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골목 미용실 옆에 네일샵이 생겼는데 글쎄 남자가 하더라."
현주가 쇼파에 앉아 복실이와 놀면서 말했다
-남자 미용사, 남자 왁싱사도 있는 마당에 남자 네일사장님도 가능하지 않겠어?"
"넌 남자 왁싱사에게 맡길 수 있어?"
-그건 아니지만 네일샵을 남자가 못하란 법은 없단 말이지
"넌 남자에게 네일 받을 수 있어?"
-못할 건 없지? 하지만 하진 않지
"왜?"
-굳이? 보통은 여자가 꼼꼼하게 잘하니까
대문자 T인 해인은 허투루 시간을 쓰지 않겠다는 소신대로 엄격했다
"그런데 그 남자, 엄청 섬세해."
현주가 복실이를 무릎에 앉히고 두 손을 목덜미에 깊이 박은 채 무심히 말했다
평소답지 않게 진지한 분위기다
현주는 원래 시시콜콜한 얘기를 많이 해서 해인은 듣는둥 마는둥 하는 편인데 귀가 열렸다
"수정이가 얼마 전에 집에 오다가 새로 생긴 집이길래 들어가봤대. 남자라서 움찔했는데 다시 나오기 뭐하니 그냥 앉아서 받았다는 거야. 그런데 다른 데하고는 달랐대."
수정은 그날 연봉협상에 실망해서 점심시간에 회사를 나왔다
'이놈의 회사에 내가 뼈 갈아가며 일할 필요가 있겠냐!'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나왔는데 막상 갈 곳이 없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 새로 오픈한 네일샵을 발견했다
동결된 연봉을 생각하면 네일이 사치겠으나
언 마음을 녹이는 데 네일만큼 가심비 좋은 게 있으랴
수정은 문을 밀고 들어갔고 생각치 못한 남자 사장을 발견했다
드릴을 갈고 있던 남자는 반갑게 인사했다
네일샵, 남자
드릴 날, 가늘고 긴 손
말끔한 턱, 긴 머리칼
깊고 긴 인중, 붉은 입술
초 단위로 불협화음의 이미지들이 들이닥쳤다
예쁜 입술로 띄우는 미소에서 빠져나오니 수정은 자리에 앉아있었다
남자 : 예쁜 손이시네요. 조금 관리가 필요하지만 네일하시면 손이 더 환해질 거예요
수정 : 그럴까요? 손이 환해진다 어둡다,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남 : 오늘은 눈이 와서 좀 어둡게 보여요. 화이트가 필요할 것 같아요. 생각하신 디자인이 있으세요?
수 : 아무 생각 없어요. 생각하지 않는 게 오늘의 목표거든요
남 :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 여쭤도 될까요?
수정은 원하는 연봉을 받을 수 없다는 얘기를 할 수 없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무능력해 보일 수 있으니까. 회사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고 회사를 그만둘지 필요 이상의 일은 하지 말아야 할지 전략적으로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가만 듣던 네일샵 남자는 다시 미소를 띄웠다
남 : 꽃을 그려도 될까요?
수 : 제 나이에 맞을까요?
남 : 꽃이 어울릴 나이실 것 같은데요. 그런데 제가 그릴 꽃은 나이보다는 오늘 기분, 그리고 내일을 사는 직장인에게 맞는 디자인이 될 거예요
수 : 오늘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으니 사장님이 알아서 해주세요
남자는 다시 웃고 수정의 손톱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남자와 수정의 대화는 샵에서 흔히 하는 대화들로 이어졌다
무슨 일을 하는지, 이 동네에 오래 살았는지, 저녁은 뭘 먹을 건지, 눈이 오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는지
이야기들이 흘러가면서 수정의 손톱이 꾸며졌다
전체 손톱에 하얀색 젤 매니큐어를 바른 후 가는 브러쉬를 들어 빨간색 물감을 묻혔다
왼손으로 수정의 손가락을 받혀드는데 손가락 끝이 붉게 물든다
남자는 하얀색 도화지 위에 붉은 꽃을 천천히,
마치 꽃을 틔우듯 그린다
붉은잎 대여섯 장이 포개지고 노오란 꽃술이 몇가닥 그려졌다
수 : 동백이네요
남 : 겨울에 꽃이 피어서 동백이래요. 흰 눈 위에 있는 것 같지 않아요?
수 : 이쁘긴 하지만 전 눈 위에 떨어져있는 동백꽃을 보면 처연해요
남 : 온 몸을 던진 논개 같기도 하죠
수 : 이게 왜 직장인에게 어울릴까요?
