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 곳 이름 따라 반 백 년을 ‘곡성댁’이라 불린 어머니는 40평 즈음 되는 주택에 홀로 살고 있다. 7살에 한국전쟁을 맞았고 올해 77세이다. 일흔일곱 살은 ‘희수’라 한다. 장수를 축하한다는 의미이지만 어머니는 늘 자식들 앞에서 “이제 그만 가야지”라고 탄식한다.
당신의 남편이자 나의 아버지는 올해로 17년째 병원에 계신다. 정확히 말하자면 17년째 병원을 들락거리고 있다. 물론 거의 병원에서 살다시피 한다. 우리 가족에게 ‘7’은 지독한 운명이다. 아버지의 병명은 ‘알코올 의존증’이고 의학용어인 ‘의존증’은 사회적 언어인 ‘중독’보다 더 지독한 결과를 내놓고 있다. 아무리 17년이란 세월을 치료와 근신을 한다고 해도 아버지의 알코올 의존증은 나아지지 않고 있다.
자식은 모두 외지에서 각자의 가정을 꾸려 살고 있다. 곡성댁이 자식을 농사지었던 그 시골집에는 자식 숫자와 같은 강아지 세 마리만 있다. 곡성댁은 앞뒤 텃밭에 고추와 무, 파, 상추 등의 작물을 키우고 강아지 셋에 밥을 주는 게 일이다. 매일 같은 일상이 반복되고 해가 져 집으로 들어갈 땐 역시나 되뇌었다. “이제 그만 가야지.”다만 들어줄 자식이 없기에 속으로 말할 뿐이다.
곡성댁이 키우는 작물은 생산과 공급의 법칙을 거쳐 재화로 돌아오지 않는다. 수확해서 자식들에게 택배로 보내진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고맙다”는 자식의 말로 보상받을 뿐이다. 어쩌다 통장을 기계에 찍어보기라도 하면 기계적으로 같은 날짜에 찍히는 용돈이 있지만 그걸 찾아 쓰지 않으니 재화로 돌아왔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곡성댁이 자급자족 원시적 삶으로 회귀한 것은 아니다. 그도 동네 미용실에서 철마다 머리를 볶고, 손주들이 오면 오만원짜리 용돈을 건넬 줄 아는 ‘세련된 할머니’이다. 그에게 수입은 매달 자식들이 보내는 용돈보다 적은 국민연금, 22만4천원이다.
곡성댁의 가계부는 총수입액 22만4천원만큼 단출하다. 한 달에 두 번 오일장을 찾아 총 10만원 어치를 소비한다. 친구들하고 가끔 모여 화투치며 막걸리 사먹는 돈은 2만원이다. 4천원은 차비로 쓰거나 자판기 커피를 사먹었을 게다. 나머지 10만원 중 5만원은 거실장 맨 아래 서랍에 넣어둔다. 자식에게 택배 보내거나 손주에게 용돈을 쥐어주거나, 생일이 되어 자식들이 직접 와서 용돈이라고 두둑이 두고 가면 가는 길에 기름값에 보태라며 건네는 용이다.
나머지 5만원은 매월 5일에 고정적으로, 반복적으로 ‘지독하게’ 나가는 돈이다. 해가 지면 빨래를 게는 일처럼 습관적인 일이지만 매월 5일마다 고민한다. ‘이 돈은 대체 언제까지 보낼까.’
아버지는 병원에서 터줏대감이다. 20년이 넘은 병원이지만 중간에 병원장이 바뀌었으니 아마 아버지가 병원의 가장 오래된 사람일 테다. 그렇다고 텃새를 부리거나 무리를 만들어 힘을 과시하는 위치는 아니다. 77세 알코올 의존증 환자는 같은 환자들도 “답 없다”고 여기는 퇴물일 뿐이다.
그는 아내가 매달 보내오는 5만원으로 과자와 음료수, 사탕을 사서 병실 환자들과 나눠먹는다. 대부분의 환자들이 그보다 부유하지만 부식을 나눌 때야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기에 아낌없이 쓴다. 남편의 허세를 실제 보기라도 한다면 곡성댁은 당장에 동네 농협에 달려가 자동이체를 해지했을 테다.
