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엄마 뱃속에 있을 때를 기억해요
제가 맺히고 두 달째부터 생각나요
아빠와 엄마가 아주 기뻐하셨죠
엄마는 입덧이 심했어요. 뭐든 게워냈죠
저는 배가 고팠는데 엄마는 먹지를 않았어요
다섯 달이 돼서야 엄마는 입덧이 줄더라고요
그때 저도 부쩍 잘 먹어서 저 스스로 커가는 걸 느꼈어요
세상이 궁금해 엄마 배를 톡톡 건드리기도 했어요
그럼 엄마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아빠를 불렀죠
아빠는 제 손 바깥에 볼을 대고 저를 느꼈어요
아빠가 어떤 얼굴인지 볼 수는 없었지만 볼이 따뜻하니까 좋은 사람이고 생각했죠
6개월이 되니 제 손이 동전만해지고
허벅지도 제법 두꺼워졌고
코도 오똑해졌죠
그리고 저는 머리가 무거워져 뒤집혔어요
자궁경부로 머리가 내려가고 발이 엄마 배쪽으로 올라갔죠
처음에는 너무 놀라 다리로 엄마 배를 힘껏 찼어요
그랬더니 엄마가 소리 지르며 방바닥을 구르시더라구요
제가 커지니까 엄마는 허리가 아프다고 했어요
방광을 누르니까 자주 화장실을 가시더라구요
엄마는 저처럼 손발이 커졌어요
살이 찐 게 아니라 부은 거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매일 밤 아빠가 엄마의 손발을 주물렀어요
아빠가 주무르다가 잠들면 엄마는 울었어요
엄마는 잠이 안 오나보더라구요
울면서 제게 가만 있어달라고 부탁했는데
제가 그럴 수 있겠어요?
그 좁은 공간에서 가만있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엄마는 모르나봐요
저는 엄마가 바보 같아 더 힘껏 엄마 배를 찼어요
제가 너무 심했을까요?
엄마는 아빠에게 너무 힘들다고 했어요
아빠는 조금만 더 참으라고 했어요
며칠 후 엄마는 울면서 힘들다고 했어요
아빠는 엄마의 하소연을 듣기 싫었는지 집에 늦게 들어왔어요
그 주 주말에 엄마는 잠자는 아빠에게 화를 냈어요
"나는 잠 못 자서 힘든데 잠이 와?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기나 해?
애를 낳아도 당신은 쳐다도 안 보겠네
키울 때도 나 혼자 키워야 하는 거야?
그렇거면 내가 애를 왜 낳아
지금이라도 안 늦었으니까 얘를 지워버릴 거야!"
아빠가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었어요
잘하겠다고 약속했어요
좋은 말들로 엄마에게 다짐했어요
아빠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이 안 나요
"지워버릴 거야" 한 마디로 그 작은 뇌가 가득찼거든요
엄마는 나를 미워했어요
그래서 제가 태어나고도 잘 돌보지 않았죠
기저귀를 제때 갈아주지 않아 엉덩이가 따갑기도 했어요
울다가 잠든 적도 많아요
유치원 등원 첫날, 스타킹에 구멍이 나있기도 했죠
소풍 도시락에 귀여운 동물 주먹밥도 없었어요
초등학교 5학년부터는 머리도 땋아주지 않았어요
수학여행 때 입고 싶었던 원피스가 있었는데 사주지 않았어요
아빠는 저를 사랑했어요
언제나 웃는 얼굴로 절 바라봤어요
저를 목욕시켜주기도 했어요
주말이면 같이 나란히 누워 낮잠을 잤어요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꽃다발을 선물해줬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무등을 태워줬죠
졸업할 때는 시계를 선물해주셨어요
그런 아빠가 중학교 1학년 때 갑작스레 병으로 돌아가셨어요
엄마는 나보다 아빠를 사랑했는지
아빠가 병으로 돌아가시자 더 저를 방치했죠
아직 '미성년'이란 딱지를 달고 있었지만
어른들의 고통을 충분히 경험하며 컸죠
저는 엄마에게서 도망치고 싶어서 일찍 결혼했어요
나이가 많았지만 아빠처럼 저를 이끌어주는 남자였어요
결혼할 생각은 없었는데 남편은 불도저처럼 결혼을 추진했어요
눈 떠보니 결혼식장이었던 거죠
