는 사람도 찍었는데 이젠 사람을 찍을 수 없어."
-왜?
"사람을 찍으면 괴물이 찍혀."
-엄마처럼 예쁜 사람을 찍으면 되잖아?
"찍는 사람이 괴물이라 누굴 찍어도 짐승이 돼."
어른들은 왜 어렵게 말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아빠는 그렇게 가끔 멋있어 보이려는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고 엄마와 아빠가 싸우는 건 순전히 말을 제대로 못하는 아빠 탓이라 생각했다
엄마가 창문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대각선이 아닌 정면이었기에 우리가 아니었다
키가 크고 마른 남자가 허우적거리듯 성큼성큼 사무실로 향한다
그의 양복이 엄마 손처럼 팔랑인다
부동산 사장이었다
사장은 사무실로 들어갔고
엄마는 새로운 머그잔에 커피를 따랐다
사장은 이층으로 연결된 계단을 올랐고
엄마는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사장이 이층에 나타났고
엄마는 머그잔을 건넸다
엄마가 살짝 참새처럼 뛰었던 것 같았다
사장이 엄마 어깨에 손을 올리는가 싶더니
엄마가 창을 돌아보고 블라인드를 내렸다
우리가 보이지도 않았을텐데 나는 순간 오금이 저렸다
아빠의 표정이 궁금했지만 엄마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빠는 시동을 켜고 차를 움직였다
블라인드가 채 가리지 못한 엄마와 사장의 발이 서로의 경계를 넘어 섞였다
차는 완전히 부동산 사무실을 등지고 달렸다
지는 해가 엄마 사무실을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차창 앞을 바라보니 옅어진 해가 낙조하고 있었다
약해진 햇빛에도 내 눈은 찌푸려졌다
눈을 감아야 했다
"집에 데려다줄게."
눈을 뜨기 힘들었다
"오늘 일은 엄마에게 말하지 마."
-아빠는 언제 돌아올 거야?
아빠는 말이 없었다
낙조가 아빠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