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선생 Nov 12. 2022

草선생

- 가지치기


근처 화원에서 얻어온 둥치 이 센티가 안되고 어른 키의 반 정도 되는

소나무 한 그루를 식목한 것은 귀촌 후 며칠 뒤이다.

귀향, 귀농도 아니고 귀촌이다, 아니 강화도 섬으로의 이동이니 귀島가 맞을 터…


가느다란 가지 네 개가 밑동으로부터 엇갈려 있고 부실하고 볼품없는 작은 나무인지라 흙더미를 고른 다음

뿌리 들어갈 자리를 오목하게 파내어 살짝 밀어 넣고 바라보니 대 꼬챙이를 꼽아 놓은 양 그저 뻘쭘하다.


자라서 제 몫을 할까 구부정한 목덜미를 갸웃거리며 다음날부터 아침이면 들여다보고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는 재미로 만지작거리는 것이 하루의 첫 일과가 되었다.


햇빛 쏟아지고 눈 오는 시간이 제법 흘러 일 년이 넘고 몇 개월 지나 사계절을 보내니

벗 나무 옆에서의 자태가 그저 보아줄 만한 어린 소나무로 된 듯싶고

바람에 맞서고 여름 비를 흠뻑 맞아 솔잎이 뾰족하니 대견스러워

뒷짐을 지고 그윽하게 바라보는 초 선생의 눈매에 주름이 쭈악 펴진다


그렇다고 초 선생의 성질머리가 자분자분해져 그저 멍 때리며 보고 있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가느다란 둥치에 붙어있는 네 개의 가지가 어찌하면 그럴싸하게 균형을 잡고 쑤욱 자랄 수 있을까

몇 가닥 남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아무리 대갈빡을 굴려보고 수작을 떨어도 안목 따위와는

평생 담을 쌓은 터라 수차례 그저 솔잎만 슬쩍 건드려볼 뿐 특히 별도리가 없다.

   

평양댁(마누라 부모님 즉 장인 장모 고향에 맞추어 초선생이 부인님을 부르는 호칭)이 초벌로 준비해 놓은

각종 재료에 슬쩍 발가락만 얹어 서양 집밥을 두리뭉실 만들어내면서 드문드문 오시는 손님을 극진하게

모시는 "고객中心"을 生의 유일한 슬로건으로 삼은 터, 앞치마를 반듯이 하고 마누라님 눈치 보는 일 외에는 특히 해야 할 일도 없고, 그렇다고 찾아와서 소주 한잔 사는 이도 없는 타향이라 마음 부칠 곳 없는 처지,

카페 앞 잡풀들과 몇 그루 나무에 정을 붙이는 것이 그나마 시간을 보내는 유일한 낙이다.


여하튼 상당기간을 오른쪽 뒤쪽 위아래 이리저리 보다가 옆으로 뻗은 가지 네 개가

여전히 마음에 개운치 않아 마침내 작심하고 녹이 슬어 날이 무디어진 작은 톱을 찾아내

기운차게 앞뜰로 나섰다.


톱이 손에 쥐어지자 마치 대목(大木)이나 된 냥 가슴이 뻐근해지고 이두박근이 볼록거리며

숨소리마저 헐떡 거칠어지는 것이 더 이상 어쩔 수 없이 정신이 혼미 해지더니

갑자기 눈꺼풀에 힘이 풀리면서 하늘이 노래지는 착각 속에서 톱 날을 제일 아래 가지에 대고

몇 번 흔들어본다.


투 둑 하고 힘없이 아래 가지 하나가 떨어지나 이건 아닌데 싶어 이번에는 윗부분 가지와

옆으로 나온 것에 살며시 톱을 대어 싹둑 잘라냈다.


가지 네 개중 셋을 쳐버렸으니 그저 둥치만 삐죽 남아 팔다리 떨어진 사마귀 형상이다.

아차차… 돌이킬 수 없는 일, 붙어있을 때와 잘려 나간 후 나무의 모습은 천양지차이다.

 

참으로 아뿔싸!


며칠을 탄식하며 아침에 보고 시시각각 또 보고하여도 여간 후회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엎질러지고 뒤집어진 일이라 또다시 크나큰 실수에 둥치에서 잘려 나간 마디의 흔적을 더듬어 보곤

했는데, 처음에는 온몸으로 땀을 짜낸 듯 투명한 진액이 베어낸 자리에서 나오더니 어느새 진득한 것이

방울방울 맺혀 있다.


하루 이틀 지나자 흡사 눈물을 흘린 듯,

둥치를 따라 핏덩이가 몽글몽글 뭉친 것처럼 차마 손으로 만지면 비명을 지를 듯,

이제는 말라붙은 아픔의 자국이 초 선생의 몰염치한 뒤통수를 내리치고 四肢를 뜯어내는 고통으로 다가온다.


다윈 선생은 일찍이 “자연은 비약하지 않다(NATURE DOES NOT JUMP)”라고 일갈하셨다.

초 선생의 급한 성질머리가 어린 소나무를 좀 더 빠르게 자랄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이것저것 가림 없이

가지를 쳐냈으니 점프는커녕 거의 죽다 살아난 듯 보기에도 안타깝다.


또한 맹자 가라사대 우물에 빠진 어린아이에 대한 측은지심을 말씀하셨음에도 자연에 따라 행하고

인위를 가하지 않는 “무위의 道”를 단숨에 여지없이 패 대기 쳐버린 것이다.


어린 소나무 한 그루라도 보듬고 아껴주며 그도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자연에 대한 지극 정성이요 사람의 도리인 것을 잠시 기다림을 참지 못하고 이리도 방정맞은 것인가...


솔잎 끝에서부터 땅속 어두운 뿌리까지 온몸으로 견디어 내다 아픔에 절규하며 마침내 울음 터트린

소나무의 외침을 어찌 알겠는가 마는 하늘에는 여전히 햇빛이 따스하고

구름은 저리도 평온하며 바람은 오늘도 순리대로 나부낀다.


초 선생은 소나무 한 그루를 작살내고 그저 멍 때리고 있을 뿐이다.


산란한 마음에 평정을 찾는다고 산에, 절에, 성당에 우두커니 앉았다 오거나,

어설픈 기도로 설레 발을 치면서 고달픈 책을 뒤적거리며 사사로이 無心이라는 엄청난 것을 맛보고자

한 개수작보다, 어린 나무의 가지치기를 통하여 "나"와 "나"이외의 모든 존재가 동일하다는

萬物一體를 아주 깨알만큼 이라도 맛보게 된 것이다.


초 선생은 오랜 명상과 침묵에서도 결코 깨달음 한 톨도 얻을 수 없음을 어슴푸레 느낀다.


그것은 자신이 모자라고 하찮음을 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은 무엇인지는 모르나 알 수 없는 그것에서 그저 정신없이 맴돌고 있지 않은가...


다행히 어린 나무는 자연의 무심함에 감사하게도 초 선생 키 정도로 자라서

그저 심심하게 제 멋대로 살아간다.


아프니까 청춘이 아니라,

제발 건드리지 마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