장마가 시작돼 남부에 장대비가 내리던 7월 17일. 지난 설에 다녀가고 코로나19 핑계로 어머니를 찾아뵙지 않던 장남이 휴가를 일찍 냈다며 고향집에 내려왔다. 눈치가 빠른 곡성댁은 믿지 않았다. 처자식 없이 혼자 온 건 결혼 5년 차에 주식투자로 재산을 날린 후 처음이기 때문이다. 다시 15년 전의 아픔이 떠오른 건 그때처럼 장남의 어깨가 무거워 보여서였다.
장남은 집에 와서 30년을 버텨온 집 지붕에 비 새는 곳은 없는지, 역시나 30년을 써온 씽크대의 뒤틀린 문짝을 바로 잡을 수 있는지 부지런히 쑤시고 다녔다. 그런 아들의 모습에 곡성댁의 불안감은 더 심해졌다.
“앉아라. 감자 먹자.” 해가 가장 긴 하지에 수확해서 ‘하지감자’라 부르는 이 고을의 감자는 소금과 설탕을 넣고 푹 삶아 먹어야 제맛이다. 고향맛을 본 장남은 뜨거운 감자를 입안에서 식히며 긴 탄성을 토해냈다.
“뭔 일 있냐?” 곡성댁은 돌려묻지 않았다. 자식에게 죄책감을 덜 씌우려면 당신이 쉽게 나서야 한다는 걸 안다. “새로 시작한 장사가 쉽지는 않지? 네가 먹물만 묻혀오다가 장사한다고 해서 걱정이 많았다.” 장남은 목이 막히는지 냉수사발을 집어들었다.
서울 중견기업 부장으로 무역업을 맡던 장남은 코로나19로 회사가 경영이 어렵게 되자 1순위로 희망퇴직신청서를 받았다. 코로나로 일찍 받은 것이지 이제 은퇴할 나이가 됐기에 장남은 평소 생각하던 반찬가게를 열었다. 시대에 맞게 온라인 판매도 했지만 코로나19 여파로 외식이 어려운 가정에서 배달음식을 선호하자 반찬가게는 기대만큼 호황을 누리지 못했다.
“요새 사람들은 핸드폰하고 컴퓨터로 음식을 시켜먹어요. 배달기사를 하나 뽑았는데 비슷한 업체들이 많으니 광고를 많이 해야되더라고요. 은이 애미에게 얘기하기에는 아직 이른 것 같아서......”
곡성댁은 ‘은이 애미’란 말에 바로 작심했다. 내 새끼 어깨를 세우려면 며느리에게 당당해야 했다.
“700만원에서 좀 빠질 수도 있겠구먼.”
장남은 고개를 들었다.
“오백만 주세요. 어머니도 생활비 있으셔야죠.”
곡성댁은 벌써 서랍장을 열어 통장을 꺼내고 있었다.
“다 가져. 난 이제 갈 일만 남았는디 돈이 필요하간디.”
장남은 통장을 받아들었으나 쥘 수 없었다.
“아직 정정하세요. 손주 결혼하는 것도 보셔야죠.”
곡성댁은 머릿수건을 챙겨 일어섰다. 무릎에서 삐거덕 소리가 났다. “안 아픈 데가 없어. 니 애비가 병원에서 나오는 거 보고 죽을까 싶었는데 틀린 것 같어. 암시랑토 안항께 가져가. 난 매달 들어오는 나랏돈으로도 충분히 살어. 늙은이에게 22만원은 정승네 곳간이다. 너 서울로 대학 보냈을 때 첫 하숙비가 15만원이었고 용돈으로 7만원을 쥐어줘서 22만을 보냈어. 피 끓는 머슴아도 그 돈으로 살았는데 내가 못살까.”
장남은 통장을 쥐고 일어섰다. 피가 끓는 듯 얼굴이 붉어졌다. 서둘러 인사하고 차에 올랐다. 바지를 뒤져 기름값 5만원을 찾던 곡성댁은 차문을 열 수 없었다. 조심히 올라가라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밭을 향했다. 아들이 떠나자 머리 위 수건을 당겨 얼굴을 훔쳤다.
*2022년 국민연금 수기 공모전 최우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