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한증, 철학, 위로와 다정
'어느 정도 예상했지?'
예쁜 갈색빛의 커피를 앞에 두고 대수롭지 않게 털어놓은 내 말에, 친구는 대수롭지 않게 이렇게 되물었다.
매운 음식이라도 먹은 것처럼 입술은 잠깐 벌어지고, 혀는 얼얼하게 떨렸다. 나는 대충 끄덕거리는 고갯짓으로 답변을 얼버무렸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고, 질문을 받은 내가 다시 '나'에게 물어볼 시간이 필요했다.
퇴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날부터 퇴사 당일까지,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것을 제외하면 현실적인 계획으로는 단 두 가지만 정해두었다. 두 가지는, 다한증 치료와 정신과 방문이었다.
운동과 영양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어릴 때에는 식사량이 남들보다 2배~3배는 되니 당연히 땀이 많을 수밖에 없다고 여겼으나 점차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게 되니 조금 겁이 났다. 증상이 점점 더 심해진다면 여름철에는 사회생활에 지장이 생길 것이고, 지금 단계도 충분히 벅참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갑상선 검사와 혈액 검사를 했음에도 지극히 정상이 나와 의사 선생님께 체질이라는 진단명과 부교감신경 억제제 복용(효과가 없는 듯하다)이라는 치료를 가져왔다. 한의학에는 호감을 두고 있지 않기에 괜히 체질이라는 답변에 불만이 있었으나, 그래도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 있었다.
쉬는 동안 해야 할 계획은 하나가 더 있었다.
뇌과학 책에서 읽은 바로는 우울증과 불안, 스트레스와 같은 정신적인 증상들의 치료는 마치 감기와 코로나처럼 외부에서 침투된 바이러스를 치료하듯 일반화된 약물치료를 진행한다고 했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를 바 없이 경미한 우울증과 불안 증세일 것 같아 예약과 방문을 결정했다. '난 아직 건강하지만 내 몸을 잘 살피기에 초기 증상 때 병원을 방문했지'라고 내뿜는 듯한 의기양양함과 함께 말이다.
빠르게 내 증상을 말하고 약물 치료를 받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기다리는 동안 약 20분 간 우울증, 불안, 스트레스에 대해 검사를 진행했고 대기열을 안내하는 모니터에 내 이름이 등장한 뒤 진료실로 들어가 의사 선생님과 내 검사 결과를 나타내는 모니터에 시선을 번갈아 주며 인사했다. 그리고 증상이 약한 1단계부터 증상이 극심한 4단계 중, 나는 우울과 스트레스는 4단계, 불안은 1단계라는 걸 친절히 알려주는 막대 모양의 그래프를 멍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검사 결과는 처음 보는 기계를 바라보는 것처럼, 보고 있어도 신기했다. 난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우울과 스트레스와는 거리가 멀었고, 그나마 무언가 높게 나온다면 불안이 가장 높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새삼 생사와 생존, 매 끼니를 걱정했던 때, 삶이 정말 암담하고 어둡게만 느껴지던 그때에 진료를 받았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도 제법 많이 궁금했다.
의사 선생님께서도 해당 병원은 약물 치료가 전문적이기에 정신적 증상이 있다면 약물 치료를 권장하는 편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 40분 간의 인생 이야기를 역행적으로 질문하고 경청하신 뒤에는 자기혐오와 자기비판, 우울증과 스트레스가 극심하나 메타인지와 자기 점검 능력이 훌륭하기에 약물치료를 권장하고 싶지 않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라는 질문이 내 얼굴에 너무 드러났는지, 잠깐 웃으시더니 권장하는 치료법을 이어서 말씀해 주셨다. 니체와 쇼펜하우어 같은 철학자들의 철학을 가까이해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훌륭한 철학자들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니체와 쇼펜하우어는 극심한 자기혐오와 자아비판으로 철학을 시작한 사람들이기에 조금 더 느끼는 점과 와닿는 점이 분명 있을 것이라고 덧붙여 주셨다.
각종 병원을 다녀본 내게 '철학을 가까이해보기'라는 낯선 치료법을 받아온 건 한 번에 납득되는 상황이 아니었다. 여기 병원 실력이 안 좋은가? 의사분께서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비전이나 치료개념을 나한테 투영하시는 걸까? 등등 현실적이고 못된 생각들이 불쑥불쑥 머리를 들이밀었지만, 철학공부라는 치료법을 받아보기로 했다. 기이할 정도로 평생 인복이 좋았던 내게, 이 의사 선생님도 좋은 인복이었을 것이다라는 생각과 말을 동시에 중얼거리면서.
영양제와 운동법을 찾아보던 검색 실력으로 나름 면밀히 철학 도서들과 입문서들을 검색했고, 비교적 재밌고 쉽게 읽을 수 있는 철학 도서들을 여러 권 구매해 읽고 있다. 철학 책에는 흥미 붙이기가 좋았고 폭죽처럼 눈에 들어오는 단어들도 있어 좋았다. 무엇보다, 어슴푸레 가지고 있던 나의 생각들을 훌륭한 철학자들의 문장과 말, 단어들과 연결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내 생각을 철학자들이 대신 말해주는 듯한 부분들을 발견할 때마다 눈앞에 폭죽이 연신 터졌다.
철학 책을 읽어가며 내 우울과 스트레스, 불안이 나아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마치 질병을 예방하거나 치료하기 위해, 그 병원체의 약화된 형태나 일부를 의도적으로 주입해 면역 반응을 일으키는 것처럼 크고 작은 부작용들이 생기는 것 같기도 하다. 허무주의와 회의주의, 냉소와 체념 등 많은 생각들과 감정이 소나기처럼 삽시간에 다녀간다. 그럼에도, 여태 너무 무념무상에 가까운 삶을 운 좋게 살아왔고, 살면서 충분히 고민할 시간을 가지지 않았다는 점을 되뇌며, 열심히 생각하고 열심히 생각에 빠지려고 한다. 곁에는 감사함과 따뜻함을 꼭 같이 앉혀두고.
'어느 정도 예상했었는데, 금방 괜찮아졌어. 지금은 편안하고 좋아'
걱정과 이해를 담아 예상하지 않았냐고 되물어준 친구에게, 그리고 각자 다른 색깔과 향기로 나의 곁에 있어주고 위로와 다정을 건네주는 친구와 지인들 모두에게 곧 전할 말을 미리 써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