남 : 저는 꽃봉우리째 떨어지는 동백에게서 책임감이 느껴져요. 꽃은 수정을 해야 한다는 생의 이유를 떠나 우리에게는 예쁜 모습을 보여주잖아요. 그 의무를 생이 끝날 때까지 다하는 것 같아요. 입이 떨어지면 사지가 찢긴 꽃 같잖아요. 비록 땅에 떨어졌지만 동백꽃은 꽃 자체로 남아 마지막까지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전하죠. 대단한 직업의식이라고 생각해요
수정은 '직업의식'에 처연해졌다. 마치 남자가 자신에게 좀더 일에 책임을 가지라고 전하는 것 같았다
남자는 손톱마다 꽃의 크기, 위치를 달리하면서 다양한 동백을 그렸다
동백이 많아질 수록 수정은 자신의 직업의식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손님이 불쾌할 수 있는데도
손님의 시간을 환하게 해주려는 남자의 직업의식도 느낄 수 있었다
이 이야기를 수정이 현주에게 했을 때 현주는 의자에 손톱을 갈고 있었다
현주 : 나도 네일할 때가 됐는데
수정 : 빨리 예약해봐. 그리고.....
수정은 비밀이라도 되는양 현주에게 속삭였다
"그 남자, 손이 따뜻해."
현주는 복실이를 입원시키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이제 늙어서 산책도 힘들어하는 복실이는 속병도 났다
어쩌면 부쩍 따뜻해진 봄볕에
'이런 게 행복이구나' 느낄 때
모가지채 떨어지는 동백꽃처럼
복실이는 무지개다리를 건널 수도 있을테다
그런 생각에 복실이를 안고 병원에 갈 때보다 두 다리가 더 무거워졌다
집에 오는 길에 네일샵이 떠올랐다
현주는 수정이 그에 대해 말한 모든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얼굴도 섬세함도 따뜻함도 그의 인사 한 마디로 간파했다
"어서 오세요, (현주를 보고) 우선 먼저 앉으세요. 페퍼민트 차 괜찮으시죠?"
따뜻한 차를 마시니 몸이 가벼워졌다
복실이가 편하게 자고 있을 것 같았다
현주는 남자에게 복실이 얘기를 했다
남자는 현주의 손가락을 떠받히고 복실이가 좋은 엄마에게 왔다고 했다
남자가 복실이를 그려도 되겠냐고 묻자
현주는 짧고 넓은 손톱에 몇번 복실이를 그리다 망했던 일들이 떠올랐다
남자는 웃고 있었고 현주는
왠지 모를 믿음이 생겼고
지금이라면 망가진 복실이라도 같이 하고 싶다는 생각에 손을 맡겼다
한 시간 후 자리에서 일어서는 현주는 행복했다
남자가 해준 네일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해인이는 현주의 이야기를 듣고서 현주의 네일이 궁금해졌다
현주는 복실이 털에 박혀있던 손톱을 꺼내들었다
기대한 디자인이 아니었는지 해인이의 눈이 커졌다
해 : 뭐지? 이 왜놈 삼각김밥은?
현 : 너 그럴 줄 알았다
남자는 현주 손톱 전체를 하얗게 칠한 후 가운데에 검은 세모를 그렸다
현주가 보기에는 선처럼 보이는 긴 세모였다
그리고는 현주의 손가락을 접어 주먹을 쥐게 했다
남 : 이렇게 접으면 세모들이 손님 손 안으로 들어오잖아요. 이 손톱들이 복실이 발톱처럼 보이지 않아요?
복실이가 손님 손을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이려고 했는데 어떠세요?
설명을 듣고 보니 그럴싸했다
하얀 발에 검은 발톱이 현주의 손에 얹어진 것 같았다
복실이 발톱이 좀 더 길었지만 중요한 건 아니었다
남 : 저는 좋아하는 사람의 손을 잡는 걸 좋아해요. 제게 발을 잘 주던 아이가 있었어요. 마지막 순간에도 발을 잡고 있었는데 힘들어서 눈도 못 뜨는 상태였는데도 발에는 힘이 들어있더라구요. 마침내 내 손에서 스스르 발이 빠질 때 저는 발톱 몇개를 잡고서 많이 울었죠
현주는 돌아오는 길에 복실이의 발톱을 기억하려 애썼다
부정하고 밀어내도 계절처럼 자연스레 찾아올 무지개다리 앞에서
복실이는 신발 벗듯 자기 발톱의 무게를 현주 손 안에 남겨두고 갈 것 같았다
"이 귀여운 얼굴은 내 눈에 담고
이 복실한 털은 내 볼에 기억될 테고
이 따뜻한 심장은 내 심장에서 같이 뛸 거고
이 발,
이 앙증맞은 발은 내 손에서 영원히 뛰겠지"
현주는 복실이 털 속에서 손을 들어 해인에게 보였다
해인은 그제서야 손톱에 있던 삼각김밥이 복실이 발톱이라는 걸 알게 됐다
이튿날 해인은 볕 좋은 오후에 집을 나섰다
현주가 한껏 풀어놓고 간 네일샵 얘기에 경칩의 개구리처럼 깨어났다
집 앞이지만 모처럼 네일 받는 거라 외출복을 꺼내 입었다
하얀 플레어 스커트에 하늘색 가디건을 받혀입었더니 겨우내 붙은 군살도 느껴지지 않았다
따뜻한 봄볕이 구두코에 닿아 반짝였다
발밤발밤 거니는 해인의 구두 뒤축이 야무졌다
마주 앉은 해인과 남자는 줄다리기를 하듯 팽팽했다
남 : 어떤 디자인을 하고 싶으세요?
