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에 빨갛고 큰 고무 다라이를 놓고 물부터 받으셨다.
누구나 마음속 추억의 아이템들이 있을 것이다.
조카들을 하원 시키고 사장님의 급한 호출에 사무실로 다시 들어왔다.
배부른 타박 일지 몰라도, 공과 사가 구분이 안 되는 업무 환경을 탓하며 지내기엔 개선의 여지에 걸 희망이 너무나 부족하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는 공 측에서 넘는 선을 적당히 나도 넘나들고 있다.
여하튼 요가 시간까지는 넘기지 않을 요량으로 시작된 야근, 거의 막바지에 이르러 전화벨이 울렸다.
인천 사촌 언니였다.
"언니!!"
외딸로 자란 난 늘 언니라는 존재에 갈증이 있었다. 친자매들은 아니지만, 늘 그립고 보고 싶은 언니들이다.
언니와 가족들에 대해 안부를 묻는 사이 야근에 대한 급함은 잠시 잊었다.
"근데, 무슨 야근이야? 작은 아빠도 차암..."
"언니, 우리 사장님 별명이 뭔 줄 알아? 내가 지은 별명."
"뭔데?"
"퇴근 오분 전이야. 꼭 오 분 전에 오더를 내리시지."
"크크. 울 아빠도 퇴근 오 분 전인데!"
"정말?"
"울 아빠는 회사서 도대체 몇 시에 퇴근하시는지, 꼭 퇴근 시간 오 분 전에 집 초인종이 울렸거든."
"크크, 그래? 우리 아빠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럼 엄마가 피곤하실라나?"
신나게 사장님 겸 아버지들의 뒷담화 수다를 마치고, 조카들과 그들을 케어하는 엄마 안부로 자연스레 화제 전환이 되었다.
"요즘 얘들은 좋겠어. 우리 때는 할머니 사랑이 뭐니? 너 기억나지? 유명하신 울 박**할머니."
"그럼, 다 기억나지."
"좀 무서웠니? 매일 혼난 기억밖에 없다."
그렇다. 우리 할머니는 호랑이 할머니셨다.
당신의 며느리들에게는 불통의 시어머니셨고, 손주들에게는 정은 있으셨겠지만, 그 표현 방식이 가히 인자하시지는 않으셨다. 그러기엔 손주들이 많으셨다. 요즘처럼 한 집에 하나 둘인 손주가 아니라, 옛날에는 다들 그랬겠지만, 우리 할머니에게 손주들이 좀 많았다. 큰집 넷에, 작은 집 넷, 그리고 우리 집이 셋... 그뿐인가? 고모들도 있었으니... 요즘처럼, 울 엄마처럼 손주들을 한 명 한 명에게 애정을 표현하기에 힘드셨겠지. (쉴드는 이쯤 하고, 울 할머니 성격이 그리 살가운 성격은 아니셨지)
그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할머니에 대한 기억보다 큰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더 따스하다.
큰엄마와 울 엄마의 수다에서는 할머니 버금가는 불통의 아이콘이지만, 나에게 큰아버지는 언제나 재밌고, 뭐 하나라도 챙겨주려 하시는 분이셨다. 불 꺼라 물 아껴라 하시는 분이 우리 삼 남매가 가면 마당에 빨갛고 큰 고무 다라이(첨부1)를 놓고 물부터 받으셨다. 그렇게 우리의 물놀이가 시작되곤 했다.
나의 유년 시절 한 켠에 자리 잡고 있는 빨강 고무 다라이는 지금 아이들의 형형색색 물놀이 용품 못지않은 정겨운 해피 아이템이었다.
모처럼 언니와의 통화로 과거 유년 시절, 그 아이템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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