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 부모들의 죄책감 문제가 아이의 생명보다 우선일 수는 없다.
나의 필명 ‘꼬야’는 내가 가지고 있는 별명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별명이다.
이 별명은 까꿍이가 옹알이에서 말을 막 배우기 시작할 즈음 ‘까꿍아! 고모야, 고모!’하는 나의 말을 듣고, 어느 날, ‘꼬야!’하며 나에게 안겨오면서 시작되었다. 고모야라는 나의 말을 듣고 안 되는 그 말을 ‘꼬야’라고 된소리 발음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까꿍이의 표정과 목소리를 잊을 수 없다. 웃음을 한가득 담은 환한 표정, 너무도 반갑게 맞이하는 하이 톤의 목소리는 아마도 오래 기억될 최고의 선물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꼬야’라는 나의 별명을 필명으로 오래 좋은 글을 쓸 것이다. 까꿍이가 준 최고의 선물이니까.
울고 웃고, 말을 배우고 감정을 배우는 모든 과정이 우리에겐 선물이다
아이들은 선물이다.
그들이 태어나서 울고 웃고, 말을 배우고 감정을 배우는 모든 과정이 우리에겐 선물이다.
예쁜 상자에 담긴 보석을 선물 받은 것처럼 설레고, 눈부시다.
하지만, 누구나 갑작스러운 선물을 반기고 설레어 하는 건 아니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 클릭을 잘못해 보게 된 광고,
우수에 가득 찬 눈으로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천진하단 느낌보다 아주 오랜 슬픔을 작은 몸으로 참아내고 있는 것 같은 아이의 사진, 그리고 사진 밑으로 쓰여진 사연은 베이비 박스에 버려져 보육원에서 생활 해오다 난로에 화상을 입어 많은 수술비와 치료비에 힘든 상황에 처했으니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베이비박스는 버려지는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박스로 우리나라에서도 2009년부터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키울 능력이 없는 부모들이 갓 태어난 아이를 쓰레기봉투에 넣어 버리거나 방치해 사망에 이르게 되는 일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한 것인데, 최근 더 충격적인 뉴스였던 건 자신들의 유흥에 정신 팔려 아이를 방치해 사망하게 만든 20대 부부의 사건이었다.
이처럼 이유야 어찌됐건, 베이비 박스는 가장 축복받을 순간에 버려지는 아이들에게 그나마 작은 울타리가 되어 준다. 그러나 베이비박스 운영에 대한 찬반논란이 팽팽하다. 버려지는 아이들이 해마다 증가하고 있는 만큼 아이들의 생명을 구하고 인간답게 살 권리를 주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필요하다며 찬성하는 입장과, 베이비박스가 운영되면 아이를 버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나 다름없고, 아이를 버리는 부모들의 죄책감마저 덜어줄 우려가 있다며 반대하는 입장으로 나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입장이 옳은 판단인지 나조차도 판단이 잘 서질 않는다. 하지만 최소한 부모들의 죄책감 문제가 아이의 생명보다 우선일 수는 없다. 그리고 아이를 버릴 수 있는 환경이라는 것이 작은 베이비박스가 있고 없고가 아닐 것이다. 유흥에 빠져 자신들의 아이를 버리는 반인륜적인 사람들은 엄한 법으로 엄중히 다스려야 하고, 그것을 제외하고는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던(아무리 그래도 용납될 수 없는 일이지만) 현실적인 문제들, 그 문제들이 발생되는 일이 없도록 육아의 환경과 많은 사회적 제도의 개선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왜 잘못 클릭을 해서리’
하루 종일 마음이 아팠다. 하루 종일 광고 속 그 아이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나는 남을 돕는 일에 앞장을 서거나, 정기적인 기부활동을 하는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까꿍이가 나에게 선물인 것처럼, 나의 세 조카들이 나를 성장시키는 것처럼 베이비박스에 버려지는 아이들도 소중한 생명이고, 환영받아야 할 선물이다. 그들도 누군가를 성장시키고, 누군가의 인생에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소중한 생명인 것이다. 그렇기에 베이비박스는 존재하여야 하고, 그것이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도록 사회적인 제도와 법을 재정비하여야 하는 것이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