해 : 생각한 건 없어요
남 : 유행하는 디자인을 보여드릴까요?
해 : 유행을 따라하고 싶지 않아요
남 : 그럼... 뭐를 좋아하세요?
해 : 모르겠네요. 특별히 다른 것보다 좋아하는 어떤 것이 있지는 않아요. 굳이 꼽자면... 미니멀리즘?
남 : ^^
해 : -_-
남 : 피부는 여름쿨톤이신 것 같은데 시원한 색으로 해볼까요?
해 : 저를 그려주세요
남 : 네?
해 : 손톱에 저를 표현해주세요
남 : 손님이 어떤 분이신지 제가 아직 알지 못하는데...
해 : 보이는 대로 그려주세요
남자는 해인을 한동안 가만 바라봤다
해인도 남자의 눈을 피하지 않고 봤다
남자가 해인의 손가락을 잡고 작업을 시작했다
남자는 엄지와 검지 그리고 새끼 손가락을 짙은 남색으로 칠했다
해인은 밤하늘을 떠올리면서 그가 별을 그린다면 잘못 온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짙은 남색에 옅은 물결 무늬 그라데이션을 넣었다
'은하수?', 해인은 살짝 실망했다
세 손톱을 다 마칠 때까지 중지와 약지는 비어있었다
남자는 중지와 약지를 아이보리 색으로 칠하고
가는 브러쉬에 다시 남색을 묻힌 후 그림을 그렸다
약지에 머리통과 옆지느러미가,
중지에 몸통과 쌍엽 꼬리를 그렸다
고래였다
머리가 크고 네모진 향유고래였다
남 : 향유고래는 이빨을 가진 고래 중에 가장 큰 고래죠. 또 가장 바다 깊이 잠수하는 고래이기도 해요. 바닷속으로 무려 3킬로나 내려갈 수 있대요. 그 깊은 곳에서 두 시간까지 헤엄칠 수 있답니다.
우리가 실제 보기는 어려워요. 큰바다에 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향유고래에서 기름을 얻으려고 인간들이 많이 잡아버렸죠. 소설 '모비 딕'을 아세요? 자기 다리를 씹어먹은 향유고래를 잡으려는 선장의 이야기죠.
향유고래는 지금도 태평양, 인도양, 어떨 땐 북극도 가고 때론 우리나라 연안 근처까지 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대체로는 바다 깊은 곳에서 지내죠. 심해가 좋나봐요
해인은 고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네모진 머리가 믿음직스럽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 머리 아래에 상처처럼 그어진 입이 있었다
대왕오징어도 씹어먹는 무서운 입이라지만 수줍음을 입술로 깨물고 있는 듯 보였다
허리인 듯 한 몸통 가운데에 작은 눈이 있었고 팔뚝만한 이빨들과 달리 소심해보였다
그래서인지 향유고래는 조용한 심해를 선택해 침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남 : 손님은 심해에서 떠오르는 향유고래일 수 있어요
수면으로 오르길 원치 않아 심해를 택했지만 한번씩 수면 위로 올라 분수처럼 물을 뿜어야 숨이 틜 겁니다. 윗쪽 물로 오르는 걸 무서워한다면 영원히 심해에서 잠들고 말 거예요. 은빛으로 물든 수면에서 나무 같은 분수를 뿜는 자신을 그려보세요. 멋지지 않나요?
해인은 집으로 곧장 가지 않고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에 가까워질 수록 발걸음이 빨라졌다
공원이 눈에 보이자 해인은 뛰기 시작했다
심장이 뛰어서
가슴이 벌컹거려
그 박자보다 빨리 뛰고 싶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내 속을,
누구에게도 들키기 싫은 내 짐을,
생면부지 그 남자가 알아챈 것 같아
창피해서
이 심장은 달려서 뛰는 거라고
그러니 나는 여전히 비밀스럽다고
애써 자위하면서 심장이 터져라 뛰었다
총총총 달리는 해인의 눈을
뚝뚝뚝 물방울 점들이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