결혼 준비하면서 많이 싸워서 엄마에게 파혼하고 싶다고 하니 엄마는
"교회 사람들에게 다 알렸는데 파혼하면 나는 어떻게 얼굴 들고 다니니!"라고 했어요
엄마는 저보다 사람들 시선이 중요했나봐요
결혼 2년만에 아이를 가졌어요
신혼생활이 순탄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가 달갑지 않았어요
그래도 아이가 생겼으니 잘 키워보고 싶었어요
아이에게 좋은 말을 많이 했죠
아이가 제 말을 들어줄 것 같았어요
남편은 제 말을 안 들어줬거든요
저는 몸이 약했어요
입덧도 심했으니 임신하고 더 약해졌죠
그래서 아이가 크니까 힘들더라구요
태동도 처음에는 반가웠지만 움직임이 커질 수록 너무 힘들었어요
아이에게 가만 있어달라고 부탁까지 했을 정도죠
남편은 도와주는 게 없었어요
심지어 거의 매일 술 마시고 늦게 들어왔어요
손발이 탱탱 부어서 오무려지지도 않는데 주물러주지도 않더라니까요
배가 커지니까 더 힘들었어요
아이는 발로 배를 뻥뻥 차지
소변은 마려운데 막상 변기에 앉으면 졸졸졸 흐르다 말지
요실금처럼 팬티에 잔뇨가 묻을 땐 비참하기까지 했어요
밤에 잠도 안 와서 못 자는데
술 처먹고 들어온 남편은 코를 골며 잤어요
너무 미워 발로 찬 적도 있어요
그런데도 남편은 나아지지 않았어요
술자리는 끊이지 않았고 심지어 여자랑 단 둘이 술 먹기도 했죠
직장동료라지만 한 달 새 단 둘이 세 번이나 술 먹는 건 잘못됐잖아요?
남색 양복 어깨에 여자의 파운데이션이 묻어있던 날
저는 남편에게 내일 해 뜨자마자 병원 가서 아이를 지워버리겠다고 했어요
선생님,
제가 심했나요?
저는 아이를 지울 마음은 없었어요
남편을 정신차리게 만들고 싶었던 거죠
아이가 태어나도 남편은 나아지지 않았어요
저는 온전히 혼자 아이를 키워야 했죠
아이는 저처럼 외롭게 자라지 않도록 온 정성을 다해 키웠어요
분명 나는 남편과 사는데 아이는 혼자 키우니까 더 힘들었던 것 같아요
아이도 처음 키우는데 엄마는 손녀가 궁금하지도 않는지
아니, 아기 키우는 딸이 불쌍하지도 않는지 찾아오지도 않았어요
내가 힘들수록 엄마가 미웠어요
엄마가 나를 더 사랑했다면,
엄마가 나를 버리려고 하지 않았다면,
날 그때 지우겠다고 아빠를 협박하지 않았다면!
나는 더 행복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했어요
언젠가 엄마에게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엄마의 기억은 달랐어요
저를 임신해 너무 기뻤고
아빠와 매일 배를 만지며 예쁜 말을 했대요
뱃속에 있는 내가 혹시나 놀랄까봐 설거지 할 때도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안 나게 했대요
누구보다 잘 키우려고 했고
집안에 있는 돈을 다 긁어 절 위해 썼대요
입학식 때는 엄마 반지를 팔아 제 구두를 사줬다네요
저를 키울 때가 가장 인생에서 행복했대요
......
모르겠어요. 전 그런 게 기억 안 나요
산후우울증은 어김없이 저를 가만 두지 않았어요
저는 아기 키우는 게 힘들면 엄마를 떠올렸고
엄마를 떠올리면 화가 났어요
힘들고 화가 나니 아기가 미웠어요
'왜 애를 낳아서 힘들까?'
'남편은 애를 봐주지 않을 게 뻔했는데 왜 그때 지우지 못했을까?'
후회되기도 했죠
음......
선생님,
저 지금 혼란스러워요
말을 하면 할 수록 제가 누군지 모르겠어요
마치 제가 저의 엄마가 된 것 같아요
아니, 아기에요
엄마 뱃속의 아기에요
저를 지우겠다고 협박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기억나요
아니... 아냐,
이건 내 목소리야
뱃속의 애를 지워버리겠다고 남편에게 울부짖던 나인 것 같아요
선생님,
저 좀 살려주세요
제가 왜 이런 생각을 할까요?
이렇게 예쁜 아이를 두고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요?
선생님,
제가 왜 이러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